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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암 생각 없이... 암 정보 없이 보게 된 영화가 <우주전쟁>입니다. 사실 이 영화는 허버트 조지웰스의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했다고 하는데... 원작은 인간의 자만으로 형성된 문화가 하루 아침에 무너질수도 있다는 경고와 인간의 자만에 일침을 가하면서 시개적 배경에 대한 묘사도 잘되어있다고 하는데... 영화는 기본 줄거리만 따와서 만든 엉성한 사나라오의 블럭버스터 더라구요^^;;; 뭐 볼거리 하나는 괜찮지만요. 출연자가 톰 크루즈와 한국의 박근영과 같이 미국민들이 아끼는 이뿐 다코타 패닝~~~~ 요렇게 나오는 걸로 알고 있었는데... 제가 무지무지 좋아하는 팀 로빈스도 나오더라구요^0^ 멋쟁이 팀이 그리 망가져서 나오다니.....ㅠ.ㅠ 하지만 이 영화 전체를 통털어 팀로빈스가 나오는 그 부분이 이 영화의 가장 잘 된 부분이었어요. 나머지는... 구냥 블럭버스터구낭~~~ 하고 보심 되구요-,.-;;;; 뭐 개개인의 차이겠지만... 몇 가지 볼거리를 제외하고는 정말 엉성한 시나리오였다는 생각이 드는 킬링타임용이랍니다^^;;; 팀로빈스 가 나오는 부분은 내용이나 화면의 밀도가 달라져서... 이 부분 때문에 쬐금이라도 영화가 산 것 같아요^^
우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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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시카 굿바이[약속OST] I can see the pain living in your eyes 당신 눈에 고인 아픔을 알 수 있어요 and I know how hard you try 당신이 얼마나 노력했는지도 알아요 You deserve to have so much more 당신은 더 많은 사랑을 받을만 해요 I can feel your hurt and I sympathize 당신의 아픔도 느낄 수가 있고 동감해요 And I'll never criticize all you ever meant to my life 그리고 내 삶에 커다란 존재였던 당신을 나무라진 않겠어요 I don't want to let you down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I don't want to lead you on 당신을 속이고 싶지도 않아요 I don't want to hold you back from where you might belong 당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지도 않겠어요. * You would never ask me why my heart is so disguised 왜 저의 본심을 숨겼느냐고 당신은 묻지도 않을 거에요 But I just can't live a lie anymore 하지만 더이상 거짓된 삶을 살수가 없어요 I would rather hurt myself than to ever make you cry 당신을 울게 하느니 차라리 제가 고통을 당하겠어요 But there's nothing left to say 하지만 이말 밖엔 달리 할말이 없군요 but goodbye 안녕이라는 말밖에... You deserve a chance at the kind of love 당신은 그런 사랑의 기회를 얻을 자격이 있어요 I'm not sure I'm worthy of 내가 당신에게 가치가 있는지 모르겠군요 Losing you is painful for me 당신을 떠나보내는건 고통스러워요 I don't want to let you down 당신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요 I don't want to lead you on 당신을 속이고 싶지도 않아요 I don't want to hold you back from where you might belong 당신이 마땅히 있어야 할 곳으로 가지 못하게 막지도 않겠어요 * You would never ask me why my heart is so disguised 왜 저의 본심을 숨겼느냐고 당신은 묻지도 않을거예요 But I just can't live a lie anymore 하지만 더이상 거짓된 삶을 살수가 없어요 I would rather hurt myself Than to ever make you cry 당신을 울게 하느니 차라리 제가 고통을 당하겠어요 But there's nothing left to try 하지만 노력하는 수 밖에 없어요 and though it's gonna hurt us both 우리 두 사람 모두 고통스럽겠지만 there's just no other way 달리 어찌할 수가 없어요 than to say goodbye 안녕이라고 말밖에는...
제시카 굿바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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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민관 폭파 의거 주역 조문기 선생 회고록 출판기념회 [슬픈 조국의 노래] 25일(금) 오후 6시...세종문화회관 세종홀 보도자료 내려받기 일제강점기 마지막 의열투쟁으로 일제와 친일파들의 간담을 서늘케 했던 노독립운동가의 회고록이 나왔다. 해방을 불과 몇 일 앞둔 1945년 7월 24일 극악한 친일단체인 대의당이 부민관(현 서울시의회 별관)에서 개최한 ‘아시아민족분격대회’ 단상에 시한폭탄을 설치 폭파시켜 일제와 대의당의 대대적인 민족지사 제거 기도를 사전에 좌절시켰던 조문기 선생의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진솔하게 정리하였다. 회고록에는 선생의 어린시절부터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친일청산운동에 몸담게 되기까지의 80여 성상의 세월이 녹아있다. 부민관 폭파 의거가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은 가히 충격적이라 할만하였다. 가혹한 전시체제하에서 숨죽여 지내던 민중들에게 저항정신을 일깨웠으며 우리 민족의 독립의지가 굳건히 살아 있음을 만천하에 과시하였다. 철저한 보도관제가 있었음에도 거사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장안의 화제가 되었으며 일제는 거액의 현상금까지 걸고 주모자들을 색출하려 혈안이 되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회고록에는 친일파 괴수 송병준 일가와의 악연, 해방 직후 조선은행 금괴 반출을 저지한 일, 단정반대 인민청년군 사건, 이승만 암살 정부 전복 음모 조작사건, 성시백 사건, 민족민주청년동맹사건 등 선생이 관련된 한국현대사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이면이 자세히 기록되고 있다. 또 친일 청산에 대한 선생의 확고한 신념과 독립운동계에 대한 뼈아픈 자성의 목소리도 담겨 있다. 10대에 독립운동에 투신한 후 투옥 고문 유랑으로 이어지는 평범치 않은 선생의 고단한 청년시절이나, 독립운동가를 만나 평생을 인고의 세월로 지낸 아내에 대한 애틋한 감정 표현은 읽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만든다. 일생을 좌우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고 오로지 민족만을 생각하고 행동해온 고난에 찬 선생의 역정이 바로 우리 민족의 현대사가 아닐까 여겨진다. “우리가 목숨 걸고 찾으려 했던 건 분단된 조국이나, 친일파 천국이 아니라고요. 친일파가 청산된 조국을 찾으려 한 건데, 이건 보니까 독립 운동해서 나라 찾아 친일파한테 진상한 꼴이 된 거예요. 거기다 나라도 분단되고, 그렇기에 남북통일과 친일파 청산이 이뤄져야 진정한 해방이고 독립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 길 위에서 진정한 독립을 위해 난 죽을 때까지 싸우겠다는 겁니다. 내가 광복절 행사 같은 데 안 가잖아요. 뭘 기념하겠거냐는 거죠. 그건 순국선열에 대한 모독이고, 독립운동가가 자기 양심 버리는 거라고 보기 때문이예요.” - 조문기 선생 말씀 중 부민관 폭파사건의 전모 부민관 폭파사건은, 전시하에서 조선청년 3천여 명이 참여해 일본 군경을 놀라게 한 <일본강관(日本鋼管) 파업사건>을 주도하여 수배를 받고 도피중이던 청년 조문기와 유만수가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에 앞장선 이가 박춘금이란 사실을 알고 박춘금을 비롯한 친일거두들을 응징하기 위해 1945년 1월, 국내로 잠입해 일으킨 사건이다. 동지들을 규합해 ‘대한애국청년단’이란 비밀조직을 결성하여 기회를 노리던 중, 박춘금을 당수로 박흥식, 이성근 등 친일파 거물들이 총결집하여 만든 대의당이 1945년 6월 명월관에서 발기대회를 연다. 하지만 이 때는 준비가 부족했고, 검문이 삼엄하여 접근할 수가 없었다. 1945년 7월 24일, 부민관(구 국회의사당)에서 친일 거두들과 총독 수뇌부, 아시아 각국의 친일파들이 총출연하는 대의당 주최의 <아세아민족분격대회>가 열린다. 조문기, 유만수, 강윤국은 군중 속에 숨어들어 연단 입구와 무대 밑에 시한폭탄을 설치하고 빠져나온다. 3분 후, 폭탄이 연달아 폭발하고 대회는 아수라장이 된다. 일경과 박춘금은 거액의 현상금을 걸고 범인 색출에 나섰지만 범인은 검거되지 않았다. 일제 패망 후에 사건의 전모가 밝혀져 그날 모든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단정수립 저지 사설군단 ‘인민청년군’ 해방 후 친일파가 판을 치고, 애국인사들이 암살당하는 혼란 속에서 계룡산에 칩거하고 있던 조문기는 미군정과 이승만이 남쪽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위해 제헌의회 국회의원 선거를 실시한다는 소식을 듣고 서울로 올라온다. 단독정부 수립은 민족을 영원히 두 동강 내고 말것이라는 확신을 세운 조문기는 독립운동한 사람으로서 이를 방관하면 씻을 수 없는 큰 죄를 짓는 것이란 생각에 이를 저지하려 한다.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은 친일경찰들을 내세워 남북협상파들을 체포 고문하는 등 노골적으로 통일정부 수립을 방해하며 단독정부 수립을 밀어붙이고 있었다. 조문기는 유만수 등 동지들을 규합해 사설군단조직 <인민청년군>을 만든다. 단정수립을 반대하고 남북협상을 노골적으로 방해하지 못하도록 이승만과 미군정에게 경고를 주기 위한 평화적인(?) 무력시위를 준비한다. 거사 계획은 삼각산 6개소에 사제 시한폭탄을 설치해 동시에 봉화를 올리고 서울 시내의 고층빌딩 수십 곳에 ‘통일정부 이룩하자’, ‘단일정부 수립반대’, ‘미군은 물러가라’ 등의 문구가 적힌 현수막들 펼친 후, 공중에 총 몇 발을 쏘아 무기를 가지고 있음을 알리는 것으로 마치 단정수립을 반대하는 막강한 무력이 존재함을 과시해 이승만과 미군정이 노골적으로 남북협상을 방해하지 못하도록 견제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사 계획은 실행 직전 조직에 숨어든 프락치에 의해 발각되어 체포된다. 경찰서 취조실에서 들어선 자는 놀랍게도 일제 때 악명 높은 친일경찰 김종원이었다. 후일 거창양민학살을 저지르기도 한 자이다. 조문기가 김종원으로부터 당한 고문은 상상을 초월한다. 들어서자마자 곡괭이 자루로 머리를 내리쳐 삽시간에 피가 솟구쳐 오르고 기절한다. 정수리에 재 한줌을 뿌려 붕대로 칭칭 감아놓고는 대못이 박힌 각목으로 내리친다. 각목이 몸에 닿을 때마다 대못이 몸속으로 쑥쑥 들어오는 소름끼치는 느낌은 어찌 형언할 수 없는 공포다. 각목이 닿는 곳마다 피가 쏟아지기 시작했고 곧 바닥이 온통 피범벅이 된다. 무엇보다 해방이 된 조국에서 악랄한 일제 친일경찰에게 고문당하는 현실이 분통터지고 혀를 깨물고 죽고 싶은 심정이다. 친일경찰들은 <인민청년군> 사건을 과대포장하여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 북괴와 남로당의 사주를 받은 것이라고 짜놓은 시나리오를 들이밀며 인정하라고 악랄하게 고문했다. 인간의 한계를 넘어선 고문에도 불구하고 조문기는 그들이 짜놓은 시나리오를 거부했다. 공산주의자는 한사람도 없다는 것이 인정되고, 1년 6개월의 옥고를 치른다. 희대의 독립운동 사기극 조선일보 73년 7월 18, 19일자에 <부민관폭탄사건, 주모자 누구인가>라는 기사가 연재된다. 내용인즉, 부민관 거사는 백범 김구 선생의 비밀지령으로 이루어졌으며 일본 내무성에 고등관으로 침투해있던 비밀요원 김형극의 지도 아래 임정첩보 36호조 김정균, 남의태, 엄숙록 등이 거사의 주역이고, 유만수, 조문기, 강윤국은 그들에게 포섭되어 시키는 대로 한 행동대일 뿐이란 기사가 연재된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세균열차 폭파사건, 아오모리(青森)군항 폭파사건, 특급군사기밀 탈취사건 등 007 첩보영화에 버금가는, 있지도 않은 독립운동 영웅담이 쏟아진다. 조문기의 조선일보 방문으로 모든 것이 김형극이란 사기꾼의 거짓말임 금방 밝혀진다. 김형극은 실제 일제 때 내무성 고등관이었다고 자백한다. 친일반역자 주제에 독립운동사를 희롱한 것이다. 이 일로 사과와 정정 해명기사가 나가고 이규태 부장은 사건의 책임을 지고 사퇴했다. 그런데 이렇게 일단락된 사건이 75년 8월 16일자 동아일보에 8.15 특집으로 <유명한 임정첩보36호조의 유일한 생존자>로서의 김형극 사진과 함께 다시 한번 대서특필된다. 이후 월간 여성잡지, 아동만화까지 파고들었고 86년 3.1절 특집으로 동양 TV에서는 <선구자 대륙의 밀사>가 연속드라마로 방영이 되었고 <임정첩보 36호조>라는 베스트셀러 책자까지 나왔다. 때마침 한국일보의 손태규기자가 김형극의 정체추적에 나서 8.15특집으로 한 면을 차지한 지면에는 김형극의 신화적인 사기극의 전모가 후련하게 폭로됐다. 그는 일제 시대 공주군 유구면의 부면장을 지낸 자이며 해방 후에는 미군을 따라다니며 실속을 챙기다가 끝내 선박수주에 얽힌 대형 사기 사건으로 4년이나 징역형을 치른 자였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88년 3월 1일. KBS 1TV가 방영한 3.1절 특집프로 <선구자 백산 안희제>에 김형극이 다시 등장한 것이다. 야인시대와 김두한의 뻔뻔한 거짓말 2003년, SBS에서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룬 <야인시대>가 대단한 인기를 끌며 방영될 때 야인시대 담당 PD가 드라마와 관련해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싶다며 조문기를 찾아온다. 조문기도 그를 꼭 만나고 싶던 참이었다. 김두한을 항일애국지사로 부각시키는 것이 가당치도 않았고, 역사를 온통 거짓투성이로 왜곡하는 것이 언짢기도 했지만 부민관폭파사건에 관련해 크게 걱정되는 일이 있었다. 이환경씨가 쓴 소설 ‘야인시대’에서 부민관 거사에 사용한 폭약은 김두한이 건네준 것이고 그것이 발각되어 김두한이 모진 고문을 당하고 고생하다 감옥에서 8.15를 맞는다는 내용이다. 그 소설가 이환경씨가 곧 드라마 작가이고, 소설을 원작으로 한다기에 그렇잖아도 걱정하던 차였다. 조문기는 담당 PD에게 부민관 거사를 그런 내용으로 왜곡하지 말라고 호통을 쳤건만, 드라마는 소설 원작 그대로 방영되었다. 연구소에서 그 담당 PD에게 전화를 걸어 항의를 했더니 그 PD는 “그냥 드라마는 드라마로 봐주세요.”라고 하더란다. 괴이한 일은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룬 모든 소설들이 한결같이 부민관 거사를 김두한과 연관된 것으로 서술하고 있는 것이다. 알고 보니 김두한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이 발단이었다. 김두한의 자서전 [피로물든 건국전야]와 1969년 동아방송 <김두한의 노변야화>방영분에 김두한 스스로 뻔뻔한 거짓말을 하고 있다.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인가 하면 김두한은 부민관 폭파사건이 언제 일어난 것인지도 모르고 있다. 부민관 사건 때문에 8개월여 옥고를 치뤘다고 주장한다. 또 체포된 범인과 대질신문까지 했다고 증언했다. 거짓말의 특징은 진술이 일관될 수 없다는 것. 자서전의 내용과 방송분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 이런 거짓말이 방송으로 전파되고, 여러 편의 소설로 만들어지고 마침내는 온 국민이 시청하는 드라마까지 만들어진 것이다. 김두한은 어찌 이런 거짓말을 할 생각을 품었을까? 아마도 그는 그런 거짓말이 통하는 세상이란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서문 해마다 되풀이 되는 일이지만 광복절은 광복회원들이 기다리는 잔칫날이다. 대접받는 날, 민족해방을 경축하는 날, 얼마나 가슴 벅차고 설레는 날인가? 하지만 알고 보면 거짓 환상이고 위선으로 가득 찬 날이다. 그래서 나는 안 간다. 그날이 되면 나는 산으로 바다로 경축의 냄새가 안 나는 곳으로, 펄럭이는 태극기가 안 보이는 곳으로, 경축 현수막이 안 보이는 곳을 찾아 피신을 간다. 내가 생각해도 유별난 게 분명하지만 거기에는 분명한 나름의 이유가 있다. 1945년에 일제는 물러갔지만 우리는 여전히 일제 치하에서 살고 있다. 8.15 이후 숙청된 것은 친일파들이 아니라 독립운동자들과 민족운동 세력이었다. 친일파들은 새로운 권력자 미국을 등에 업고 재빠르게 반공세력으로 변신해 독립운동세력을 무력화시켜놓고 이 나라의 주류로 등장했다. 친일파들이 정관계, 문화, 예술, 언론, 교육, 종교 등 모든 분야에서 주류로 행세했고, 인맥과 후예들을 길러 철옹성같이 굳건한 성벽을 쌓았다. 엄밀히 말하면 8.15는 민족이 해방된 날이 아니라 친일파가 해방된 날이다. 일제를 주인으로 떠받들던 친일파 주구들이 제 주인을 벗어나 이 땅의 주인으로 우뚝 선 날이다. 매일 일본 황실을 향해 머리를 굽실거리며 궁성요배를 하고, 황국신민의 서사를 소리 높여 외치며 민족 구성원을 전쟁터로 내몰던 일제 관리들이 해방 후에 이 나라 정관계의 요직을 차지했다. 식민지 민족말살교육의 첨병이었던 훈도들이 모조리 교장이 되어 우리나라 일선교육의 책임자가 되었다. 민족을 배신하는데 앞장섰던 성직자들은 여전히 존경받는 성직 지도자로 군림했다. 민족을 고문하고 학대했던 고등계 형사들과 순사들이 모조리 국립경찰의 간부가 되어 항일운동 세력을 탄압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많은 애국지사들이 친일 경찰들의 손에 다시금 구금되어야만 했다. 항일운동자들을 토벌하던 황군장교들은 해방 후 ‘빨갱이’를 쳐부수는 국군장성으로 변신했다. 그리고 쿠데타로 군사정권의 주축이 되었다. 이 땅 주류세력의 뿌리가 친일파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가히 이 나라는 친일파들의 낙원이라 부를 만하다. 친일파들의 철옹성이 얼마나 견고한지 그 실례를 보자. 지금 전국에는 친일파들의 동상, 공적비, 기념비, 송덕비 등이 숲을 이루고 있다. 그들이 키워놓은 후계세력들은 친일파들을 본받고 따르라고 각종 기념사업이 한창이다. 이렇게 60년을 공들여 쌓아놓은 굳건한 친일의 토양 위에서 새로운 집권세력이 뒤늦게나마 잘못된 역사를 바로 세워보려고 칼을 빼들었지만 팔을 걷어 부치고 나서며 가로막는 친일세력의 벽에 부딪쳐서 절절 매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렇게 친일파가 단 한 사람도 처벌되지 않고 도리어 민족의 지도자로 둔갑하는 기상천외한 나라 - 참으로 하늘이 무섭고 역사가 두렵고 선열들의 호통소리가 들리지 아니한가? 그래서 나 혼자라도 광복절 경축식은 국민기만이라고 소리치는 것이다. 3년 전에 정신문화연구원에서 펴낸 <내가 겪은 해방과 분단>이란 책에서 ‘조문기는 알려진 명성에 비해 이념적으로나 조직적으로나 좌나 우에 연루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고 했는데 내게 명성이란 것은 당초에 없었으니 그 말만 뺀다면 정곡을 찌른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된다. 처음부터 내게는 이념도 사상도 조직도 없었다. 좌도 아니고 우도 아닌 상태로 오직 민족만을 생각하면서 살아왔다. 독불장군에다 좌충우돌까지 겹치는 바람에 내 지난 세월도 꽤나 거칠고 험난했다. 오늘 내가 살아있다는 게 믿어지지 않을 만큼 끔찍한 역경도 많이 체험했다.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 대열에 뛰어들다보니 철부지의 치기, 영웅심에다 큰 목표에 대한 사명감이 맞물리면서 처음부터 길을 잘못 든 탓일 게다. 나이 80이 된 오늘까지도 달라지지 않고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대로 사는 독불장군 그대로다. 그 길을 지켜온다는 게 이만저만 힘든 일이 아니었지만 지난날에 후회는 없다. 서툰 내 글 솜씨가 이런 내 진솔한 민족애를 얼마나 담아낼지는 모르지만 내 생애의 대부분이 역사와 끈이 닿아 있다보니 행여 역사 한 구석이라도 더럽히면 어쩌나 걱정을 하면서 이 책을 내가 민족에게 바치는 마지막 정성이라 생각하고 역사 한 구석에 조용히 세워놓고 민족의 품속에 안겨 눈 감고 싶다. 목 차 화보 서문_17 1. 어린 시절_23 외가 생활_28 태극기 사건_31 송병준 왕국_38 조선어 금지령과 창씨개명_41 경성사범학교 입학 시험_42 2. 일본으로 가다_47 일본행_47 훈련공 생활_50 운명의 동지 유만수_53 관동학살의 주범 박춘금_56 일본강관(日本鋼管) 파업 사건_58 오시로 구미(組) 사건_62 담력 훈련_69 뜨내기 생활_74 귀국_81 3. 다시 조국 땅에서_85 강윤국 동지_89 대한애국청년당 결성_92 4. 부민관 폭파 사건_95 박춘금과 대의당_95 시한폭탄 제작_102 부민관 거사_105 야목리 동지들_109 5. 해방 공간에서_114 박춘금을 찾아가다_118 여운형 선생을 만나다_122 금괴 사건_124 애처로운 별 애청_128 정치미아의 좌충우돌_131 어머니 불효자를 용서하소서_138 수양 어머니_141 계룡산 조도령_144 사설 군단조직(私設軍團組織) - 영웅본색_154 서대문 교도소 특별동_167 출옥과 방황, 거듭되는 연행_174 성시백 사건_180 6. 민족상잔의 비극에서_185 피 말리는 갈등과 번민_185 북조선노동당 농림성 간부가 되다_188 지도 안 한 지도위원_193 막다른 길에서_200 위기탈출_204 7. 유랑 배우 생활_215 주연 배우 남일성_215 여배우 김인옥(金仁玉)_226 떠돌이 극단 생활_234 백전교와 극단 수도_239 8. 다시 현실로 돌아오다_243 대통령 암살, 정부전복음모사건_243 노총각의 전격 결혼_254 이종률 교수와 민민청 사건_260 다시 서울행_266 거지 세 식구와 철녀 아내_271 불쌍한 딸 정화야_278 유만수 동지를 이대로 보낼 수 없다_282 9. 친일청산은 오늘의 독립운동_287 포상 받아야 하나_287 광복회 독립정신 홍보위원회_292 공적 심사_302 전과자에게 농락당한 부민관폭탄사건_307 야인시대와 김두한의 뻔뻔한 거짓말_314 친일파는 다 죽었는데 무슨 청산이야?_324 박기서 동지의 안두희 응징_323 민족문제연구소-친일청산이 오늘의 독립운동이다_329 생존 독립운동자 제현에게_337 2005-03-24 오후 6:50: ⓒ 민족문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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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만에, 골목에 내린 첫눈 같은 연애 소설 <그 남자네 집>을 내놓은 박완서를 찾았다. 집은 겨울 나목들의 병풍에 둘러싸여 있다. 시어머니가 쓰시던 1백 년도 더 된 장식장, 문갑 위엔 사별한 남편의 반듯한 사진 액자, 그 아래로 정갈한 꽃무늬 이부자리 한 채가 놓인 구리시 아천동 노란 담벼락 ‘그 여자네 집’.Photographed by Kim Yong Ho 아치울에 겨울이 왔다. 겨울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꽃이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옛모습으로 돌이킬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대나무 잎이 담장으로 솟은 그 여자네 집 대문을 쳐다보았다. 구리시 아치울 마을의 노란집, 소설가 박완서의 집 서재 통창으로 아차산의 ‘밤나무숲’이 벌거숭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마당 한켠에서 노란 국화 한 송이를 꺾었다. 첫눈이 내린 후였고, 12월의 마지막 꽃송이였다. “요놈이 여직까지 살아남아 있었네.” 얼마 전까지 백일홍이 빨갛게 피어 있었다고, 살구와 자두와 매화도 있었다고, 1년초 토종꽃들이 차례로 움트면 이곳은 사방천지 꽃대궐이라고, 수선화처럼 여린 몸피의 할머니가 마른 꽃잎처럼 웃었다. “인터뷰 피해 뉴질랜드까지 도망갔었어요.” 4년 만에, 골목에 내린 첫눈 같은 연애 소설 <그 남자네 집>을 내놓고, 그렇게 도망쳤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 마지막 국화 한 송이가 그녀를 맞은 것이다. 집 안은 빈약한 나목들의 병풍에 둘러싸여 있다. 시어머니가 쓰시던 1백 년도 더 된 장식장, 문갑 위엔 사별한 남편의 반듯한 사진 액자, 그 아래로 정갈한 꽃무늬 이부자리 한 채가 놓인 구리시 아천동 노란 담벼락 ‘그 여자네 집’. 젊을 땐 개성식 한과와 찻잔을 다소곳이 내놓았을, 그 후엔 손주들의 장난감이었던 개다리소반을 앞에 두고 그예 무릎을 꿇고 앉은 일흔 넷의 박완서. 햇빛이 방금 까놓은 귤 껍질처럼 연한 향기를 풍기며 스며든다. “일흔이 넘으니… 나이가 들수록 새처럼 자유로워져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어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도 기분 좋아요. 이만큼 살아냈구나, 싶은 게.”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냈다’라는 말에 명치께가 아팠다.소설가로 데뷔하던 34년 전, 마흔 무렵에 그 여자네 집은 얼마나 많은 소리로 북적거렸던가. 식솔들의 밥 냄새가 갈라진 벽지 사이에 혼곤히 배어 있었을 부엌 한켠엔 젊은 박완서가 흑백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보문동 한옥집 마루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성장한 네 아이들과 자매처럼 뒤엉켜 웃는, 한여름 해바라기 화단 같던 그 여자네 집.“그거… 한 89년도쯤 됐나 봐요. 마흔 일곱인가? 맨 왼쪽에 첫째 딸만 결혼했을 거예요. 그 사진 보고는 다들 좋다고 그래요. 아마 신문사 사진 기자가 마당에 있는 장독대 위에서 찍었을 거예요.” 눈 감고 들어도 ‘아, 이 여자는 얼굴이 작겠구나’ 싶을 만큼 박완서의 봄날 새댁 같은 단정한 음성. 그 시절 한옥 마당엔 다들 겨울 날 보물단지처럼 장독대를 쟁여놓았지만, 지금 아차산 밑 박완서의 집엔 식어버린 바비큐 그릴이 나무 옆에 서 있다. “근처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이웃끼리 같이 마당에서 고기도 굽고 술도 하고 그래요. 내가 술이 세서 웬만한 사내도 나를 못 당해요(웃음).” 그래서 냉기가 지독하게 서린 지하 서고에 빈 와인병들이 책과 동거하고 있었구나. 집 안 곳곳엔 좋은 그림들이 가족처럼 걸려 있다. 박수근의 아이 업은 엄마 그림, 권옥연의 괴팍한 여자 그림, 김점선의 노동화풍의 그림, 그리고 종이를 태워 겹겹이 얼굴을 만들어낸 정규리의 여백 많은 젊은 그림, 중학생이 쓱쓱 그려준 좁은 어깨의 ‘박완서 할머니’ 연필 초상화까지. 노란 대문집으로 들어서기 전, 사진작가 김용호와 나는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해 잡담을 나눴다. 전쟁과 역사를 재현하는 ‘답사형’ 작가도 있고, 방대한 자료가 농축된 ‘도서관형 작가’도 있다. 박완서는 어느 쪽일까? 나는 그녀처럼 부엌의 요리와 거리의 풍속을 ‘제대로’ 묘사해내는 작가를 본 일이 없다. 보리고추장 푼 물에 애호박을 넣어 끓인 민어찌개니, 새파란 실파가 동동 뜬 준치국, 분홍빛 국물에 순 서울식으로 담근 오이 소박이, 잘 말린 어란과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굴비, 낙지에 전복, 젓조기, 석이버섯이 들어간 개성식 제육 보쌈, 제육을 썰어 넣은 호박김치찌개…궁핍한 시절을 지나왔으나 마음과 범절이 찌들지 않은 것은 참기름병과 햇장독과 물좋은 생선 덕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그 여자, 박완서가 차려낸 책갈피의 음식상은 풍요로웠다. “친정이나 시가가 옷이나 집치레는 안 해도 음식 치레는 꼭 했어요. 식탐하고는 다르게 때마다 절기마다 제대로 만들어 먹었어요.” 밖에서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속이 느글거려 집에 오면 된장찌개로 꼭 입가심을 해야 한다고 튼튼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소설 제목에 꼭 ‘집’자가 들어가지 않아도 집에는 영혼이 있다고, 박완서의 소설을 만들어낸 곳이 전쟁터도 도서관도 아닌 일가붙이 모여 지지고 볶던 ‘집’이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일상. 박완서가 겪은 일상으로서의 인생과 40년 뒤에 서 있는 내가 겪은 일상으로서의 인생은 왜 그리도 같고도 왜 그리도 다른가. 철부지 시절 사치 같은 첫사랑이 있었고, 그즈음 ‘삶의 비리’를 선험한 것처럼 서둘러 ‘비둘기집’을 지을 남자와 결혼하고, 정이 들어 잠잠하다가, 폭풍처럼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랑’이 그리운. 마냥 일탈하지도 정주하지도 않는 박완서의 여자들. 나는 내 식구의 밥줄을 무시할 만큼 연애질에 눈멀지 나는 내 식구의 밥줄의 존엄성을 무시할 만큼 연애질에 눈멀지 않았다… 수컷은 청청한 잎이 달린 단단한 가지를 물어다가 견고하고 네모난 집을 짓고, 드나들 수 있는 홍예문도 내고, 빨갛고 노란 꽃가지를 물어다가 실내 장식까지 하는 것이었다. 암놈은 요기조기 집 구경을 하고 나서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잡기만 하는 짝짓기가 이뤄진다. ‘그래,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그 남자네 집>에서’삶에서 한걸음 비껴서 던지는 농담, 바로 그것이 문학이라고, 그러나 나는 일흔 네 해 동안 그녀가 청춘에 바치던 그 비정한 스타카토조의 후렴구들을 떠올렸다. 죽을 날을 시름없이 바라볼 수 있는 일흔 넷이 좋다지만, 허물어가는 눈가에 여전히 보얗게 서린 새침떼기 소녀다운 그 생기는 어쩌지 못한다. “난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격이 똑같애요. 소녀적이나 아줌마나 할머니나… 내가 구현하는 여성성… 아휴~ 난 그런 거 말 못해. 내가 경험한 근세사를 생각해봐요. 내 속에 얼마나 많은 시대가 축척돼 있겠어요. 전후의 궁핍한 시절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근세사는 여성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요. <그 남자네 집>에 나온 여자들도 그렇잖아요. 집에선 하숙 치고, 시장에선 좌판 내고, 양놈에게 몸 팔고…박정희 산업화시대에도 값싸고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한 게 여자들이야. 난 소설에서 양공주가 돼서 식구들 먹여 살리고 훗날 이민간 춘희 캐릭터에 애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뒤에 춘희의 장광설 같은 푸념이 이어지잖아. 그게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했으니 알아달라, 이게 아니야. 그 어려운 시절을 ‘살아냈다’는 거에 대한 애정이에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를 살아온 여자라는 생명체에 대한 필연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지면에 속사포처럼 수다를 쏟아낼 때 쾌감을 느낀다고, 과묵한 그녀가 말했다. 좋은 소설의 요건, 젊은 소설가들에 대한 제언, 문체와 주인공의 지향점에 대해 주제 넘게 입을 연 나는 뒤틀린 사람처럼 꾸물거렸다. 기습하듯 그녀가 계속했다. “한 달간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학관에서 글을 썼어요. 집에선 전화도 받아야 하고 이렇게 손님 치레도 해야 하고… 박경리 선생이 왜 아주 엄격해 보이잖아요. 작품도 인생도… 그런데, 나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적 없어도 아들 문제 때문에 힘들었을 때(고 호원태 씨), 속으로 따뜻하게 많이 품어주셨어요. 떨어져 있어도 그분 살아계신 게 의지도 되도 위안도 되고 그래요.” 한국의 비루한 근대사를 마른 직선으로 일갈해 온 박경리와 질펀한 곡선으로 품어온 박완서. 바깥 어른 같고 안주인 같은 그녀들의 원근법이 없었다면 ‘젊은 것’인 나는 제 족보도 모르고 활개쳤을 것이다. 노인의 몸은 삶의 번잡스러움 속에서도 소설의 호르몬으로 들끓고 있다. 그렇게 그녀에게 문학적 나침반의 구실을 하는 건 개성의 여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었던 소설가 박노갑과 톨스토이라고.“나는 옛날부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많이 읽었어요. 독서욕은 왕성한데 당시엔 읽을 게 많지 않았어요. 여학교 때 일본 출판사 것을 번역한 러시아 세계문학전집을 닳도록 읽었어요. 전쟁통에 친정이 풍비박산 나면서 그 책들도 다 사라지고 지금은 몇 권 안 남았지. <안나 까레니나><전쟁과 평화>… 그런 거 보면 그 많은 인물들의 성격 묘사가 집요하고 치열해요. 그런데 좋지 않은 습관도 배웠어요. 내 초기 작품에 설교조도 많은데, 그게 거기서 나온 것 같애요. 나는 대학교(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가던 맡에 6.25가 나서 중퇴를 했기 때문에 정통 문학 교육을 못 받았어요. 하지만 그 시절엔 지금처럼 입시 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 문학 개론을 배웠어요. 아릿아릿하고 감상적인, 일본 연애 소설 흉내낸 소녀풍의 시를 쓰면 선생님이 호되게 야단을 했어요. 생활의 무게가 없는 글은 쓰지 말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그 반에서만 문인이 네 명이나 나왔어요.” 나이 마흔에 등단한 박완서. ‘미군 부대 PX 근무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쓴 자전적 소설 <나목>은 1970년 11월 <여성동아> 부록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소설을 ‘입심 좋은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아이들 다 키우고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겪은 후에야, 다락방에 감춰놓은 보자기 풀듯, 저잣거리에서 장바구니 들고 활개치듯 쓸 수 있었다는. 시간은 의미를 잃고 시무룩해지고 있는데, 그의 시린 등을 덮어줄 망토 같은 큰딸이 들꽃처럼 웃으며 서재로 들어왔다. “어쩐 일이냐?” “내가 온다고 했잖아.” “너 올 줄 알았으면 광장시장 가서 뭣 좀 사오라고 할 걸 그랬다.” “뭔데?” 모녀가 두런거리더니, 그예 박완서가 딸과 함께 출행나갈 것처럼 바람을 일으킨다. “몇 해 전인가 그 쪽에서 찍어간 사진에 김혜자 씨가 나랑 같이 나왔잖아요.” 4년 전 내가 20대부터 80대까지 여성을 조명하는 칼럼을 진행할 때 그녀는 막 일흔에 접어들었었다. “그런데 탤런트 김혜자 씨가 날더러 ‘선생님, 왜 그렇게 늙게 나왔어요. 주름도 많게….’ 타박을 했더랬어요. 이상하다. 내 나이대로 내 가진대로 내 성깔대로 나와서 나는 좋던데….” 큰딸이 장단을 맞추듯 거든다. “소설가가 성깔도 없이 밋밋하게 나오면 돼나요. 아무렴. 엄마, 나도 그 사진 좋아. 소설가가 성깔이 없으면 소설도 못쓰거든.” 하지만 흑백의 폴라로이드가 나올 때마다 나는 4년 전보다 작아져 버린 그녀가 서글퍼 자꾸만 뒤춤으로 감추고 싶어졌다.“요렇게 정식으로, 구식으로 하는 사진은 정말 오랜만에 찍어봐요. 그때 찍고 처음이야. 뉴질랜드 가니까 나 아는 이 남편이 우리 관광 갔던 사진을 죄다 디지털인가 하는 작은 사진기로 찍더라구. 한국 오는데 그 사진을 쬐끄만 디스켓에 담아서 줘. 앨범으로 정리하면 한참 두꺼울 텐데… 그런데 또 나 아는 이가 남편한테 “여보, 근데 내 얼굴은 작게 만들어줘요.” 그러더라구. 신기해요. 난 휴대폰도 옛날 흑백 구식인데, 요즘은 그걸로도 사진을 다 찍더라고.” 박완서는 영정 사진은 이미 찍어놓았다고 했다. 잘 다린 하얀 한복 입고 칠순에 이미 그 사진은 박아놓았노라고. “우리 엄마는 비밀이 있어요. 뒷머리 두상이 남들보다 많이 튀어나왔어요.” 큰딸이 발설하는 그 비밀의 의미가 ‘그 많은 기억의 저장고’라는 짐작이 들었다. 큰딸과 팔짱 끼고 나가 광장시장에서 잘 달인 인삼액인가를 사야 하는데, 너스레 떨며 한참을 붙들어 앉힌 사진작가를 향해 맘대로 화도 못 내고 하는 말이. “나, 신경질 날려고 해요.” 불친절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남한테 똑같이 주고 싶지 않아 매사에 조분조분한 그이가 볼멘 어린애 투로 말한다. 왜 그순간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슬프다’고 느꼈다던 박적골의 예민한 일곱 살 소녀, 박완서가 떠올랐을까. “이상하기도 하지. 왜 나는 맨날 두 손을 요렇게 소녀처럼 무릎에 얌전하게 모으고 있을까? 사진 찍을 때 말고도 버스 안에서도 전철 안에서도 내 손이 어디 갔을까 하면, 무릎 위에 있어요.” 식탁 위에 수건처럼 곱게 접힌 노 작가의 손에서 반짝하는 물체가 보였다. 홍옥인지 루비인지 반지 하나가 마른 약지 위에서 수줍게 작열하고 있다. “이 반지요, 이거 결혼도 하기 전에 약혼도 하기 전에… 스물 두 살 때… 죽은 우리 남편이 준 거예요. 색깔이 빨간 게 루비인지 뭔지도 난 몰라. 그때는 엄마한테 말도 못하고 이 반지는… 결혼하고 나서야 꼈어요.” 두 사람은 1953년 4월21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결혼했다. 제대로 된 예식장도 없어서 중국집에서 식을 올렸다. 당시로는 호화판이었다. 신접 살림은 남편의 집 종로구 충신동 18평짜리 한옥에서 시작됐다. “50년도 더 된 거네요. 그런데 남편이 뭐라고 하시면서 주셨어요?” “암 말도 안 했어요. 그냥 조그만 상자 하나 줬어요. 그때는 남녀간에 그렇게 수다스러운 시대가 아니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가족밖에 모르셨어요”라고 호원숙 씨가 부연한다. “내 기억력은 편향돼 있어요. 느낌에 대한 기억력은 좋은데 사람 이름, 숫자 이런 거는 영 기억을 못해요. 보통 사람보다 많이 떨어져. 관대한 남편 만나서 그렇지 경제 관념도 아주 희박했어요. 결혼 생활할 적에 소설에서처럼 한 달 생활비 돈 맞출려고 하면 두통이 막 나서 못했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1주일 쓸 것만 달라고…, 그걸 고무줄로 동여매서 썼어. 왜 지금은 카드라는 게 있어서 잊어버리려고 해도 기록이 날아오잖아. 그런데 나는 손가락 새로 빠지는 것처럼 그 돈이 다 어디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기억도 안 나서…, 고무줄로 꽁꽁 동여매서 썼어요.” 시간의 나이테가 침잠한 야윈 얼굴로, 결혼할 때 말고는 마사지 한번 못해봤다는 박완서는 이제는 분가한 딸들과 함께 1주일에 한번 마사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지구 중심에서 격리되고 싶지 않아 조급해진다지만, 그녀는 깊은 호흡으로 자신의 용기 안에 기거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목욕을 해요. 소설도 아침에 주로 써요. 나는 소설 쓰는 걸 아주 즐겨요. 힘든 건 있죠. 그런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소설은 자기 위안이 되니까, 또 좋아서 써요.” 아치울에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한옥이 좋아 작정하고 삼청동에 한옥 구경도 갔더랬다고. 그런데 그렇게 천장으로 서까래도 있고 조선 여자 비녀 꽂은 머리처럼 대문도 반듯한 ‘그 여자네 집’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아치울 마당으로 나즈막히 가라앉은 겨울 공기가 하늘 높이 잿빛 이랑을 내고 올라갔다. 에디터 / 김지수
박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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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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