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년 연기인생
스타 사진방 2004/10/18 20:02   http://blog.azoomma.com/sun2835/164116
주현































“이건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이지만 배우(俳優)의 ‘배(俳)’자는 사람 ‘인(人)’에 아닐 ‘비(非)’를 쓴다고. 인간이 아닌데 우대받는다는 말 아닌가. 배우는 광대가 맞아. 그래서 제정신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되는 거야. 미쳐야지. 한바탕 미쳐서 쏟아내는 게지.”

배우는 광대다
어떤 분야에서든 30년 넘게 같은 일을 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평생 동안 오롯이 외길만 걷길 고집했다면 그는 ‘자신이 가는 길 외엔’ 할 줄 아는 게 없어서거나 하고 싶은 게 없어서일 것이다. 그 둘 다일 수도 있고. 주 현은 그런 사람이다. 35년 동안 연기만 생각하고 연기자의 길을 걸으며 다른 건 해본 적도, 할 생각도 없었다. 일생을 ‘광대’로 살면서 이웃집 아저씨의 푸근한 모습에서 거들먹거리기 좋아하는 허풍선이의 모습까지, 그가 쓴 가면은 곧 그의 얼굴이 되었다.
“연기자가 말 그대로 ‘연기’하는 게 눈에 보이면 그걸로 끝이야. 그렇게 꼴 보기 싫을 수가 없어요. 나도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고. 연기는 생활 속에서, 경험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이 내 신조지.”
주현의 연기관은 숨 쉬듯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연기를 하는 것이다. 그저 많이 겪어보고 당해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야말로 ‘산 경험’이 중요한 것이다.
그는 중·고등학교 시절 서울 금호동 일대를 주름잡던 건달이었다. 그러다가 대학(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가서는 학생회장도 하고 ROTC로 제대할 만큼 성실한 생활도 했고 베트남전에도 참전했다. 신인 때는 연기를 잘 못해서 극중 배역이 죽어 없어지기도 하고 벙어리 역할을 맡기도 했다. 주 현의 캐릭터가 뒷골목 하류인생부터 번듯한 지식인까지 두루 아우를 수 있는 것은 그의 삶이 바로 이렇게 많은 과정을 거쳐 다양한 색깔의 궤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에게서는 짙은 사람냄새가, 그의 연기에서는 진한 인생의 맛이 난다.

영화 <가족>과 그의 가족 이야기
얼마 전 개봉한 영화 <가족>에서 우리는 주 현의 무르익은 연기를 또 볼 수 있게 됐다. 딸과 아버지의 갈등과 화해, 가족간의 사랑을 그린 이 영화는 누구나 한 번쯤 되돌아 볼 법한 감동적인 소재를 잔잔하게 다루어 관객들의 눈시울을 적시고 있다.
“시나리오가 마음에 들었어. 요새 나오는 영화하고 달랐으니까. 우리네 아버지들의 얘기잖아. 영화 보고 다들 좋다고, 부모님 생각난다고 하며 관심 가져주시니 고맙지.”
딸이 실수로 떨어뜨린 가위에 맞아 애꾸눈이 된 아버지 역할을 연기하기 위해 그는 영화 촬영 내내 눈꺼풀 위에 특수 분장을 해야 했고 백혈병으로 머리카락이 빠지는 대목에서는 삭발까지 하며 열연했다. 추운 날씨에 산동네에서 촬영이 진행될 때는 지치기도 했다. 이쯤 되면 투혼이라 불러도 좋지 않을까. 십 년도 전에 드라마를 위해 멀쩡한 앞니를 두 개나 발치한 그를, 자주 가는 식당에서 마주쳤던 기억이 겹쳤다.

“물론 불편하기는 했지요. 한쪽 눈을 감고 연기를 하려니 표정연기도 잘 안 살아나고 특수 분장한 애꾸눈의 상처가 오늘은 깊었다 내일은 얕았다 했으니 웃기기도 하고. 머리 깎는 것도 고민 많이 했지만 어쩌겠어. 당연히 내가 감당해야 할 몫인걸.”
애꾸눈이 되어 형사 일도 그만두고 생선장수가 된 아버지. 영화 <가족>의 아버지는 실직과 가정불화 때문에 아내를 떠나보내고 몹쓸 병까지 얻게 되지만 말썽 많은 딸과 어린 아들, 자신의 ‘가족’이 살아가는 이유다. 실제 그의 가족은 어떠할까. 영화를 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는 그의 딸은 아버지와 어떤 관계일지 궁금해졌다.
“걔도 날 닮아 이제껏 살갑게 ‘아빠’ 소리 한 번 않는 무뚝뚝한 딸이야. 시집가서 외손주까지 보았지. 내 딸은 속 한 번 썩인 적 없이 건실해서 우리 가족은 아무 문제 없는, 무난하기만 한 가정이야.”
하지만 ‘무난한’ 가정을 꾸리기 위해 그도 아버지로서, 남편으로서 많은 노력을 했을 것이다.
자신이 책임져야 할 가족이 없었다면 자신의 인생은 많이 달라졌을 거라고 말한 그였다. 좋아하는 일이라고는 하지만 사랑하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살아온 그의 연기 인생은 퍽 고단해 보였다.

나는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다
“가장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안 된다는 말이 옳은 것 같아. 현실과 부딪히거든. 배우를 직업으로 삼으면 그때부터 피곤해지는 건데 그럴 수밖에 없는 현실이니 좋아하는 것만 맘놓고 할 수가 없지.”
배우가 제대로 된 연기를 할 수 없는 이 땅의 환경에 불만을 갖고 있는 그의 솔직한 토로가 이어졌다. 35년 동안 출연한 드라마는 ‘기네스 북에 오를 정도로’ 많지만 이렇다
할 작품이 없는 것은 제작진이나 배우가 돈을 벌기 위해 다작을 하면서 아등바등 대야 하는 열악한 풍토 때문이라고.
“정신 없이 살다보니 벌써 이렇게 늙어버렸지. 지금이야 인생에 낙이랄 게 뭐 있겠어?
그저 친하게 지내는 사람들 앞에 앉혀놓고 소주 한잔 마시면서 얘기나 나누는 거지.”
좋은 사람들과 술 마시면서 대화하는 것을 가장 즐기는 그는 애주가다. 사람을 좋아하고 정이 많은 탓이다. 일찍이 술 좋아하는 사람치고, 사람 좋아하지 않는 이 못 봤다.
질그릇 같이 투박하고 무던한 그가 아름다운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지나간 젊음을 추억하며 아쉬워하지만, 정작 중년의 그에게는 젊은이들이 부러워할 만한 지극히 인간적인 그만의 향취가 있다. 그리고 그것은 아무도 따라잡을 수 없는 세월이 가져다 준 것이다.
그는 앞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감흥을 주는 괜찮은 영화를 하고픈 소망이 있다. 그래서 영화계 소식에 촉수를 세우고 다른 사람들의 인생에도 관심을 가진다. 조만간 본인의 생각을 담은 질 높은 시나리오로, 직접 감독과 출연까지 하는 영화를 만들 계획도 세워 놓았다.
“로버트 드니로나 알파치노처럼 누구나 ‘최고’라고 손꼽는 배우가 되고 싶지. 굵직한 작품도 하고 말이야. 지금의 나야 보잘 것 없고 대단치 못하지만 앞으로 인생을 녹인, 정말 휴머니즘이 잔뜩 살아있는 영화 한 편 찍고 싶어.”
한 분야에 깊은 조예를 가진 사람을 두고 우리는 ‘대가’ 라는 표현을 쓴다. 그의 인생을 녹이면 어떤 영화가 나올까. 연기의 대가라고 불려도 손색이 없는 중년배우가 여전히 느끼고 있는 허기가 채워지는 그날, 우리는 사람냄새 가득한 그의 영화를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영화 <가족>의 정은 역 수애
수애는 이번 영화에서 주 현의 딸로 분해 인상적인 눈물 연기를 선보였다.
실물의 그녀는 화면 속에서보다 훨씬 깨끗하고 반듯한 인상이었지만 일정에 쫓겨서인지 눈은 충혈되고 핼쑥한 얼굴이었다. 주 현은 그녀에 대해 “요즘 젊은애들 같지 않게 착하고 예의바르고 연기도 열심히 해서 앞으로 좋은 배우가 될 것”, “며느리 삼고 싶을 정도다. 만약 내가 30년만 젊었어도 확 납치해버렸을 거다” 라는 말로 애정을 표현했다. 침착하고 겸손한 성격이 그녀의 큰 장점이라고. 현재 KBS 드라마 <해신 장보고> 촬영을 하고 있는 수애는 새 영화 <나의 결혼원정기>에도 캐스팅 되어 주가 폭등 중. 아버지로 출연한 주 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제가 너무 좋아하는 분이에요. 진짜 아버지처럼 편안하고 자상하시고 잘 챙겨주세요”라며 주 현의 손을 꼭 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