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인마트는 나의 천국
기본 주제방 2004/05/26 02:15   http://blog.azoomma.com/ticell/132237

 청신한 얼굴 5월이 아니랄까봐

무척이나 조은 날씨가 며칠이나 계속되고 있다. 

이 조은 날씨가 좀 지나쳐 한낮에 더운 느낌마저 들기 시작하자

아파트 놀이터에는 가뜩이나 바쁘던(?) 아이들이 그나마 싸그리 자취를 감추었다.

네살짜리 아들놈은 놀이방에 다녀오자 마자 다시 밖에 나가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뙤약볕속에 놀이터에서 혼자 놀게 내버려두는 것도 무식한 짓이다 싶어

차라리 근처에 있는 마트엘 가자고 꼬셨다.

물론 녀석은 대환영이었다.

 

사실 지난 주말에 한바탕 장을 봐왔기 땜에 특별하게 살것은 없었지만

주섬주섬  옷을 걸쳐입고 후덥지근한 길 15분을 가벼운 마음으로 걸었다.

마트의 반짝거리는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는 순간

역시나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살갗을 스친다.

아들넘이 굳이 카트을 타야겠다길래 태운 김에

덩그러니 두부와 슬리퍼를 던져넣고

하릴없이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살까말까 망설이다 역시나 돌아서고 만다.

그러다가 녀석 손에 이끌려  찾아든 곳이 장난감 매장과 도서매장이었다.

아들놈이 샘플로 진열된 장난감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무료한 엄마는 장난감 매장에 오가는 다른 엄마와 아이 커플들을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고만 있었다. 그러다가....!

무언가 눈알을 화끈하게 하는 것이 있었다.

 

당장 내 눈에 덤벼든 것은 엄마들의 복장상태였다.

화장기 하나 없는 까칠한 얼굴에 대충 빗질한 머리,

헐렁하게 늘어진 박스형 티셔츠와 짙은색 긴 바지,  아무렇게나 꿴 슬리퍼

대각선으로 울러맨 적당한 크기의 가방과

머리에는 하나같이 검은 필름이 코팅된 썬캡...

 맙소사... 나랑 똑같았다. 어쩌면 약속이나 한 듯이

이 엄마도 저 엄마도 나랑 별 다르지 않은 젊은 엄마들이

규정이 없음에도 지극히 통일적인 양상의 '아줌마 복식'을 제대로 갖춰입고  

다들 지치고 무표정한 얼굴로 각자의 아이들에게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내가 좀 나았다면 한 손에 유모차가 아닌  카트를 끌고 있다는 것이었다.

적어도 쇼핑하는 사람의 자세(?)는 되어 있었다고나 할까?

 

두번째로  내 눈알을 커지게 했던 것은 그 모든 엄마들의 체형이었다.

그들 대부분이  상당히 뚱뚱했다.

하필이면 그시간 그 장소에 유달리 많았는지는 모르겠지만

 60키로, 아니면 80키로, 100키로는 되지 않을까 싶은 여자들까지...

가뜩이나 방만한 차림새에 살들까지 가세하여

전체적인 품새에  스스로를 방기한 무력감이 주룩주룩 흘러내리고 있었다.

밝은 조명 아래 다양한 상품이 잘 정돈된 우아한 할인마트의 매장은

순식간에 허름한 아줌마들이 어슬렁거리는 삶의 뒷골목으로 전락한 느낌마저 들었다.   

그들과 하나 다를 바 없던 나는, 순간 그들과 다르고 싶었고

어쩐지 챙피해져

당장에 훌렁훌렁 재주를 넘어 미녀탈랜트로 변신하던지

그 자리를 박차고 집으로 가야지만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극히 현실적으로...

놀이터에도 못나갈 정도로  춥거나 더운 날씨가 계속되면 

걸음도 제대로 못 걷는 작은 아이를 데리고

온통 아파트촌인  동네에서 갈 수 있는 곳이라곤 정말이지 할인마트가 고작이었다.

그 할인마트마저 생기기 전인 작년 이맘때

나는 보채는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일단 문을 나선 다음

무작정 이 단지  저 단지 땀을 흘리며 서너시간씩 쏘다니다가 온 몸이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곤 했다.  날이 더 더워지면서 그나마 '지옥산책'도 못하고

종일 아이와 집에 들어앉아 징징거리는 녀석에게 히스테리를 부리곤 했다.

 

친구 하나는 남편이랑 대판 싸운 다음

짐을 싸서 두아이를 데리고 호기있게 집을 나왔는데

나오고 보니 갈 데가 없어

근처 대형마트에서 두 아이와 함께 두시간을 쭈그리고 있다가

그냥 집에 돌아갔다고 해서 다들 웃은 적이 있었다.

 

캐나다에 사는 친구 생각도 났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외국에서 그녀는 유모차에 아이를 태운채

버스를 타고 도시의 이곳 저곳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한국에서는 불가능하지만..."

그 곳 버스에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타고 내릴 수 있는 장치가 설치되어 있고

운전기사가 직접 내려와 승하차를 친절히 도와주기에

돌쟁이와 함께 도시를 누비고 다니는 것이 가능하다고 했다.

 

한국에 사는 나는 네 살이나 된 아들놈을 데리고 버스 타는 것이 아직도 힘들다.

내 다리도 짧은 편이라

버스 계단 오르려면 콤파스 각도를 크게 만들어야 하는 형편이니

더 짧은 아들놈은 내가 안고 태워야만 한다.

녀석이 무거워서 힘이 부치기 땜에

역도선수처럼 심호흡을 하고 순간의 힘을 이용해 번쩍 처든 다음

삼단뛰기 선수처럼 다리를 재빨리 놀려 버스 계단을 올라가야 한다. 

빨리 타고 빨리 내려야 하는데

서두르다가 아이가 차 안에서 넘어질까봐 불안하기도 하고

그렇다고 느릿느릿대다간 운전기사한테 욕이라도 먹지 않을까 싶어 지레 눈치 보이기도 한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지남철처럼 딱 들러붙는 내 아이와 함께 먹고, 자고 움직여야 한다.

취미도, 운동도, 컴퓨터도, 청소도, 목욕은 물론

쓰레기 버리러 나가는 것 까지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외출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나가봤자 갈 곳은 할인마트밖에 없다.

그나마 걸어서 갈 수 있는 거리에 있다면 말이다.

 

관찰을 계속하다 보니 색다른 타입의 아줌마들도 몇몇 눈에 띈다.

아이보리색에 자잘한 꽃무늬가 박힌 우아한 원피스를 입은 아줌마가

카트에 아이를 태운 채 옆으로 지나간다.

얼핏 보니 카트속에 식료품이 잔뜩 들었는데 맨 위에 장어초밥 도시락과

화사한  빛깔의 핑크색 여자구두 한 켤레가 놓여 있다.

아무렇게나 던져진 물건들이 마치 유명쇼핑몰 메인화면의

잘 짜여진 디스플레이처럼 세련되어 보인다.

궁금해진다. 저런 그녀는 나와 같은 처지에 내몰려 이곳에 있는 것 같지 않다. 

아니 어쩌면,

그녀는 나처럼 심약한 소비자가 아니기에 조금 더 나아 보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할인마트가 갈 곳 없이 방황하는 아줌마들의 뒷골목임을

마침내 깨달았을지라도

나는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  곳 밖 에는 다른 데 갈 곳이 없다.

휘황한 조명과 넘쳐나는 상품,북적거리는 사람들 틈을 누비고 다니며  

업는 게 없어도 어느 것 하나 내 것이 없는데,

초저가 세일과 하나더 끼워주기와 최신상품의 스타일에 도취되어

나는 잊고 싶은 것을 잊고 잠시나마 마음의 위안을 얻을 것이다.

광폭하게 내달리는 거대한 도시화와 정보화, 자본주의의 이 시대 

그 어느 지점의 가운데도 있지 못하고

오로지 아이 하나 보듬어 안고 고치속에 숨을 쉬다  

바람을 쇠러 나온  여자들에게

갈 곳이라곤 정녕

거기밖에 없는 걸까? 

그곳은 정말 마지막 도피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