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가위가 서러운 사람들
기본 주제방 2004/09/24 18:22   http://blog.azoomma.com/sun2835/160887

“어머님, 갈수없어 죄송합니다”
[한겨레] ● 한가위가 서러운 사람들
선물을 한아름 들고 귀향을 서두르는 영등포역 앞 한쪽에는 실업자와 노숙자들이 길게 줄을 선 무료급식소가 있다. 한가위 연휴 전날인 24일 이곳에서 만난 허기진 사람들의 얼굴에는 추석을 맞는 설렘 따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고향에 어머니가 혼자 계시지만 일거리가 없어서 내려갈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어요. 내일 새벽 인력시장에 나가보고 일을 하게 되면 내려가는 거고 못하면 못 내려가는 거죠.” 경북이 고향인 백아무개(33)씨는 “추석 때 뭐라도 사들고 내려가야 하지 않겠느냐”는 질문에 눈물부터 쏟았다. “고기라도 한근 사들고 가고 싶지만 정말 가진 게 아무것도 없어요. 오늘도 교통카드와 주민등록증만 주머니에 넣고 새벽시장에 나갔는데 결국 일을 하지 못했어요.” 원래 제주도가 고향이라는 강아무개(38)씨는 “추석인데 고향에 안 가느냐”는 질문에 고개를 저으며 웃었다. “영등포가 제 고향이에요.” 무료급식소 노숙·실업자들
“벌이 없어 무슨 낯으로” 더 허기

영등포 생활이 10년째라는 오아무개(48)씨는 전남이 고향이고, 부모님도 모두 살아 계신다고 했다. 고향에 못 내려간 지는 4년이 넘었다. 올해 초 노숙자쉼터의 주선으로 결혼도 했지만 아직까지 아내는 시부모님께 인사도 못 드렸다.

이날 하루만 600여명이 무료급식으로 점심을 때웠다. 그들은 식판을 들고 길가 아무 곳에나 앉아 ‘꾸역꾸역’ 목구멍으로 밥을 밀어넣었다.

최근 경제불황으로 노숙자는 점점 늘어가는 추세다. 전국실직노숙자대책 종교시민단체협의회 조성준 간사는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노숙자들이 30% 이상 늘어난 것으로 추정된다”며 “한가위 연휴에는 무료급식을 점심뿐 아니라 아침과 저녁도 줄 예정”이라고 말했다. 가장 풍성한 철이라는 한가위. 하지만 영등포 무료급식소 주변 사람들에게 추석은 다가오는 겨울을 알리는 불안한 신호일 뿐인 듯했다.

이형섭 기자 sublee@hani.co.kr

컨테이너 농성 해고노동자
“일 때문에” 둘러대고 머리띠 질끈

“올 추석엔 어머니 얼굴을 못 볼 것 같습니다.” 서울도시철도공사 전 직원 김종찬(가명)씨는 이번 한가위에 고향에 내려가지 못한다. 이달 초 해고 통보를 받고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지내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설엔 정말로 일 때문에 못 갔지만, 이번에는 일 때문이라고 둘러댈 작정이다.

고향에 있는 부모와 친척들은 그가 해고된 것을 아직 알지 못한다. 지난 7월 파업 때 어머니가 몇 번씩 전화해 “너무 앞장서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지만 “예”라고 말하고는 어머니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이번 한가위에 지하철 매표소나 차량기지에서 근무하는 동료들을 찾아볼 계획이다. 노조 간부로서 지난 7월 여름투쟁 때 내걸었던 주5일 근무제 도입을 마무리 못한 데 대한 미안한 마음 때문이다.

그와 동료들은 지난달 3일부터 성동구 용답동 서울도시철도공사 본사 앞에 설치한 컨테이너 박스 안에서 농성에 들어갔다. 교섭다운 교섭 한번 못하고 사용자의 강경 태도에 밀려 파업을 철회한 뒤 주5일제 협상을 마무리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끝내 그와 동료들에게 돌아온 건 해고통지서였다.

지난 7월21~24일 단 나흘 동안의 파업은, 도시철도공사 노조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다. 불법 파업을 주도했다는 이유로 42명이 해고됐고, 그 가운데 11명이 파면당했다. 파면된 이들은 퇴직금도 절반밖에 받지 못했고, 윤병범 위원장 등 2명은 구속됐다. “더도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은 올 추석 이들에게 딴나라 이야기다.

세상 모르고 뛰노는 세살배기 딸과 한살배기 아들을 보면서 김씨는 “이 아빠는 많은 노동자를 위해 산다”고 위안하기도 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번 추석에 자식들에게 변변한 선물 하나 사줄 형편이 못 된다. 이번 한가위는 그의 삶에서 가장 힘든 명절이 될 테지만, 28일 밤 그에게도 크고 둥근 보름달은 떠오를 것이다. 정혁준 남종영 기자 june@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