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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여울지기
(jongyeoul78)
경기도 광주시 남종면 검천리에는 팔당 호반의 정암산 맑은물이 흘러서 남한강으로 마지막 終을 친 S자 계곡속에 종여울이라는 작은 집의 변해가는 4계절의 이야기를 종여울을 통해 서로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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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의대를 수석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하며 미국인을 놀라게 했다는 전범석 교수. 그의 삶은 불의에 닥친 병마로 한순간에 무너졌다. 그러나 9개월의 투병 끝에 다시 일터로 돌아왔다. “병이 찾아오면 ‘왜 하필 나에게’ 하는 자책보다 어떻게 이겨 나갈 것인가에 전념하는 게 중요하다”는 전 교수. “두 발로 서서 환자 돌보는 행복,사고 전엔 몰랐죠” 토요일(24일) 오후 서울대병원 분위기는 무거웠다. 장마가 이어지는 후덥지근한 날씨에 무표정한 얼굴로 링거 병을 들고 다니는 환자들의 얼굴, 수심이 가득한 가족들의 얼굴, 피곤한 얼굴로 바삐 움직이는 의사와 간호사들을 바라보는 일은 미안하면서도 불편했다. 서울대병원 신경과 전범석 교수(52)의 방은 11층에 있었다. 사람이 오가기 힘든 세 평 남짓 좁은 연구실에는 낡은 에어컨이 소음을 내며 돌고 있었다. 국내 최고 권위의 대학병원 교수 방이 이렇게 초라했던가. 연구실 한쪽에 운동기구가 보였다. 그의 투병이 아직도 ‘진행 중’임을 직감할 수 있었다. 이제 막 외래 진료를 마치고 한숨 돌리고 있다는 그에게 “주말에 쉬지도 못하니 안 됐다”고 하자 “일할 수 있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어쩌면 돌아오지 못했을 뻔한 일터에 다시 서게 된 것만으로도 감사하다는 뜻일 것이다. 전 교수는 16일 서울대병원 인사에서 신경과학교실 주임교수 겸 신경과 진료과장에 임명됐다. 서울대병원, 분당서울대병원, 보라매병원 등 3개 병원 신경과를 운영하고 의사 65명을 지휘해야 하는 중책이다. 6년 전 전신마비로 병상에 누웠다가 재기한 전 교수 이야기는 한동안 의료계의 화제였다. 의사라고 해서 병의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을 터이다. 하지만 자신의 전공 분야 질병으로 치명적 장애를 입은 것이나, 다시 일어선 것 모두 흔한 일은 아니다. ‘나 역시 의사이기는 하나 그에게 일어난 기적과 같은 회복에 과연 의학적 필연성이 작용했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던 그가 유능하고 훌륭한 의사이자 교수로서 본분을 다하며 많은 환자에게 희망을 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전 교수가 지난해 말 펴낸 투병기 ‘나는 서 있다’(예담)에 수록된 동료 이왕재 서울대 의대 교수의 말이다. 전 교수의 책은 ‘성공의 기록’이 아니라 ‘고통의 기록’이며 아직 고난이 끝나지 않은 사람의 기록이다. 그러면서 시종일관 담담하다. 삶의 가장 절망적인 상황을 이토록 감정을 절제하며 써내려간 사람은 대체 어떤 사람일까. 실제 만난 그는 책에서 느낀 그대로였다. 냉정한 사람이라 생각해도 좋을 만큼 표정도 말도 몸짓도 절제되어 있었다. 대답은 종종 단답형이었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그의 냉정함은 생명에 대한 오랜 관찰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는 목숨을 다루는 일은 섣부른 희망이나 헛된 꿈에 의존해선 안 된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남을 치료할 때나, 자신의 병과 싸울 때에도 이런 신념은 똑같이 적용된 듯 보였다. ―의지가 강해 보이세요. “그러니까 의대에 갔겠죠. 의대 들어가고 나오려면 웬만큼 참을성 없으면 안 되니까.” ―그래도 책에 보면 투병 초기 공포와 두려움이 묻어나오던데…. 어떻게 이겨내셨습니까. “그런 생각이 든 것도 잠깐이었습니다. 치료가 시작되면서 그런 (한가한) 생각을 할 마음의 여유조차 없었으니까요.” 그는 투병을 전투에 비유했다. 총알이 빗발치는 상황에서 병사에게 중요한 것은 어떻게 총탄을 피해 앞으로 나아가느냐인 것처럼 자신 역시 ‘어떻게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오로지 치료에만 전념하고 싶어 면회도 사절하고 심지어 부모에게조차 몇 개월 뒤에야 투병 사실을 알렸다. ―아직도 쓰러진 원인을 잘 모른다면서요. “주말에 등산을 했습니다. 정상에 서자마자 통나무가 쓰러지듯 바위 앞으로 고꾸라졌어요. 다행히 앞니가 깨지면서 충격을 흡수한 덕에 더 심한 뇌손상은 면했지만 의식과 언어기능만 온전할 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습니다.” 전 교수는 서울대 의대를 수석으로 졸업했으며 미국에서 전문의 과정을 거치는 동안에도 최상위권 성적을 유지했다. 많은 사람이 희망하는 모교 교수가 되었고 1993년에는 태아의 뇌세포를 파킨슨병 환자의 뇌에 이식하는 수술을 국내 처음으로 성공시켰다. 지은 책만 9권에, 2000년 이후 10여 개 기관에서 연구비를 지원받고 있었다. 노력한 만큼 결실을 본 순조로운 삶이었다. 자기관리도 철저해서 건강에도 비교적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실패도 몰랐고 수치도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이, 그것도 환자를 돌보던 의사가 하루아침에 씻는 일, 먹는 일은 물론 목욕 배뇨 배변까지 남의 손을 빌려야 하다니…. “자살을 생각해 본 적은 없는지” 물었다. 등산중 갑자기 쓰러져 척수손상… 헬기로 이송 수술 “일할수 있어 감사할뿐” 이달 신경과학교실 주임 맡아 “이젠 환자입장 더 잘 보여… 사고가 나를 바꿨습니다”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는 상태가 참담했습니다. 약을 먹고 싶어도 내 손으로 구할 수도 없고 뛰어내리고 싶어도 높은 곳에 올라갈 수도 없는 상황 말이죠.”(그는 당시 상황을 ‘다리가 부러진 채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대지도 못하는 짐승 같은 신세였다’고 책에 적었다) 그는 터진 디스크를 제거하고 위아래 척추를 고정하는 수술을 받은 후 3일 만에 물리치료와 재활운동을 시작했다. 수술은 잘됐지만 상황은 쉽게 나아지지 않았다. ―보통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당하면 ‘왜 하필 내게’라는 마음이 먼저 든다던데요. “저도 내가 얼마나 큰 죄를 지어 이런 벌을 받나 하늘을 원망도 했습니다. 하지만 일단 현실로 받아들이기로 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누구한테나 올 수 있는 일이 나만 비켜갈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거야말로 오만이죠. 중요한 것은 ‘왜 하필 나냐’ 하는 자책이 아니라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는 냉철함입니다.” 그의 말이 이 대목에서 다소 길게 이어졌다. “힘든 병이 찾아오면 누구나 자책부터 하게 마련이죠. 오늘 만난 환자들 중에도 왜 이런 병이 생겼는지 모르겠다고 하소연하는 분이 많았어요. 하지만 그런 생각은 치료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아요. 병이 나서 치료를 결심했다면 어떤 일이 생길 수 있고 어떻게 병과 싸울 건지 계획을 세워야 합니다.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상이 시작되는 거죠.” 그는 기자에게 “중환자실에 가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기자가 “있다”고 하자 이렇게 말했다. “한마디로 난리죠? 한쪽에서 일(응급상황)이 터지면 그쪽으로 간호사들이 우르르 달려갑니다. 그 순간 저 같은 사람이 몸을 뒤집어 달라고 도움을 요청해도 뒤집어 줄 시간이 없는 거죠. 엘리베이터는 또 얼마나 밀립니까. 저만 해도 침대 카트에 실려 힘들게 타고 내려가면 주어진 물리치료 시간은 15분, 20분이에요. 그런 일들을 모두 그러려니 하고 견뎌야 합니다.” 그가 말한 ‘주어진 상황을 불만 없이 받아들이는 일’은 뜻한 대로, 마음먹은 대로 이루며 살아온 사람들에게 자칫 부족할 수 있는 관대함이다. 병이 그를 바꿔 놓은 것일까. “옛날엔 환자가 말을 안 들으면 왜 의사 말을 따르지 않느냐고 야단을 쳤어요. 지금은 설사 잘 따라와 주지 않아도 ‘다 이유가 있겠지’ 이해합니다. 최선을 다해도 안 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그는 “병이 나기 전에는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고도 했다. 의외의 말이었다. “내 딴엔 가장 좋은 치료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환자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거예요. 환자가 의사를 믿지 않고 의사도 환자를 믿지 않는 불신이 팽배한 의료계 분위기에 불만이 많았죠. 지금은 한계를 인정하고 그 속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찾는 게 현명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다친 뒤 갑자기 늙어 버렸나 봐요. 하하하.” 무표정했던 얼굴이 환해졌다. ―지금은 행복하신가요. “행복이라는 게 어떤 건지 잘 모르겠지만 만족하고 있어요. 바라는 게 없다고 할까요. 아니, 바란다고 해서 다 얻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됐다고나 할까요.” 그에게선 의사를 넘어 철학자의 모습이 느껴졌다. 내친김에 그가 생각하는 죽음과 삶은 무엇인지 물었다. ―생명을 다루는 의사일 때도 그랬고 환자가 되어 중환자실에서도 죽음을 많이 목격했다고 하셨는데…. 죽음에 대해 담담해지던가요. “글쎄요…. 누가 그러더군요. 죽음이란 누구나 꼭 한 번은 맞닥뜨려야 하는 일인데 그것에 대한 준비는 허술하다고. 그렇다고 무슨 준비를 해야 할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가진 사람이나 배운 사람이나 언제 죽을지 모릅니다. 절대자가 생을 관장하나요. 아니면 유전자인가요, 팔자인가요. “(미소를 띠며) 잘 모르겠어요. 생명이란 게 너무 복잡하고 어려워서.” ―선생님 같은 분이 잘 모르겠다고 하니 오히려 이상합니다. “(잠시 침묵 후)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잖아요. 오직 내가 알 수 있는 것은 지금 이 순간밖에 없으니 현재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요. 그래도 인간이 다른 동물보다 번성한 이유는 서로 간에 정보를 교환하며 돕고 살기 때문이라고 해요. 왜 그런지는 몰라도 남을 도울 때 행복감을 느끼고 마음이 편하다는 실험 결과도 있고요. 어쩌면 남을 도우며 사는 게 자기를 위해 사는 일이기도 하죠.” 전 교수는 책에서 아들을 갑자기 잃은 유대교 랍비 쿠쉬너가 쓴 ‘왜 착한 사람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란 책을 인용하며 이렇게 적고 있다. ‘절망, 분노, 원망, 후회, 자기연민 이런 것들은 우리를 고난에서 구하지 못한다. 고난을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만이 고통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다. …쿠쉬너가 자신의 삶에 닥친 불행을 극복함으로써 남의 슬픔과 불행에 공감하는 훌륭한 랍비가 되었듯 나 역시 내 육신의 고난을 통해 좀 더 환자의 고통을 이해하는 따뜻한 의사, 이를 가르치는 교육자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갑작스러운 병은 ‘의사 전범석’을 무너뜨렸지만 그는 환자를 이해하는 ‘진정한 의사 전범석’이 되어 환자 곁으로 돌아왔다. 그래서일까, 그와의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 길 만난 병원 풍경은 들어설 때와는 사뭇 달라 보였다. 어디에선가 저마다의 고통을 껴안고 그것을 이기려 애쓰는 사람들이 그의 얼굴과 겹치면서 고통이 있는 이곳이야말로 희망이 싹틀 수 있는 곳임이 느껴졌다. 허문명 기자 angelhu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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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못을 중심으로 네 개의 정자가 있다. 가장 늦게 지어졌다. 승재정(勝在亭) 뒤에 부채꼴 형태의 관람정(觀纜亭) 존덕정(尊德亭) 1644 인조 22년에 지어진 건물로 처음엔 육면정으로 부르다가 존덕정으로 바뀌었다. 이 건물과 이어진 다리 남쪽에 시간을 재는 일영대(日影臺)가 있었다 한다. 취규정(聚奎亭) 취한정(聚寒亭) 소요정(逍遙亭) 1636 인조14년에 거대한 바위인 소요암을 깍아 내고 그 위에 홈을 파서 휘도는 물길을 끌여들여 작은 폭포를 만들었으며 흐르는 물위에 술잔을 띄우고 시를 짓는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을 했다고. 태극정(太極亭) 존덕정일원이다. 좌로부터 폄우사(貶愚 木+射), 존덕정, 관람정 다시 인정전이다. 1405 태종5년에 창덕궁과 함께 건립되었으나 태종18년에 다시 지어졌고 임란때 소실, 1610 광해 2년에 재건, 1803 순조3년에 소실, 이듬해 복원. 인정전은 국보 225호이다. 사진을 찍으려면 얼굴을 가린다. 왜. 2010. 4. 22. 창경궁 돈화문. 태종12년(1412년에 건립, 임진왜란때 소실, 광해군 즉위년인 1608년에 재건. 목요일이었다. 입장료 15,000원. 두 명이니 30,000원. 눈알이 튀어나왔다. 나중에 알고보니 평소에는 3,000원인데 목요일은 자유관람이라서 15,000원이란다. 이유가 있다. 뒤쪽을 아무나 다니면 너무 훼손될가 걱정이 되긴한다. 본전을 하려면 아침부터 가야. 금천교(錦川橋) 가운데 귀면이 보인다. 앞부분 북쪽의 모습 진선문에 신문고가 있었는데 일반백성이 치기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신문고 설치 이유는 이렇다 : 반역의 형상이 보이면 빨리 와서 신고하라는 것이다. 부용지(芙蓉池)에 있는 사정비각원(四井記碑閣) 주합루(宙合樓) : 천지 우주와 통하는 집. 아래층은 규장각, 위층은 열람실 좌측 전각은 서향각(書香閣) 일본놈들이 이곳을 연회장으로 사용했고 책은 총독부를 거쳐 서울대로 옮겼다. 어수문(魚水門) : 물고기가 물을 더나 살 수 없다는 격언과 같이 통치가는 항상 백성을 생각하라는 교훈. 영화당 : 과거시험을 치르기도 했다고. 동쪽에서 본 모습 부용지에서 본 모습 부용정(芙蓉亭) 불로문(不老門) 애련지(愛蓮池) : 숙종 " 내 연꽃을 사랑함은 더러운 곳에 처하여도 맑고 깨끗하여 은연히 군자의 덕으 지녔기 때문이다." 애련정(愛蓮亭) : 숙종 18년(1692)에 정자를 지었다. 의두합(矣斗閤) 뒤에서 본 연경당(演慶堂) : 1827 순조 27년에 창건, 사대부 살림집을 본 떠 왕의 사랑채와 왕비의 안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으면 단청은 하지 않았다. 후원 높은 곳에 있는 농수정(濃繡亭)은 마치 매가 날개를 편 것같이 날렵한 모습이다. 연경당(演慶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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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단식 70일째를 맞은 법륜스님을 서초동 정토회관에서 만났습니다. 스님은 지난 5월26일부터 오늘까지 금식기도를 하고 계십니다. 어제까지 스님은 문경정토수련원에서 외부와의 접촉을 끊은 채 금식과 명상을 행하시며, 대중들의 여름 명상수련을 지도하고 계셨습니다. 스님은 야윈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얼굴은 환하게 웃으셨습니다. 초인적인 단식을 해 온 티는 전혀 나지 않았습니다. 다만 몸무게만 많이 줄었을 뿐이라고 하시며 밝게 웃으십니다. △ 법륜스님은 어제까지 금식기도와 함께 대중들의 명상수련을 지도하셨습니다. (문경정토수련원) 스님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고 강조하시며 이야기를 시작하셨습니다. Q. 70일 가까이 단식을 하시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5월 중순 북한 동포들의 아사 소식을 듣고 ‘저들이 굶주리는데 어찌 나만 먹을 수 있겠는가’라는 생각에 ‘북녘 동포를 살리자’고 호소하며 금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해마다 3·7일(21일)씩 단식기도를 했는데, 올해는 북한 식량사정이 더 심각해서 길어지고 있습니다. 단식기도를 하는 뜻은, 그들의 배고픔을 나누겠다는 것과 그들?고통을 내가 느끼면서 더 적극적으로 그들을 돕겠다는 것,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들의 문제를 해결하려면 큰 기적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러려면 내 기도가 간절해서 천지신명이 감동할 정도가 돼야 한다는 것입니다 처음엔 저쪽의 아픔을 함께한다는 ‘동체대비’의 마음이었는데, 요즘은 저들의 죽음을 방치한 이쪽의 죄를 대신 짊어진다는 ‘대속’의 마음이 더 많이 듭니다. 기도 7·7일(49일)이 되는 날 이명박 대통령이 대북 인도적 지원 용의도 있고 6·15 선언도 논의할 의향이 있다고 밝혔는데, 하필 그날 아침 금강산 관광객 피격사건이 터졌습니다. 지금까지 모든 수고가 도루묵이 된 느낌이었습니다. 이럴 때 주저앉느냐, 다시 일어서느냐는 수행자의 견고한 믿음과 정진의 힘이 결정하는 것입니다. 저렇게 많?북한 주민들이 죽어가는데, 아무도 저들을 돌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죽음?대한 책임의식도 없습니다. 사실은 우리 모두가 가해자입니다. 가해자 대신 죄값을 받아 주는 기도가 필요하다고 느꼈습니다. 그래서 다시 3·7일(21일) 더 기도에 들어갔습니다. 수행은 결국 내 자신의 깨달음이거든요.“ <100만 네티즌들의 마음을 모아요~, 100만인 서명운동 클릭해 주세요> Q. 북한 주민들의 현재 식량 사정은 어느정도입니까? “5~6월에는 황해남도와 황해북도 농촌이 특히 어려워 아사자가 많이 나왔습니다. 그런데 황해도는 7월 들어 햇보리, 햇밀, 햇감자 등이 나오면서 최근 아사자가 조금 줄어들었습니다. 지금은 강원도, 자강도, 양강도, 함경도 순으로 어렵습니다. 풀죽으로 연명하는 세대가 점점 늘어나면서 특히 노인이 많이 죽어나가고 있고, 학교에 못 가는 아이들이 많아지고 있어요. 도시 시장 주변에 ‘꽃제비’ 아이들도 많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입니다. 1990년대 중반 대기근 때는 배급이 잘 나오다가 끊겼기 때문에, 한꺼번에 무리 죽음을 당할 수 밖에 없었어요. 그러나 지금은 지난 10년간 일반 주민들에게도 배급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장사, 뙤기밭 농사 등으로 나름대로 자구책을 마련하며 생존해 오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생존경쟁에서 밀리는 극빈층부터 죽게 됩니다. 그래서 아사자가 늘어남에도 불구하고 사회문제가 덜 되게 됩니다. 죽을 사람들이 죽는거라며 북한 사회 안에서도 외면되는 측면이 많습니다. 올들어 이미 많은 사람들이 굶어죽었지만 문제는 90년대 중반처럼 집단적으로 아사하는 게 아니고 4500여개 리와 동마다 한두 명씩 영양실조로 굶어죽으니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게 되는 겁니다.“ Q. 주위에서는 대북식량지원에 대해 곱게 보지 않는 시선도 있습니다... “북한 당국에서 곱게 보지 않습니다. 제가 북한소식을 펴내는 <좋은 벗들>을 북한 당국은 ‘나쁜 벗들’이라고 그래요. 북한 인권이나 난민 문제를 지적하니 그런 거지요. 남쪽의 보수진영에서는 제가 북한 지원을 주장하니 ‘퍼주기론자’라고 반대하고, 좌파진영은 북한 당국과 민중을 동일시하니 주민들이 굶어죽는 현실을 인정하지 않죠. 미국 정부도 ‘북한을 포용하고, 약소국 권리를 인정하라’고 주장하니 제가 북한을 대변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 모든 비난이 바로 분단의 당연한 과보, 업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입니다.” Q. 2008년 식량난이 예년과 다른 점은 무엇입니까? “2006년 북 핵실험 이후 국제사회의 지원이 거의 중단됐습니다. 2006년과 2007년 연속된 홍수 피해, 2008년 한국 정부의 식량 지원 중단 등이 한꺼번에 겹치면서 5월부터 아사자가 발생했어요. 올해 식량난은 예년의 일상적 식량난과는 다른, 아사 위험이 큰 긴급 재난 상황에 속합니다. 이대로 방치하면 갈수록 아사자가 더 많이 나오게 됩니다. 우리가 막아야 합니다.” Q. 하지만, 반대로 남북관계는 자꾸만 경색되어 갑니다. 어떻게 풀어나가야 할까요? “내 식대로만 하려면 사랑하는 부부지간에도 갈등이 생기게 되지요. 상대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것이 필요해요. 지난 10년 동안 남쪽이 좀 아량을 가지고 북쪽을 이해하려고 노력해서 남북 교류가 활성화된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남쪽의 양보 방식에 대해 남쪽의 일부 사람들이 불만이 많았어요. 지금 남쪽의 새 정부는 남북이 서로 똑같이 주고받자고 주장하니까, 싸움이 일어날 수밖에 없는 겁니다. 계속 싸우든지, 서로 양보해서 타협하든지, 아니면 한쪽이 더 양보해서 포용하든지 해야 합니다. 그동안 쌍방 간에 합의한 것들에 대해 서로 존중하는 자세가 무엇보다 필요해요. 민족 문제를 너무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의 남북 교류화해 정책을 존중하는 게 우선 중요합니다. 두 정부가 인권 등 북한 민중에 관한 것은 외면하고 북한 정부와만 밀접히 관계한 것은 비판하고 개선하면 되지요. 금강산 사건에도 불구하고 이 대통령이 대북 인도적 지원 등 큰 원칙을 천명했으니 거기 맞춰서 풀어가야 합니다. 이 사건을 정치적으로 확대하는 건 적절치 않다고 봅니다. 북한을 압박하는 것은 효과가 적으므로 좋은 정책이 아닙니다. 양쪽 고위급 인사들이 만나야 합니다. 먼저 만나 사전 정지작업을 한 후 특보나 특사를 보내 풀어야 합니다. 대통령의 의중을 실어 보내면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봅니다.“ Q. 남한과 북한 정부의 실랑이 속에 옥수수 5만t 대북 지원도 무산됐습니다 “북쪽이 어려울 때 남쪽의 아량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남쪽에서는 “너네가 해준 만큼 주겠다” “고맙다는 인사를 꼭 듣겠다” 하다 보니, 북쪽은 “우리가 거지냐” “줘도 안 받는다” “너 없이도 산다”는 식으로 나온 거지요. 남쪽에서는 북쪽에 식량이 없어서 죽는 사람이 생긴다면, 우선 조건 없이 식량을 지원해야 합니다. 북쪽은 남쪽이 식량 지원하겠다고 하면 양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감사히 받아야 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먼저 생각하면 간湺?해결될 문제입니다.“ Q. 도와줘봤자 북한 군부에 상당량이 들어가지 않습니까? "북한은 전 국토의 요새화, 전 인민의 군사화, 전 군인의 간부화인 나라입니다. 북한 사회 전체가 군사적으로 통제되는 나라이기 때문에 군인과 민중의 구분이 무의미합니다. 지금 군인들도 굶어서 영양실조 걸리고 배고파 못 견뎌서 탈영을 하고 있습니다. 군인이 민가에 내려와서 닭을 잡아가거나 감자를 캐가기도 하고, 식당에서 밥을 먹고 돈을 안 주는 일이 생겨납니다. 예를 들어 민간단체에서 보내는 식량을 고아원이나 양로원?보낸다고 한다면, 이런 것은 군대로 안 갑니다. 북한도 막강한 군사 국가이기 때문에 군대에 우선적으로 식량을 배분한 다음에 고아원 등지에 식량을 줍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아원에서 굶어죽는 일이 나오는 수준에서도 군인은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군인들이 굶어죽는 수준이면 이미 고아원 아이들은 다 굶어죽은 다음입니다. 민간단체에서 보낸 식량은 주로 고아원이나 탄광에 가기 때문에 군대가 식량을 뺏어가지는 않습니다. 북한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비교적 사회질서가 엄격하게 잡혀있는 나라입니다. 예를 들면 누가 어린애들에게 줄 식량을 빼돌렸다 하면 그건 완전히 사형감입니다. 조금만 떼어서 집으로 가져가서 자기 식구들 먹이는 정도는 괜찮지만 어린이 식량을 빼돌려 팔아먹는 것이 알려지면 즉각 사형입니다. 이렇게 일부 군대로 가는 것도 있지만 실제 군대로는 얼마 가지 않습니다. 우리가 북한에 쌀을 주려면 한 달 동안 찧어서 보냅니다. 우리가 보낸 건 찧어서 주니까 군량미로 보관할 수가 없습니다. 그냥 벼로 주면 5년이든 보관하는데 모두 찧어서 주니 1년 이상 보관할 수가 없습니다. 더 이상 보관하면 벌레 먹고 썩어버려서 지금 당장 먹어야 합니다. 군량미로 보관할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식량의 절대량이 없습니다. 주기 싫으니까 '식량은 있는데 분배를 안 해서 그렇다' 는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분배에 대한 의심을 할 이 시점에도 생명이 죽어갑니다. 군인도 살리고, 민간도 살려야 할 소중한 생명입니다." <100만 네티즌들의 마음을 모아요~, 100만인 서명운동 클릭해 주세요> Q. 금강산 관광객 피격 사건으로 대북 지원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습니다. “굶어죽는 노인과 아이들이 총을 쏜 게 아닙니다. 굶주림의 문제가 해결되려면 식량이 들어가야 합니다. 금강산 사건 해결과 관계없이 대북 식량 지원은 이뤄져야 합니다. 경기침체, 고물가 등으로 우리 살림살이도 지금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굶주리거나 굶어죽지는 않습니다. 북녘 동포들은 굶주리고 있고, 일부는 죽고 있어요...” 마지막으로 스님은 남한 사람들과 북녘 동포들에게도 모두에게 한마디 남겨주셨다. “남한에서는 우리가 좀 덜 먹고 덜 쓰는 소박한 생활로 절약한 경비를 굶주리는 동포들에게 보냅시다.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습니다. 북녘 동포들은 어렵지만 용기를 잃지 말고 최선을 다해 살아주십시오. 우리가 식량을 싣고 곧 북녘으로 달려가겠습니다.” 스님의 마지막 말씀이 큰 울림으로 남습니다. 굶어죽는 노인과 아이들이 총을 쏜 게 아니라는 말씀. 죽어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보다 더 큰 공덕은 없다는 말씀. 정치적인 이해관계에 휩쓸리지 않고, 죽어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분명히 나오는 결론이 우리에게는 왜 금방 생기지 않았을까 돌아보게 됩니다. 신문지면에 매일 오르내리는 진보와 보수의 대결... 사회가 혼란스럽습니다. 이럴 때일수록 경험 많고 지혜 있으신 이런 어른분들의 이야기를 경청해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륜스님은 1988년 설립한 정토회(www.jungto.org)에서 대중들의 수행을 지도하는 한편, 전 지구적인 관점에서 오늘의 문제를 바라보고 대중이 스스로 문제해결의 주체로 나설 수 있도록 개인들을 이끌어오고 있습니다. 1998년 교보환경문화상 사회교육분야 본상을 받았고, 2000년에는 만해포교상을, 2002년에는 아시아의 노벨평화상이라 불리우는 라몬 막사이사이상(평화와 국제이해부문)을 받았습니다. * 북한어린이 긴급식량지원 후원문의 : 한국JTS 02-587-8992, www.jts.or.kr (입금해 주신 성금은 JTS를 통해 아사 위기에 처한 북한의 영유아, 산모, 노인들에게 전달됩니다) * 북한식량난 <오늘의북한소식> : 좋은벗들 02-587-8996, www.goodfriends.or.kr/foodcrisis * 한국정부의 북한어린이 긴급식량지원을 요청하는 100만인 서명운동에 참여해주세요. (아래 100만인 서명 배너 클릭) <100만 네티즌들의 따뜻한 마음을 모아요~, 100만인 서명운동 클릭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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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기동-승가사-사모바위-비봉-구기동 높이 겨우 500m이지만 사방이 다 보인다.백운대에 이어 이틀만에 다시 올랐다. 진흥왕순수비 - 앞면은 모두 마모
2008. 4.10 구기동-승가사-사모바위-비봉-구기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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