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 아치울의 겨울
문화방 2005/01/08 03:49   http://blog.azoomma.com/sulgeeya/175364
 
  
4년 만에, 골목에 내린 첫눈 같은 연애 소설 <그 남자네 집>을 내놓은 박완서를 찾았다. 집은 겨울 나목들의 병풍에 둘러싸여 있다. 시어머니가 쓰시던 1백 년도 더 된 장식장, 문갑 위엔 사별한 남편의 반듯한 사진 액자, 그 아래로 정갈한 꽃무늬 이부자리 한 채가 놓인 구리시 아천동 노란 담벼락 ‘그 여자네 집’.
Photographed by Kim Yong Ho

아치울에 겨울이 왔다. 겨울이 왔다는 것은 더 이상 꽃이 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시간이 지나면 다시는 옛모습으로 돌이킬 수 없기라도 한 것처럼 대나무 잎이 담장으로 솟은 그 여자네 집 대문을 쳐다보았다. 구리시 아치울 마을의 노란집, 소설가 박완서의 집 서재 통창으로 아차산의 ‘밤나무숲’이 벌거숭이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녀는 마당 한켠에서 노란 국화 한 송이를 꺾었다. 첫눈이 내린 후였고, 12월의 마지막 꽃송이였다. “요놈이 여직까지 살아남아 있었네.”
얼마 전까지 백일홍이 빨갛게 피어 있었다고, 살구와 자두와 매화도 있었다고, 1년초 토종꽃들이 차례로 움트면 이곳은 사방천지 꽃대궐이라고, 수선화처럼 여린 몸피의 할머니가 마른 꽃잎처럼 웃었다. “인터뷰 피해 뉴질랜드까지 도망갔었어요.” 4년 만에, 골목에 내린 첫눈 같은 연애 소설 <그 남자네 집>을 내놓고, 그렇게 도망쳤다 다시 돌아온 집에서 마지막 국화 한 송이가 그녀를 맞은 것이다.
집 안은 빈약한 나목들의 병풍에 둘러싸여 있다. 시어머니가 쓰시던 1백 년도 더 된 장식장, 문갑 위엔 사별한 남편의 반듯한 사진 액자, 그 아래로 정갈한 꽃무늬 이부자리 한 채가 놓인 구리시 아천동 노란 담벼락 ‘그 여자네 집’. 젊을 땐 개성식 한과와 찻잔을 다소곳이 내놓았을, 그 후엔 손주들의 장난감이었던 개다리소반을 앞에 두고 그예 무릎을 꿇고 앉은 일흔 넷의 박완서. 햇빛이 방금 까놓은 귤 껍질처럼 연한 향기를 풍기며 스며든다.

“일흔이 넘으니… 나이가 들수록 새처럼 자유로워져요. 그렇게 중요한 것도 없고 필요한 것도 없어요. 살 날이 얼마 안 남았다는 것도 기분 좋아요. 이만큼 살아냈구나, 싶은 게.” ‘살았다’가 아니라 ‘살아냈다’라는 말에 명치께가 아팠다.
소설가로 데뷔하던 34년 전, 마흔 무렵에 그 여자네 집은 얼마나 많은 소리로 북적거렸던가. 식솔들의 밥 냄새가 갈라진 벽지 사이에 혼곤히 배어 있었을 부엌 한켠엔 젊은 박완서가 흑백 사진 속에서 웃고 있다. 보문동 한옥집 마루에 짧은 원피스를 입고 성장한 네 아이들과 자매처럼 뒤엉켜 웃는, 한여름 해바라기 화단 같던 그 여자네 집.
“그거… 한 89년도쯤 됐나 봐요. 마흔 일곱인가? 맨 왼쪽에 첫째 딸만 결혼했을 거예요. 그 사진 보고는 다들 좋다고 그래요. 아마 신문사 사진 기자가 마당에 있는 장독대 위에서 찍었을 거예요.” 눈 감고 들어도 ‘아, 이 여자는 얼굴이 작겠구나’ 싶을 만큼 박완서의 봄날 새댁 같은 단정한 음성. 그 시절 한옥 마당엔 다들 겨울 날 보물단지처럼 장독대를 쟁여놓았지만, 지금 아차산 밑 박완서의 집엔 식어버린 바비큐 그릴이 나무 옆에 서 있다. “근처에 그림 그리는 사람들이 많이 살아요. 이웃끼리 같이 마당에서 고기도 굽고 술도 하고 그래요. 내가 술이 세서 웬만한 사내도 나를 못 당해요(웃음).” 그래서 냉기가 지독하게 서린 지하 서고에 빈 와인병들이 책과 동거하고 있었구나.
집 안 곳곳엔 좋은 그림들이 가족처럼 걸려 있다. 박수근의 아이 업은 엄마 그림, 권옥연의 괴팍한 여자 그림, 김점선의 노동화풍의 그림, 그리고 종이를 태워 겹겹이 얼굴을 만들어낸 정규리의 여백 많은 젊은 그림, 중학생이 쓱쓱 그려준 좁은 어깨의 ‘박완서 할머니’ 연필 초상화까지.

노란 대문집으로 들어서기 전, 사진작가 김용호와 나는 작가의 상상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에 대해 잡담을 나눴다. 전쟁과 역사를 재현하는 ‘답사형’ 작가도 있고, 방대한 자료가 농축된 ‘도서관형 작가’도 있다. 박완서는 어느 쪽일까? 나는 그녀처럼 부엌의 요리와 거리의 풍속을 ‘제대로’ 묘사해내는 작가를 본 일이 없다. 보리고추장 푼 물에 애호박을 넣어 끓인 민어찌개니, 새파란 실파가 동동 뜬 준치국, 분홍빛 국물에 순 서울식으로 담근 오이 소박이, 잘 말린 어란과 기름기 자르르 흐르는 굴비, 낙지에 전복, 젓조기, 석이버섯이 들어간 개성식 제육 보쌈, 제육을 썰어 넣은 호박김치찌개…궁핍한 시절을 지나왔으나 마음과 범절이 찌들지 않은 것은 참기름병과 햇장독과 물좋은 생선 덕이 아니었나 싶을 만큼 그 여자, 박완서가 차려낸 책갈피의 음식상은 풍요로웠다.
“친정이나 시가가 옷이나 집치레는 안 해도 음식 치레는 꼭 했어요. 식탐하고는 다르게 때마다 절기마다 제대로 만들어 먹었어요.” 밖에서 아무리 맛있는 거 먹어도 속이 느글거려 집에 오면 된장찌개로 꼭 입가심을 해야 한다고 튼튼한 치아를 드러내며 웃는다. 소설 제목에 꼭 ‘집’자가 들어가지 않아도 집에는 영혼이 있다고, 박완서의 소설을 만들어낸 곳이 전쟁터도 도서관도 아닌 일가붙이 모여 지지고 볶던 ‘집’이었기 때문일까.
그리고 일상. 박완서가 겪은 일상으로서의 인생과 40년 뒤에 서 있는 내가 겪은 일상으로서의 인생은 왜 그리도 같고도 왜 그리도 다른가. 철부지 시절 사치 같은 첫사랑이 있었고, 그즈음 ‘삶의 비리’를 선험한 것처럼 서둘러 ‘비둘기집’을 지을 남자와 결혼하고, 정이 들어 잠잠하다가, 폭풍처럼 그 사람이 아닌 ‘그 사랑’이 그리운. 마냥 일탈하지도 정주하지도 않는 박완서의 여자들. 나는 내 식구의 밥줄을 무시할 만큼 연애질에 눈멀지


나는 내 식구의 밥줄의 존엄성을 무시할 만큼 연애질에 눈멀지 않았다… 수컷은 청청한 잎이 달린 단단한 가지를 물어다가 견고하고 네모난 집을 짓고, 드나들 수 있는 홍예문도 내고, 빨갛고 노란 꽃가지를 물어다가 실내 장식까지 하는 것이었다. 암놈은 요기조기 집 구경을 하고 나서 그 중 가장 마음에 드는 집을 골라잡기만 하는 짝짓기가 이뤄진다. ‘그래, 그때 난 새대가리였구나… 나는 작아도 좋으니 하자없이 탄탄하고 안전한 집에서 알콩달콩 새끼 까고 살고 싶었다.-<그 남자네 집>에서’
삶에서 한걸음 비껴서 던지는 농담, 바로 그것이 문학이라고, 그러나 나는 일흔 네 해 동안 그녀가 청춘에 바치던 그 비정한 스타카토조의 후렴구들을 떠올렸다. 죽을 날을 시름없이 바라볼 수 있는 일흔 넷이 좋다지만, 허물어가는 눈가에 여전히 보얗게 서린 새침떼기 소녀다운 그 생기는 어쩌지 못한다. “난 옛날이나 지금이나 성격이 똑같애요. 소녀적이나 아줌마나 할머니나… 내가 구현하는 여성성… 아휴~ 난 그런 거 말 못해. 내가 경험한 근세사를 생각해봐요. 내 속에 얼마나 많은 시대가 축척돼 있겠어요. 전후의 궁핍한 시절은 물론이고 우리나라 근세사는 여성에게 빚진 게 너무 많아요. <그 남자네 집>에 나온 여자들도 그렇잖아요. 집에선 하숙 치고, 시장에선 좌판 내고, 양놈에게 몸 팔고…박정희 산업화시대에도 값싸고 필요한 모든 걸 제공한 게 여자들이야. 난 소설에서 양공주가 돼서 식구들 먹여 살리고 훗날 이민간 춘희 캐릭터에 애정이 많았어요. 그래서 뒤에 춘희의 장광설 같은 푸념이 이어지잖아. 그게 나라를 위해 내가 무엇을 했으니 알아달라, 이게 아니야. 그 어려운 시절을 ‘살아냈다’는 거에 대한 애정이에요.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그 시대를 살아온 여자라는 생명체에 대한 필연을 그리고 싶었어요.” 그렇게 지면에 속사포처럼 수다를 쏟아낼 때 쾌감을 느낀다고, 과묵한 그녀가 말했다. 좋은 소설의 요건, 젊은 소설가들에 대한 제언, 문체와 주인공의 지향점에 대해 주제 넘게 입을 연 나는 뒤틀린 사람처럼 꾸물거렸다.

기습하듯 그녀가 계속했다. “한 달간 박경리 선생의 토지문학관에서 글을 썼어요. 집에선 전화도 받아야 하고 이렇게 손님 치레도 해야 하고… 박경리 선생이 왜 아주 엄격해 보이잖아요. 작품도 인생도… 그런데, 나도 경제적으로 어려운 적 없어도 아들 문제 때문에 힘들었을 때(고 호원태 씨), 속으로 따뜻하게 많이 품어주셨어요. 떨어져 있어도 그분 살아계신 게 의지도 되도 위안도 되고 그래요.” 한국의 비루한 근대사를 마른 직선으로 일갈해 온 박경리와 질펀한 곡선으로 품어온 박완서. 바깥 어른 같고 안주인 같은 그녀들의 원근법이 없었다면 ‘젊은 것’인 나는 제 족보도 모르고 활개쳤을 것이다. 노인의 몸은 삶의 번잡스러움 속에서도 소설의 호르몬으로 들끓고 있다. 그렇게 그녀에게 문학적 나침반의 구실을 하는 건 개성의 여학교 시절 국어 선생님이었던 소설가 박노갑과 톨스토이라고.
“나는 옛날부터 톨스토이, 도스토예프스키를 많이 읽었어요. 독서욕은 왕성한데 당시엔 읽을 게 많지 않았어요. 여학교 때 일본 출판사 것을 번역한 러시아 세계문학전집을 닳도록 읽었어요. 전쟁통에 친정이 풍비박산 나면서 그 책들도 다 사라지고 지금은 몇 권 안 남았지. <안나 까레니나><전쟁과 평화>… 그런 거 보면 그 많은 인물들의 성격 묘사가 집요하고 치열해요. 그런데 좋지 않은 습관도 배웠어요. 내 초기 작품에 설교조도 많은데, 그게 거기서 나온 것 같애요. 나는 대학교(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가던 맡에 6.25가 나서 중퇴를 했기 때문에 정통 문학 교육을 못 받았어요. 하지만 그 시절엔 지금처럼 입시 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중고등학교 때 문학 개론을 배웠어요. 아릿아릿하고 감상적인, 일본 연애 소설 흉내낸 소녀풍의 시를 쓰면 선생님이 호되게 야단을 했어요. 생활의 무게가 없는 글은 쓰지 말라고 배웠어요. 그래서 그 반에서만 문인이 네 명이나 나왔어요.”


나이 마흔에 등단한 박완서. ‘미군 부대 PX 근무와 화가 박수근’을 소재로 쓴 자전적 소설 <나목>은 1970년 11월 <여성동아> 부록으로 세상에 나왔다. 그렇게 소설을 ‘입심 좋은 어머니의 이야기’처럼 아이들 다 키우고 기쁜 일 슬픈 일 모두 겪은 후에야, 다락방에 감춰놓은 보자기 풀듯, 저잣거리에서 장바구니 들고 활개치듯 쓸 수 있었다는. 시간은 의미를 잃고 시무룩해지고 있는데, 그의 시린 등을 덮어줄 망토 같은 큰딸이 들꽃처럼 웃으며 서재로 들어왔다. “어쩐 일이냐?” “내가 온다고 했잖아.” “너 올 줄 알았으면 광장시장 가서 뭣 좀 사오라고 할 걸 그랬다.” “뭔데?” 모녀가 두런거리더니, 그예 박완서가 딸과 함께 출행나갈 것처럼 바람을 일으킨다.

“몇 해 전인가 그 쪽에서 찍어간 사진에 김혜자 씨가 나랑 같이 나왔잖아요.” 4년 전 내가 20대부터 80대까지 여성을 조명하는 칼럼을 진행할 때 그녀는 막 일흔에 접어들었었다. “그런데 탤런트 김혜자 씨가 날더러 ‘선생님, 왜 그렇게 늙게 나왔어요. 주름도 많게….’ 타박을 했더랬어요. 이상하다. 내 나이대로 내 가진대로 내 성깔대로 나와서 나는 좋던데….” 큰딸이 장단을 맞추듯 거든다. “소설가가 성깔도 없이 밋밋하게 나오면 돼나요. 아무렴. 엄마, 나도 그 사진 좋아. 소설가가 성깔이 없으면 소설도 못쓰거든.” 하지만 흑백의 폴라로이드가 나올 때마다 나는 4년 전보다 작아져 버린 그녀가 서글퍼 자꾸만 뒤춤으로 감추고 싶어졌다.
“요렇게 정식으로, 구식으로 하는 사진은 정말 오랜만에 찍어봐요. 그때 찍고 처음이야. 뉴질랜드 가니까 나 아는 이 남편이 우리 관광 갔던 사진을 죄다 디지털인가 하는 작은 사진기로 찍더라구. 한국 오는데 그 사진을 쬐끄만 디스켓에 담아서 줘. 앨범으로 정리하면 한참 두꺼울 텐데… 그런데 또 나 아는 이가 남편한테 “여보, 근데 내 얼굴은 작게 만들어줘요.” 그러더라구. 신기해요. 난 휴대폰도 옛날 흑백 구식인데, 요즘은 그걸로도 사진을 다 찍더라고.” 박완서는 영정 사진은 이미 찍어놓았다고 했다. 잘 다린 하얀 한복 입고 칠순에 이미 그 사진은 박아놓았노라고. “우리 엄마는 비밀이 있어요. 뒷머리 두상이 남들보다 많이 튀어나왔어요.” 큰딸이 발설하는 그 비밀의 의미가 ‘그 많은 기억의 저장고’라는 짐작이 들었다.

큰딸과 팔짱 끼고 나가 광장시장에서 잘 달인 인삼액인가를 사야 하는데, 너스레 떨며 한참을 붙들어 앉힌 사진작가를 향해 맘대로 화도 못 내고 하는 말이. “나, 신경질 날려고 해요.” 불친절한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를 남한테 똑같이 주고 싶지 않아 매사에 조분조분한 그이가 볼멘 어린애 투로 말한다. 왜 그순간 ‘해질녘 수수밭의 수숫대가 흔들리는 것이 슬프다’고 느꼈다던 박적골의 예민한 일곱 살 소녀, 박완서가 떠올랐을까. “이상하기도 하지. 왜 나는 맨날 두 손을 요렇게 소녀처럼 무릎에 얌전하게 모으고 있을까? 사진 찍을 때 말고도 버스 안에서도 전철 안에서도 내 손이 어디 갔을까 하면, 무릎 위에 있어요.” 식탁 위에 수건처럼 곱게 접힌 노 작가의 손에서 반짝하는 물체가 보였다. 홍옥인지 루비인지 반지 하나가 마른 약지 위에서 수줍게 작열하고 있다. “이 반지요, 이거 결혼도 하기 전에 약혼도 하기 전에… 스물 두 살 때… 죽은 우리 남편이 준 거예요. 색깔이 빨간 게 루비인지 뭔지도 난 몰라. 그때는 엄마한테 말도 못하고 이 반지는… 결혼하고 나서야 꼈어요.” 두 사람은 1953년 4월21일 벚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결혼했다. 제대로 된 예식장도 없어서 중국집에서 식을 올렸다. 당시로는 호화판이었다. 신접 살림은 남편의 집 종로구 충신동 18평짜리 한옥에서 시작됐다. “50년도 더 된 거네요. 그런데 남편이 뭐라고 하시면서 주셨어요?” “암 말도 안 했어요. 그냥 조그만 상자 하나 줬어요. 그때는 남녀간에 그렇게 수다스러운 시대가 아니었어요.” “우리 아버지는 가족밖에 모르셨어요”라고 호원숙 씨가 부연한다.


“내 기억력은 편향돼 있어요. 느낌에 대한 기억력은 좋은데 사람 이름, 숫자 이런 거는 영 기억을 못해요. 보통 사람보다 많이 떨어져. 관대한 남편 만나서 그렇지 경제 관념도 아주 희박했어요. 결혼 생활할 적에 소설에서처럼 한 달 생활비 돈 맞출려고 하면 두통이 막 나서 못했어요. 그래서 남편한테 1주일 쓸 것만 달라고…, 그걸 고무줄로 동여매서 썼어. 왜 지금은 카드라는 게 있어서 잊어버리려고 해도 기록이 날아오잖아. 그런데 나는 손가락 새로 빠지는 것처럼 그 돈이 다 어디로 날아가 버릴 것 같아서 기억도 안 나서…, 고무줄로 꽁꽁 동여매서 썼어요.” 시간의 나이테가 침잠한 야윈 얼굴로, 결혼할 때 말고는 마사지 한번 못해봤다는 박완서는 이제는 분가한 딸들과 함께 1주일에 한번 마사지를 받고 싶다고 했다.

나이가 들수록 지구 중심에서 격리되고 싶지 않아 조급해진다지만, 그녀는 깊은 호흡으로 자신의 용기 안에 기거하고 있다.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목욕을 해요. 소설도 아침에 주로 써요. 나는 소설 쓰는 걸 아주 즐겨요. 힘든 건 있죠. 그런데 힘들고 고통스럽지만 소설은 자기 위안이 되니까, 또 좋아서 써요.” 아치울에 겨울이 지나가고 있다. 한옥이 좋아 작정하고 삼청동에 한옥 구경도 갔더랬다고. 그런데 그렇게 천장으로 서까래도 있고 조선 여자 비녀 꽂은 머리처럼 대문도 반듯한 ‘그 여자네 집’은 지금 어디서 무엇이 되어 살고 있을까? 아치울 마당으로 나즈막히 가라앉은 겨울 공기가 하늘 높이 잿빛 이랑을 내고 올라갔다.

에디터 / 김지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