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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들 광혜군에 대해 알고 계시져? 우리나라의 역대 왕들은 "조 종 군"으로 나뉘어 지는데 군이란 왕의 자격이 없다고 판정되어 강등된 경우지요. 연산군이랑 광해군 두명이 있는것은 다 아시죠
근데..이 광해군에 대해 요즘 논란이 많아요,, 절대로 군으로 강등 되면 안될 훌륭한 왕이라는것이에요,,
그럼 광해군이 왜 "군"으로 남아야 했을까요?
그것은 인조반정에 성공한 사대주의적 명분론자들이 자신들의 반란을 합리화 한 측면이 강한것이에요, |
((선조의 아들!))
선조의 아내가 억수로 많다는것은 알지여?
그래서 아들만해도 14명
그러나 정비 의인왕후박씨의 소생이 없었기에 서자중에 세자를 선택해야했어요.
그러나,,,ㅎㅎㅎㅎ서자가 너무 많다는 문제!
선조 자신이 조선의 첫 서자출신 왕이에요.
그 부담으로 자꾸만 세자책봉을 미루다가 선조나이 40에 이 이야기가 거론되어요.
이때 좌의정은 (서인의 대표)송강 정철이었음.
논의를 한 결과 광해군을 세자로 옹립하기로 결정했는데.
동인의 대표며 인빈김씨 신성군을 따르는 이산해의 음모로 인해 화를 당하게 되요.
그 후, 세자책봉은 또 미뤄지게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났지요.
북으로 쫓겨가는 몸이된 선조는 평양성에 머무를때 광해군을 세자로 책봉하게 되지요.
그러나,
명나라에 보고를 해야하며 명에서 고명이 정식으로 내려와야 세자로 확정되는데
명이 이를 거절했어요.
이유는 장자 임해군이 있다는것.
그러나 광해군은 분조의 소임을 다하여 조야의 명망을 얻게 되어
명의 고명 여하에 관계없이 대신들은 그를 세자로 인정했다네요.
그 후,
광해군의 계승권은 요지부동한 사실로 인식된듯하나 전란이 끝나고
인목왕후가 선조의 계비가 되면서 영창대군을 낳자 상황은 다시 악화가 되지요.
그러니 자연히 영창대군을 지지하는 소북파와
광해군을 지지하는 대북파로 나뉘어 지는데.
선조가 덜컥 병에 걸리고 말아요.
그리하여 선조가 운명을 달리하자 왕위 결정권은
인목대비(영창대군의 엄마)에게로 넘어갔어요.
유영경(영의정이며 소북파)은 인목대비에게 영창대군을 즉위시키고
수렴청정 할것을 종용하지만,
임목대비는 현실성이 없다고 판단하고 언문교지를 내려 광해군을 즉위시키게 되어요.
이때 광해군 나이 3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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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의 유배생활))
광해군은 폐위된 뒤 그의 가족들과 비참한 생활을 하다가 생을 마감한다. 광해군과 폐비 유씨, 폐세자 질과 폐세자빈박씨 네사람은 강화도에 위리안치되었다. 그곳이 감시하기에 용이한 곳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반정세력은 이들 네사람을 한곳에 두지않고 각각 동문과 서문쪽에 안치시켰다.
((세자부부의 자살))
당시 20대 중반이던 폐세자 부부는 아마 강화도 바깥쪽과 내통을 하려고 한것같다. 세자 질은 어느날 담밑에 구멍을 뚫어 밖으로 빠져나가려다 잡히게 되는데. 그의 손에는 은덩어리와 쌀밥, 그리고 황해도감사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은덩어리를 뇌물로 사용해 강화도를 빠져나가려 했던것 같다. 편지는 자신을 옹호하고 있던 황해도 감사와 평양감사와 모의하여 반정세력을 다시 축출하려는 시도였을것이다.
이 때문에 인목대비와 반정세력은 그를 죽이기로 결정했는데. 이 사실을 전해들은 세자 질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세자빈도 이 사건으로 죽는데.. 세자가 울타리를 빠져나갈때 나무위에서 망을 보고 있다가 탈출에 실패하여 다시 안으로 붙들려 오는것을 보고 놀란 그녀는 나무에서 떨어졌으며, 그 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아내의 죽음))
그 후 1년 반쯤 뒤 광해군의 아내 유씨도 죽는데.. 폐비 유씨는 한때 광해군의 중립정책을 이해 할 수 없는 처사라고 하면서 대명사대정책을 주청하기도 했다.
광해군이 폐위되자 궁궐 후원에 이틀동안이나 숨어 있으면서 인조반정이 종묘사직을 위한것이 아니라 몇몇 인사들의 부귀영화를 위한것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엇다. 그러나,,유배 생활이 시작되자 화병을 얻어 1624년 생을 마감한다.
하지만 광해군은 초연한 자세로 유배생활에 적응해서 그 후 18년을 더 산다. 그 과정에서 몇번 죽을 고비를 넘기게 되는데.. 인목대비. 인조세력들이 그를 죽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엇으나, 이원익과 광해군을 따르던 관리들에 의해 성공을 이루지 못하게 된다,
그러나, 1624년 이괄의 난이 일어나자 인조는 광해군의 재등극이 염려스러워 그를 배에실어 태안으로 이배시켰다가 다시 강화도로 데려온다, 1636년 청나라가 쳐들어와 광해군의 원수를 갚겠다고 하자 그를 또 교동으로 안치,시켯으며, 경기수사에게 그를 죽이라고 암시햇지만 경기수사는 오히려 그를 보호했다.
637년 조선이 완전히 청에 굴복한 뒤에 인조는 그를 제주도에 보내버린다. 광해군은 제주땅에서 아랫방에 거처하는 모욕과 심부름하는 나인이 "영감"이라 호칭하며 멸시해도 묵묵히 의연한 태도를 지킨다.
그리하여
1641년 그의 나이 67. 귀양생활 18년만에 생을 마감한다. |
인조반정에 대해 이야기 할께요.
<<인조반정의 명분>>
1)명에 대한 의리를 저버리고 대명사대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
2)선조의 적자 영창대군을 죽이고 계모 인목대비를 유폐시켜
형제를 죽이고 불효를 저질렀다는이유
1)에 대한 풀이
그 당시 중국의 흐름은 명은 기울고 청은 일어나는 나라였다.
때문에 조선은 중국의 그런 세력다툼을 이용해
개국 이후 계속되던 중국과의 군신관계를 청산하고
대등한 위치로 격상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였다.
광해군은 이 점을 읽어내고 중립 외교 노선을 걸었지만,
그들은 계속해서 대명사대주의의 길을 걸어
결국 뒷날 청에게 왕이 무릎을 꿇고 군신관계를 맺는 대 치욕을 겪게 된다.
2)에 대한 풀이
영창대군을 비롯하여 능창군 인목대비등의 왕권위협세력들을 제거한 것을
폭정으로 몰았는데..
본래 폭정이란
집권층에게 행사된 정치적 행위를 말하는것이 아니고
민생을 위협하는 폭력적 행위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광해군은 일부 왕권 위협 세력을 제거하긴 했지만
민간을 위협하고 학대하는 정사를 편적은 없다.
오히려 민생구제에 주력하여 민생경제를 일으키는데 전력을 쏟은 왕이다
<<그럼, 조선의 성군 내지 명군이라고 일컬어지는 왕들과
비교하여 살펴보자>
태종(이 방원)
자신의 배다른 형제를 죽였고(두차례에 걸친 왕자의 난)
동복형제도 유배시켰으며 계모 강씨의 능을 일개 후궁의 무덤으로 전락시키는
행위를 했으며
장자인 양녕이 왕이 될 인물이 못된다고 하여 폐세자를 단행했다.
그리고 명에 대해 상국의 예를 갖춰 조공 함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리고 태종은 12명의 부인을 뒀는데.
태종의 집권에 여러방면으로 도움을 준 첫부인 원경왕후 민씨와의 불화는 유명하다.
하마트면 왕비의 자리에서 쫓겨날 처지에 직면하기도 한다.
세조
왕위를 찬탈하고 단종을 죽였으며,
형수 현덕왕후의 무덤을 파 헤쳐 관을 없애기도 했고
자신을 반대하는 모든 신하들을 죽이거나 유배보냈는데.
이것은 왕권에 대한 도전이 두려워 철저한 심복 정치를 실시한 것이다,
광해군
인목대비를 죽여야 한다는 대북세력의 강력한 주장을 물리치고
자신의 판단으로 인목대비를 살려놓았고
영창대군을 죽이는것을 반대했다.
그러니까,,인조반정은 그야말로 반란이다.
인조반정을 주도한 인물들이 사대주의자이며 광해군에게 개인적인 원한관계에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연산군과 다르게 생각해야 할점은
연산군은 철저한 폭군이었으나
광해군은 정치적 이념을 달리한 현실적인 왕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또 한가지
인조는 스스로 군사를 일끌고 반정을 주도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러니.
그야말로 반정이고 역모인것이다,
역모가 성공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