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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ngyeoul78)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검천리에는 팔당 호반의 정암산 맑은물이 흘러서 남한강으로 마지막 終을 친 S자 계곡속에 종여울이라는 작은 집의 변해가는 4계절의 이야기를 종여울을 통해 서로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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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박범신 박영석 대장과 2인, 나는 '죽음'이라 말하지 않겠다간밤에 꿈을 꾸었다. 잠에서 깨었을 때 박영석 대장이 막걸리잔을 기울이며 너털웃음을 웃고 있는 이미지가 내 눈앞에 남아 있었다. 작년 이맘때던가, 남극탐험을 얼마 앞두고 재동 한 음식점에서 만났을 때 술잔을 기울이던 모습 그대로였다. 나는 이제 세계적인 산악인으로 성공했으니 안락한 생활을 할 때도 되지 않느냐고, 왜 또 그 험한 길을 굳이 가려 하느냐고 범박하기 이를 데 없는 질문을 했다. "이렇게 살아있잖아요!" 그는 거두절미 자신의 가슴을 주먹 쥔 손으로 탁 두들겼다. 나는 찔끔해서 섬광 같은 그의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다. 뻔한 일상에 습관적으로 기대 살고 있는 내 유약한 삶이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그와 신동민·강기석 대원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다는 뉴스가 들리지만 나는 믿지 않는다. 지금 나는 조사를 쓰고 있는 게 아니다. 산악소설 '촐라체'에서 나는 이렇게 쓴 바 있다. "죽고자 가는 게 아니다. 살아 돌아올 수 있는 길이기 때문에 가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가. 그는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했고 모든 대륙의 최고봉에 올랐으며 북극과 남극점을 발로 찍었다. 일찍이 어느 산악인이나 탐험가도 도달하지 못한 대기록이었다. 그리고 그 위대한 기록과 함께 그도 나이가 들었고, 올해로 꽉 찬 마흔여덟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언제나 새로운, 더 위험한 길을 향해 담대하게 떠났다. ▲ 마지막… 손 흔드는 박영석 대장… 실종 당일인 지난 18일 안나푸르나 남벽을 오르기 시작한 박영석 원정대의 모습. 흰색 원 안에 손을 흔드는 이가 박영석 대장, 먼저 오르고 있는 이는 신동민 대원이다. /대한산악연맹 제공그에게 있어 자본주의 문명이 주는 달콤한 일상은 가짜이고 허울에 불과했다. 이미 그의 발밑에 깔린 히말라야 14좌에 새로운 '코리안루트'를 내겠다는 꿈은 그의 꿈이었을 뿐 아니라 우리 모두의 꿈이었다. "내가 시작하면 누군가 계속 가지 않겠나? 숨 쉴 수 있는 마지막 순간까지 나는 계속 갈 것이다!" 라고 그는 말했다. 그는 말하자면 누군가의 등대, 뒤따라오는 누군가의 지도가 되기 위해 이미 위대한 정상에 이르렀음에도 불구하고 그 새로운 길을 간 것이다. 그러니 그와 그들이 왜 우리 곁으로 돌아오지 않겠는가. 히말라야 14좌를 처음으로 완등한 라인홀트 매스너는 빙벽에 둘러싸인 ‘죽음의 지대’를 뚫고 나가려면 어떤 ‘모럴’이 필요하다고 썼다. 고산 등반가들에겐 한 발 한 발이 모두 ‘무덤과 정상 사이’에 걸쳐져 있으므로 그곳에서 그들은 ‘지각이 더 맑아지고’마침내 ‘전혀 새로운 생의 비전을 연다’는 것이다. 일상으로부터 빠져나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현대인에게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실존적 모럴이며 비전이다. 그들은 그러므로 야성을 거세당한 우리 대신 그곳에 갔으며, 걸었다. 놀라운 생의 비전을 우리 앞에 열어 보이려고. 차세대 산악인이라 손꼽혔던 신동민 대원은 고된 등반을 마치고 돌아와서도 동료들을 위해 묵묵히 ‘청국장이나 홍어찜’까지 맡아서 조리했던 덕인이었으며, 서른세 살의 강기석 대원은 베이스캠프에서 늘 궂은일을 도맡아 했던 ‘아카데믹한 산악인’이었다는 말을 뒤늦게 듣는다. 박영석 대장은 물론, 그들에게도 ‘코리안루트’는 개인의 꿈이 아니었음이 틀림없다. 이상향의 뜻으로 쓰이는 샹그릴라는 본래 ‘언덕 저쪽’이라는 뜻이다. 지금이라도 그들이 ‘언덕 저쪽’에서 신들메를 고쳐 신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산을 내려오며 손을 흔들어줄 것 같다. “산에 가야 산악인이지!” 박영석 대장의 목소리가 여전히 우렁우렁 귓속을 울린다. 그와 그들은 단지 산악인이 아니었다. 우리의 꿈을 대신 짊어지고 간 극상의 모럴, 참된 비전이었다. 나는, 그리고 우리는 아직 그들을 떠나보내지 않았다. 사고 닷새前, 산속 마지막 생일잔치… 朴대장은 속삭였다 "황홀해" [산에도, 남극에도, 북극에도… 길없는 곳에 길을 만든 사나이 박영석] 朴대장, 대원들에 짬뽕 대접 "가능성 1%만 있으면 도전" 세계 최초 그랜드슬램 달성 "도전하는 자가 세상의 주인" '바보처럼 살았군요' 즐겨 불러… 마치 산처럼… 우직했던 바보 박영석(48) 대장은 도전에 늘 목말랐던 사나이였다. 그는 한 번의 혹독한 실패 후 "다시 오면 내가 개다"라고 할 만큼 치를 떨었던 북극점에 재도전해 2005년 4월 마침내 태극기를 꽂았다. 세계 최초로 히말라야 8000m 14좌(座), 7대륙 최고봉, 3극점(남·북극, 에베레스트)에 모두 도달하는 '산악 그랜드슬램'을 달성하는 순간이었다. 사람들은 그때 박영석 대장의 도전이 마침표를 찍었다고 했다. 하지만 박 대장은 "1%의 가능성이 있다면 어디든 도전한다"며 다시 장비를 꾸렸다. 그리고 그는 스스로 '영혼의 고향'이라고 부르던 히말라야에서 신동민(37)·강기석(33) 대원과 함께 잠들었다. ▲ “아버지, 보고 계시나요” 30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열린 실종자 위령제에서 박영석 대장의 장남 성우(21)씨가 절을 하고 있다. 옆에 서 있는 이는 박 대장의 동생 상석(46)씨. /대한산악연맹 제공 박 대장은 서울 토박이다. 위로 누나가 4명이었던 6남매의 장남은 운동에 소질이 있었다. 오산고 사격부에서 활동했던 그는 고2 때인 1980년 히말라야 마나슬루를 등정하고 돌아온 동국대 산악부의 카퍼레이드를 보고 가슴 속 뜨거운 기운을 느꼈다. 1983년 동국대 체육교육과에 입학한 박 대장은 곧바로 산악부에 가입했다. 1993년 아시아 최초로 에베레스트(8848m)를 무산소 등정한 그는 2001년 7월 K2(8611m)에 오르며 히말라야 8000m 14좌를 완등했다. 당시 세계 최단기간 등정 기록(8년2개월)이었다. 무서운 기세로 14좌에 올랐지만 그는 늘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었다. 1991년 에베레스트를 오르다 100m를 굴러 떨어져 마취도 하지 않고 얼굴에 철심을 3개나 박았다. 1995년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긴 북동릉을 오르다 눈사태를 맞아 눈더미에 파묻혔지만 셰르파에게 발견돼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1997년에는 다울라기리(8167m)에서 크레바스에 빠져 추락하다가 얼음기둥에 배낭끈이 걸리며 간신히 목숨을 건졌다. ▲ 이미지를 클릭하시면 스냅샷으로 크게 볼 수 있습니다. / 조선닷컴 북극점을 밟으며 '산악 그랜드슬램'을 이룬 박 대장에게 강연 등 편하게 돈을 벌 수 있는 제의가 쏟아졌지만 그는 "탐험가에겐 정년(停年)이 없다"며 또 다른 모험을 택했다. 박 대장은 산에 오르는 과정을 중요시하는 '등로주의(登路主義)'가 자신이 가야 할 방향이라 믿었다. 히말라야에 자신의 길인 '코리안 루트(Korean Route)'를 내고 싶었다. 2007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신(新)루트를 개척하고자 떠난 박 대장은 5년 이상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후배 대원 둘을 눈사태로 잃었다. 후배들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살면서 재우고 먹이며, "선배는 무조건 주는 존재"라고 할 만큼 후배 사랑이 각별했던 그에겐 씻을 수 없는 상처가 됐다. 한동안 술에 젖어 살았던 그는 2009년 에베레스트 남서벽에 결국 '한국인의 길'을 냈다. 박 대장은 에베레스트와 함께 '히말라야 3대 남벽(南壁)'으로 불리는 안나푸르나와 로체에 '코리안 루트'를 낸 후엔 뒤로 물러날 생각이었다. 자신을 도와준 셰르파들에게 보답하기 위해 네팔 카트만두에 컴퓨터를 보급하고, 병원도 지을 예정이었다. ▲ 생일 케이크 자르는 朴대장(사진 왼쪽)… 박영석 대장(노란 옷)이 자신의 음력 생일인 지난 13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서 생일케이크를 받고 기뻐하고 있다, 신동민 대원이 준비한 박대장의 생일 케이크(사진 오른쪽).‘축 생일 사랑해요’라고 쓰여있다. /노스페이스 제공 지난달 19일 출국한 박영석 원정대는 고지대 적응을 위해 아일랜드 피크(6189m)에 오른 뒤 지난 9일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음력 생일을 지내는 박 대장은 13일 그곳에서 생일상을 받았다. 원정대에서 요리사로 통하는 신동민 대원이 '축 생일 사랑해요'라고 쓴 생일 케이크와 미역국을 준비했다. 박 대장은 "오늘은 정말 황홀하다"고 했다. 그는 다음날 생일 축하에 대한 보답으로 손수 짬뽕을 끓여 대원들을 열광시켰다. 지난 18일 안나푸르나 남벽 등정에 나섰던 박 대장 일행은 짙은 안개와 낙석 위험으로 오후 4시(현지시각) 하산을 결정했다. 그리고 두 시간 뒤 베이스캠프와의 교신을 끝으로 연락이 두절됐다. "내려오다 죽을 뻔했다"며 터뜨린 너털웃음이 그가 세상에 남긴 마지막 음성이었다. 박 대장은 평소 '바보처럼 살았군요'를 자주 불렀다. 도전밖에 모르던 '아름다운 바보'는 그렇게 '풍요의 여신' 안나푸르나의 품에 영원히 안겼다. 박영석 원정대, 빙탑지역에 묻힌 듯 ▲ 히말라야 안나푸르나에서 실종된 박영석 대장(오른쪽부터)과 강기석, 신동민 대원이 지난 2009년 에베레스트 원정 길에서 밝게 웃으며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박영석 원정대는 지난 18일 '가스, 낙석이 많아서 하산한다'는 교신을 마지막으로 실종됐다. /연합뉴스 이인정 산악연맹 회장 “내년 수색때 찾을 수도” 히말라야 안나푸르나를 등반하다 실종된 박영석 대장 등 3명이 출발점으로 하강한 뒤 ABC(전진)캠프로 가던 중 플라토(빙탑지역)에서 눈사태를 만나 파묻힌 것으로 추정된다고 대한산악연맹측이 30일 밝혔다. 원정대 일원으로 ABC 캠프에 머물며 박 대장 일행과 교신해온 이한구 대원은 이날 카트만두 시내 ’호텔 히말라야’에서 실종자 가족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브리핑에서 이같이 말했다. 사고 발생 이후 수색과정에도 줄곧 참여해온 이 대원은 “김재수 대장과 김창호 대원 등이 참가한 3차 수색도중 안나푸르나 출발점 부근에서 박 대장 일행의 하강 로프가 잘려 있고 그 부근에 잘린 로프가 잘 정돈돼 있는 것을 발견했다”고 말했다. 이어 “이는 박 대장 일행이 등반도중 눈사태를 만나 서둘러 로프를 타고 하강한 뒤 ABC 캠프를 향해 가던 도중 플라토에서 세락(딱딱한 눈덩이)형 눈사태를 좌우에서 만나 파묻혀 있을 가능성이 높음을 의미한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이전 수색과정을 통해 유력한 실종 추정지역으로 간주된 베르크슈룬트(남벽과 빙하 사이)와 주변 설사면(눈쌓인 지역)에는 박 대장 일행이 없는 것으로 3차 수색을 통해 결론이 내려졌다고 덧붙였다. 이에 따라 내년 봄쯤 기상조건이 좋아지고 첨단장비를 동원해 수색을 재개하면 박 대장 일행을 발견할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말했다. 브리핑을 주재한 이인정 대한산악연맹 회장도 “올해 수색에서 얻은 성과는 베르크슈룬트 및 설사면에는 박 대장 일행이 없고 플라토 지역이 유력한 실종 추정지역으로 떠올랐다는 점”이라고 확인했다. 이 회장은 이어 “실종자 가족들에게 뭐라 할 말이 없다”면서 “내년에도 박 대장 일행에 대해 수색을 계속하면 찾을 가능성이 있다”고 부언했다. 박 대장과 신동민, 강기석 대원은 지난 18일 안나푸르나 남벽에서 ’코리안 루트’를 개척하려고 등반하던 중 실종됐다. 박 대장 일행에 대한 장례식은 내달 1일부터 사흘 동안 서울대병원에서 ’산악인의 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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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락극혜애정다(歡樂極兮哀情多).' '환락이 극에 달하고 나면 슬픈 정만 많이 남는다.' 예전에 소설가 이병주도 이 구절을 찬탄한 적이 있지만, 여러 번 씹어 볼수록 절창이 아닐 수 없다. 한(漢)제국의 최고 전성기를 누리던 한무제(漢武帝)가 가을 바람이 불어오는 어느 날 강물에 배를 띄워놓고 신하들과 함께 흥겨운 잔치를 하다가 읊은 '추풍사(秋風辭)'의 한 대목이다. 황제가 누려본 환락의 극치는 무엇이었을까? 절대 권력의 쾌감이었을까? 아니면 궁궐 미인들과 누려본 성적(性的) 오르가슴이었을까? 슬픈 정(哀情)이 남지 않는 쾌감이 있다면 그것은 '마운틴 오르가슴'이 아닌가 싶다. 등산의 즐거움 말이다. 조선 후기 장동김씨(壯洞金氏)로서 최고의 명문가였지만, 권력보다는 제자 양성과 산수 유람으로 한세상을 보내고자 했던 김창협은 "산수를 보는 것은 마치 성현군자를 보는 것과 같다"고 고백하였다(以下 이종호,'권력과 은둔'에서 인용). 금강산(金剛山)을 갖다가 모든 산 가운데 최고의 성인으로 간주했던 것이다. 근래에 중국 황산(黃山)과 금강산을 비교하곤 하는데, 두 산을 모두 올라가 보니 금강산이 한 수 위다. 왜냐하면 금강산에는 동해바다의 수기(水氣)가 밀려와 바위산의 화기(火氣)를 달래주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운무에 싸인 황산의 경치는 대단하지만 수기가 부족한 것이 흠이라면 흠이다. 김창협의 동생 김창흡은 한발 더 나갔다. "산천은 나에게 진실로 좋은 벗이며 또한 훌륭한 의원이다(誠一好友也 亦一良醫也)." 등산이야말로 병을 치료해 주는 의사라고까지 생각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어유봉(1672~1744)은 "유산은 독서와 같다(遊山如讀書)"고 했다. 책상 앞에 앉아서 책을 보는 것만 독서가 아니고 명산을 노니는 것도 또한 독서와 같다고 생각한 것이다. 바위에 오르고, 노을을 감상하고, 소나무 밑에 앉아 있는 것 자체가 독서라면 독서이다. 이런 지점에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 안 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이민서(1633~1688)는 "등산은 술 마시는 것과 같다(遊山如飮酒)"고 했다. 등산할 때 너무 많은 일행이 함께 가면 시끄럽고 서너 명이 가면 단출하면서 분위기가 집중되어 좋다는 뜻이리라. 등산의 계절이 오고야 말았다. ▲ 등산용 재킷은 연 4조원 규모로 성장한 국내 아웃도어 시장에서 가장 인기 있는 품목이다. 브랜드마다 주력 등산용 재킷엔 하나같이 "눈과 비, 바람은 차단하고 땀은 밖으로 배출한다"는 설명이 따라붙는다. 이런 기능을 가능케 하는 것이 바로 재킷 외피에 쓰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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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작 '흑산'으로 돌아온 김훈 작가 김훈(63)은 20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그리고 2시간 동안 찰스 다윈(Darwin·1809~1882)의 '종의 기원'을 100쪽가량 읽었다. '모든 생명체는 변화를 거부하는 종족을 도태시키고 사멸시키면서 진화의 수억만년을 건너가는 것'이라는 문장을 수첩에 옮겨 적었다. 그러고는 아침밥을 먹고 일산 자택에서 서울 삼청동으로 출발했다. 이날 오전 10시 30분 삼청동의 한 음식점. 새 장편소설 '흑산(黑山·학고재 출간)'의 기자간담회 자리에서 김훈은 질문을 받기 전 10분 동안 모두(冒頭) 발언을 했다. 200자 원고지 10장 넘는 방대한 분량이었다.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는 다윈·진화·순교자·배교자였고, 발언의 핵심은 인간의 진화와 자연의 진화가 만나는 지점을 그려내고 싶다는 불가능한 꿈에 관한 이야기였다. '흑산'은 천주교 박해의 절정기였던 19세기의 전반부 50년이 시간적 배경. 가톨릭을 배교(背敎)한 뒤 흑산도에 유배갔던 정약전을 중심으로 동시대 지식인과 백성이 겪은 풍상(風霜)이다. 작가는 다산 정약용 4형제의 기막힌 잔혹사를 예로 들었다. 가부장으로 집안만을 지킨 장남 약현(이복 맏형), 천주교를 믿었다가 배교한 둘째 약전, 순교해 목숨을 잃은 셋째 약종 그리고 남들까지 밀고해 살아남은 막내 약용. 작가는 "마치 (도스토옙스키가 쓴) 카라마조프 형제의 집구석 같지 않으냐"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먼저, 왜 정약전이었나. "이 소설에는 많은 순교자가 나오고 많은 배교자가 나온다. 배교의 최정상에는 정다산(정약용)이 있다. 그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배교했다. 천주교 동료와 교인을 밀고했고, 아마도 그 대가로 목숨을 부지해서 엄청난 학문적 저작을 남겼고, 자손만대 추앙을 받고 있다. 그의 인격과 명예를 훼손하려는 게 아니다. 그건 다산의 선택이다. 반면 정약전은 세례 후 배교한 뒤 흑산도로 귀양을 갔다. 그곳에는 단 한 권의 책도, 언어를 교환할 사람도 없다. 그 섬에서 약전은 물고기를 들여다보다가 죽었다. '자산어보(玆山魚譜)' 하나를 남겼지. 한없는 답답함과 슬픔을 느꼈다. 소설에는 그 슬픔이 군데군데 배어 있다." ―정약전과 다윈이라니. "자유와 영혼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도 있고, 다 버리고 현세로 돌아온 사람도 있다. 약전은 현세로 돌아온 경우다. 다윈이 말한 진화에는 인간의 자유나 이성은 없었을 것이다. 살기 위한 거대한 자연의 질서일 뿐이다. 이들이 마지막에 만날 수 있을까. 소설을 끝냈을 때 문득 수억만년 시공을 날아가는, 진화의 끝을 향해 날아가는 다윈의 새가 떠올랐다. 정약용과 정약전은 자기 형제에 관해선 단 한 줄도 없다. 침묵으로 묻어버린 고통." ―역사소설이라는 표현을 거부했다. 이 소설이 현대에 가지는 의미는. "인간의 시대는 정약전의 시대이건 지금이건 다 똑같다. 기본적으로 약육강식이다. 어떤 이는 해결책으로 공정거래를 얘기하는데, 그렇다고 약육강식이 없어지는 게 아니다. '공정한 약육강식'이 있을 뿐이다. 시장(市場)이 예수 그리스도가 될 수는 없는 것 아니겠는가. 인간의 딜레마다. 그리고 나는 무슨 무슨 '주의자'가 아니다. ○○주의자가 가지고 있는 야만성을 혐오하는 사람이다." ―'흑산'은 무엇에서 비롯되었나. "옛 양화진 자리에 강물을 향해 불쑥 튀어나온 봉우리가 있는데, 누에 대가리 같다고 해서 이름이 잠두봉(蠶豆峰)이었다. 이 봉우리에서 천주교 신자들을 사학(邪�U)의 무리라고 해서 1만명 넘게 죽였다. 너무나 많은 충격을 받았다. 무의미한 흙덩어리에서 빚어진 죽음. 나는 즉물적인 사람이다. 책을 읽어서는 생각이 잘 안 나고, 이런 걸 봐야 생각이 난다." 김훈은‘흑산’의 속표지 그림을 직접 그렸다. 연필로 10분 동안 그린 이 새의 이름은‘가고가리’(아래). 진화의 수억만년 시공을 건너‘가고가리’는 가고 또 간다. /이태경기자 ecaro@chosun.com―그래도 책은 당신 삶인데. "내가 책을 많이 읽는 것은 맞다. 하지만 이건 추호도 자랑이 아니다. 내 친구 중에 일 년에 책 한 권도 안 읽는 놈들이 있다. 그런데 나보다 인격도 고매하고, 세상도 더 잘 산다. '흑산'은 많은 자료가 도움이 됐다. '정감록'이 가장 큰 몫을 했다. 놀라운 판타지의 세계다. 하나 더. '흑산'의 형식적 주인공이 정약전일지 몰라도 무수히 많은 백성과 지식인이 등장한다. '흑산'에는 주인공이 없다." ―어쩌면 '칼의 노래'부터 이번 책까지 주인공은 사실상 모두 김훈이 아니었을까. '동어반복'이라는 비판도 그래서 좋다는 사람도 있다. "1인칭에 대해 과도한 집착이 있다. 3인칭이 무섭다. 내가 아니라 그를 어떻게 알고 쓸 수 있겠는가. 3인칭을 온전히 쓰는 작가는 매우 드물다. '동어반복'이란 비판은 나로서도 괴롭다. 그 말이 나오면 우리 말의 비극을 말할 수밖에 없다. 국어사전을 찾아봐라. 100% 동어반복이다. 가령 노란색은 사전에 개나리꽃 빛깔이라 나와 있다. 결국 거대한 동어반복의 시스템. 언어가 갖고 있는 기본적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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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력에 좋다” 점잖은 양반들도 은밀히 즐겨 노다 요시히코(野田佳彦) 일본 총리가 18일 방한 첫날 저녁 추어탕으로 식사를 했다. 다음 날 한일 정상회담에서도 양국 정상은 추어탕을 화제로 담소했다고 한다. 예부터 추어탕은 시골에서 보양식이었다. 여름부터 추수 때까지 논두렁에서 살이 통통하게 오른 미꾸라지를 잡아 끓여 먹는 추어탕 한 그릇에 농부들은 기운이 솟아 힘든 농사일을 견딜 수 있었다. 한양에서 양반집 마님이 깊은 밤 사랑채의 서방님이 드실 야식으로 은밀하게 준비했던 음식도 추어탕이었다. 예전에는 천한 음식이라고 여겨 양반들이 드러내 놓고 먹기는 뭣했지만 정력에 좋다니까 남의 이목을 피해서 서방님께 어떻게든 드리고 싶었던 음식이었다. 옛날의 동양의학서나 민간 속설에서는 하나같이 미꾸라지가 정력에 좋다고 나온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동양에서 공통되는 일인데 중국도 마찬가지다. 서양의 돈 후안에 버금가는 동양의 플레이보이가 서문경이다. 그가 남자 주인공으로 나오는 명나라 때 소설 ‘금병매(金甁梅)’에서도 미꾸라지는 정력의 상징으로 그려져 있다. 금병매는 에로틱한 소설로 유명하지만 소설 속 음식과 요리법이 방대해 중국에서는 홍루몽과 함께 명나라 요리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꼽힌다. 이 밖에도 추어탕이 좋다는 이야기는 옛 문헌 곳곳에 보인다. 중국 의학서인 ‘본초강목(本草綱目)’에 미꾸라지는 맛이 달고 평(平)하며 독이 없는 식품으로 특히 양기가 위축됐을 때 먹으면 치료가 된다고 했다. 조선 후기의 실학자인 이규경도 ‘오주연문장전산고(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양기가 부족할 때 미꾸라지를 끓여 먹는다고 적었다. 그런데 매우 정력적인 음식이었기 때문인지, 혹은 논두렁에서 잡는 흔한 물고기였기 때문인지 옛날 점잖은 양반들은 내놓고 추어탕을 먹지 않았다. 조선시대 문헌에 추어탕 관련 기록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어쩌다 추어탕이 나오는 문헌에도 농민이나 도시 하층민이 먹는 음식으로 적혀 있다. ‘오주연문장전산고’에는 추두부탕(鰍豆腐湯)이 나오는데 미꾸라지가 두부를 파고 들어가게 만든 후 잘라서 부쳐 먹거나 탕으로 끓여 먹는다고 했다. 맛이 매우 기름지며 한양에서는 성균관의 반인(泮人)들 사이에서 성행한다고 적었다. 반인은 관노는 아니어도 성균관에 소속된 노비 신분으로 백정만큼이나 멸시를 받았던 조선시대 최하층민이다. 조선시대에는 청계천 걸인들이 추어탕을 독점적으로 끓여 팔았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기록으로 남아 있지는 않다. 또 다른 기록은 19세기 초 서유구가 쓴 ‘난호어목지(蘭湖漁牧志)’에 나온다. 한글로 ‘밋구리’라고 표기했는데 시골사람(野人)들이 국을 끓여 먹는데 특이한 맛(異味)이라고 설명했다. 서민음식인 추어탕의 위상이 높아진 것은 근대 초기다. 1929년에 나온 ‘별건곤(別乾坤)’이라는 잡지에 예전에는 선술집에서 하급 노동자들이 먹었던 추어탕이지만 지금은 경제가 곤란한 까닭인지, 계급사상의 타파인지 말쑥한 신사들도 먹는다는 내용의 기사가 있다. 1924년 발행된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朝鮮無雙新式料理製法)’에도 추어탕 끓이는 법이 소개돼 있다. 이 무렵에는 추어탕이 많은 사람으로부터 공개적으로 사랑받는 음식이 됐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추어탕은 발전을 거듭해 지금은 남원 추어탕, 서울 추어탕 등 지역별로 특색이 있는 음식으로 발전했다. 그뿐만 아니라 전통을 자랑하는 일부 추어탕집은 정재계 유명 인사들도 자주 찾는다. 국가의 지도자까지 즐겨 먹으니 옛날과 비교하면 미꾸라지가 용 됐다.<음식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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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미술 名家 리움·간송미술관 전시 맞대결고미술 애호가들의 시선(視線)을 붙잡아라! 이번 주, 고미술 명가(名家)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과 성북동 간송미술관이 대규모 전시를 열며 맞대결을 벌인다. 전시 시작은 리움이 사흘 먼저다. 13일부터 조선시대 도화서(圖畵署) 소속 화원(畵員) 30여명의 작품 110여점이 나오는 '조선화원대전(朝鮮畵員大展)'을 통해 그동안 문인화에 비해 저평가받아왔던 화원들의 작품을 재조명한다. 간송미술관은 16일부터 '풍속인물화대전(風俗人物畵大展)'을 연다. 가을 정기전으로 출품작은 100여점이다. ◆御眞부터 春畵까지… 조선 화원에 금기란 없었다 리움 '조선화원대전'의 백미(白眉)는 단원(檀園) 김홍도(金弘道·1745~?)의 1776년작 '군선도(君仙圖)'. 가로 575.8㎝, 세로 132.8㎝의 종이에 수묵담채로 19명의 신선을 그렸다. 불사(不死)의 약을 지닌 중국 신화 속 선녀 서왕모(西王母)는 3000년에 한 번 반도(蟠桃·복숭아)가 익을 때를 기다려 신선들을 초대해 잔치를 연다. 이 그림엔 잔치에 참석하기 위해 약수(弱水·신선이 살았다는 중국 서쪽의 전설적인 강)를 건너는 신선들이 등장한다. 기대감에 부푼 신선들의 표정, 날아가는 듯 가벼운 움직임, 바람결에 날리는 옷자락을 생동감 있게 표현한 걸작으로 국보 139호다. ▲ 단원 김홍도의 1776년 작‘군선도(群仙圖)’. 불사(겘死)의 약을 지닌 중국 신화 속 선녀 서왕모(西王母)가 3000년에 한 번 베푸는 잔치인‘반도회(蟠桃會)’에 초대받아 가는 신선들의 모습을 생동감 있게 그려냈다. /삼성미술관 리움 제공 전시를 기획한 조지윤 책임연구원은 "조선시대에는 무병장수(無病長壽)를 기원하며 신선 그림을 선물하곤 했다. 이 그림은 단원이 왕실이나 권력자의 의뢰를 받아 그린 것으로 보인다. 관념적인 그림을 주로 그렸던 문인 화가들은 그리기 힘든 도화서 화원 특유의 실용적인 그림"이라고 설명했다. 국가에 소속된 직업 화가였던 도화서 화원의 또 다른 임무는 왕과 공신(功臣)의 초상을 그리는 것. 화원들 중 인물화의 일인자로 꼽혔던 이명기(李命基·1756~?)는 정조(正祖)의 어진(御眞)을 두 차례나 그린 화가다. 전시에는 이명기의 대표작 오재순(吳載純) 초상이 소개됐다. 정조 때 대사헌, 대제학을 거쳐 판중추부사까지 오른 오재순(1727~1792)은 제자백가에 두루 통달한 학자. 오재순의 나이 65세 때 그린 이 초상은 얼굴의 주름과 수염 한 올까지 세세하게 묘사했고, 눈빛의 깊이를 통해 그의 정신까지 담고자 했다. 보물 1493호. 어진으로는 영조(英祖)의 것이 나왔다. 18세기 원본을 고종(高宗) 때 화가인 채용신(蔡龍臣·1850~1941)과 조석진(趙錫晉·1853~1920)이 1900년에 함께 모사한 작품이다. 보물 932호. 리움이 2006년 '조선말기 회화전' 이후 5년 만에 개최하는 고미술 기획전인 이번 전시에는 그동안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았던 작품들도 나왔다. 왕의 궁궐 밖 행차를 그린 '동가반차도(動駕班次圖)'가 그중 하나. 가로 996㎝의 긴 그림으로 제작 시기와 행렬 목적 등은 불분명하지만 그림에 태극기가 있는 점 등으로 미루어 보아 19세기 후반 고종의 행차를 그린 것으로 추정한다. 만일 자녀와 함께 전시에 갈 생각이라면 주의하시길. 전시의 말미에 '19금(禁) 구역'이 있다. 김홍도 전칭(傳稱) 춘화(春畵) 8점이 따로 전시됐다. 신체의 은밀한 부위까지 거리낌 없이 묘사했다. 이 역시 최초 공개다. ◆딱 2주간… 조선 최고의 美人을 만난다 간송미술관 '풍속인물화대전'의 전략은 미인계(美人計)다. 혜원(蕙園) 신윤복(申潤福·1758~?)의 대표작 '미인도(美人圖)'가 전시장 나들이를 한다. 신윤복을 여성으로 설정한 TV 드라마 '바람의 화원'의 인기에 힘입어 7만여명의 관객을 모았던 2008년 가을 정기전 이래 3년 만이다. 은행알 같은 눈매, 새침한 입술, 미색 저고리에 옥색 치마를 받쳐 입은 요염한 미인을 실견(實見)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 이 밖에 '월하정인(月下情人)', '연소답청(年少踏靑)' 등 국보 135호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에 실린 신윤복의 대표작 15점이 나온다. ▲ (왼쪽)조선시대 화원 중 인물화의 일인자로 꼽히는 이명기의‘오재순 초상’, (오른쪽)혜원 신윤복의‘미인도’. /삼성미술관 리움·간송미술관 제공 1971년 가을부터 매년 봄·가을 각 2주씩 정기전을 열어온 간송미술관의 81번째 전시로, 조선 전기 화가 안견(安堅·생몰년 미상) 전칭(傳稱)작 '사립독조(�^笠獨釣·도롱이에 삿갓 쓰고 홀로 낚시질하다)'부터 이당(以堂) 김은호(金殷鎬·1892~1979)의 '능파미보(凌波微步·파도 타고 가볍게 걷다)'까지 조선왕조 500년간의 풍속인물화의 흐름을 훑어볼 수 있다. 명리(名利)에 초연하게 하늘의 뜻에 따른 삶을 사는 낚시꾼과 나무꾼의 대화 장면을 그려 세상의 이치를 담아낸 '어초문답(漁樵問答·낚시꾼과 나무꾼이 묻고 대답하다)' 두 점을 비교해보는 것도 이번 전시 감상의 묘미. 조선 중기 화가 이명욱(李明郁·생몰년 미상)의 '어초문답'은 인물의 머리카락과 수염, 팔과 다리의 근육, 의복의 주름까지 생생하게 표현한 수작(秀作)인데, 인물의 얼굴과 머리 모양, 의복 등은 중국식이다. 중국 고사(故事)를 충실히 재현한 셈. 반면 조선 후기 화가 겸재(謙齋) 정선(鄭敾·1676~1759)은 '어초문답'을 우리 식으로 재해석했다. 이명욱 그림에서는 나무꾼이 멜대를 어깨에 걸치고 있지만 겸재 그림에서는 나무꾼 등 뒤에 지게가 놓여 있다. 최완수 간송미술관 연구실장은 "중국에선 짐을 나를 때 주로 멜대를 쓰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지게를 썼다. 진경산수(眞景山水)의 대가였던 겸재는 중국 전통의 화제를 기존 화풍에 얽매이지 않고 우리 식으로 재해석해 그렸다"고 설명했다. 전시는 딱 2주간 열린다. ▶조선화원대전, 서울 한남동 삼성미술관 리움에서 13일부터 내년 1월 29일까지, 일반 7000원, 초·중고생 4000원, (02) 2014-6900 ▶풍속인물화대전,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16~30일, 입장료 없음, (02)762-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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