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날 화창한 일요일.온가족 함께 수원화성을 둘러보았다.
아름답고 견고한 성.
적과의 싸움에서 꼭 이기기 위한 성벽....
팔달문에서 시작하여 장안문까지.창룡문은 못갔지만 화성의 4분의 3을 걸었다.
행궁까지 돌어보고나니 걸은 시간 6시간.
날씨도 도와준 화성 답사.
나의 소감 올리기 전에 이렇게 남의 글 퍼다가 먼저 올려본다.
<퍼왔습니다>
화성의 건축
화성의 건축은 크게 나누어서 둘로 살필 수 있다.
우선 말 그대로의 화성을 들 수 있고,
관념적이면서 행정 기구인 화성인데, 여기에는 화성 행궁이 들어감으로써 화성의 건축을 더욱 주목받게 하였다.
화성의 건축은 과거의 축성 제도를 보완한 절정기의 축성 건축이랄 수 있다.
또 행궁의 건축은 기능적이면서 아름답게 짓고자 했던 의도가 엿보인다.
자연의 지세를 그대로 활용하면서도 법식을 잃지 않았다.
예를 들어 행궁의 거의 모든 건물은 팔달산의 동쪽에 의지하므로 동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객사만은 그 제도의 특성으로 남향했다.
수준 높은 화성의 건축 이면에는 당시의 뛰어난 문화적 능력이 있어서 뒷받침했다.
그래서 건축은 시대를 반영한다고 볼 수 있다.
1.화성축조
전장 4600보(1보 약 1.18미터) 5.7km
화성의 전체 길이는 본래 약 4000보로 계획했다.
여기서 보步의 단위를 살필 필요가 있는데 일보一步는 미터법으로 약 1.18미터에 해당한다. 한 걸음이라는 의미가 되겠는데 사람의 한 걸음이 일 미터를 넘는다는 것은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그러나 음양오행을 중시한 조선 사회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즉, 좌우 한 걸음을 합해서 일보라고 했던 것이다. 이렇게 계산하고 보니 오늘의 미터법과 당시의 일보가 합치된다.
동서남북 4대문,남북 2수문,5암문 등 시설 완벽.
성문의 제도와 수문, 그리고 샛문에 해당하는 암문의 제도는 완벽하다.
꼭 필요한 자리에 알맞은 크기를 구사하여 문을 냈다는 것은
곧, 화성이 사람을 위한 성으로서의 기능성을 갖추었다는 반증이다.
그리고 봉돈, 포루, 각루 등의 시설은 어느 하나 복합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그만큼 건축적 능력이 복합적인 힘을 갖추었던 것이다.
봉돈이면서 치성이고 숙직소의 역할을 겸하는 것과,
포루이면서 치성의 역할과 망루로서의 기능에다가 중화기를 은닉해두는 중첩된 면모를 보이는 것이다.
행궁 건립
행궁의 제도는 본래 국왕의 임시 처소로 시작된다.
화성의 행궁은 국왕이 현륭원을 참배하기 위해 도성을 떠나 수원에 행차하게 되면
머무를수 있는 공간으로 계획되었다.
그러면서 수원을 다스리기 위한 관아로서의 기능도 겸했다.
그러므로 화성을 이해하는데 있어 행궁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시설이다.
실제로 화성의 축성이 이루어지기 전에 행궁이 건립되기 시작한 것도 이를 반증한다 하겠다.
정조 퇴위 후 위한 배후도시 가능성
정조는 1804년, 갑자년이 되면 퇴위하고 수원으로 낙향하려 한다는 마음을 여러 사람에게 말했던 듯하다.
갑자년이라는 육십갑자의 출발점에다 부모의 칠순을 맞이한다는 공통점,
그리고 한 술 더 떠서 세자의 나이가 15세가 된다는 우연의 일치가 정조로 하여금 퇴위를 생각하게 했을 것이다.
퇴위한 다음에는 상왕으로서 정사를 보필하면서 부모에게 못다한 효도를 하려고 했을 것이다. 자신이 고향으로 생각하는 수원에서 나름대로의 생을 정리하는 한편,
국가 운영의 밑거름이 되는 학문 연구 등의 뒷받침을 계획했을 것이라고 상정할 수 있다.
그렇게 되면 수원은 조선 제이의 도시가 되면서 학문 연구의 장으로 각광 받았을 것이고, 조선 후기 실학의 실험장이 됐을 것이다.
그러나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1800)은 수원의 몰락을 동반하는 결과를 낳았다.
**신도시 건설
도시공학자들의 견해에 의하면 전원도시 혹은 신도시의 구상이 발표된 것은, 1898년 영국의 Ebenezer Howard에 의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이 구상이 구체화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 끝난 1946년 이후라고 한다.
그렇다면 화성의 건설은 그 구상보다도 100여년 앞서고,
그 실천보다는 150여년이 앞서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더구나 화성은 신도시, 혹은 전원도시의 개념과 맞아 떨어지는데,
이는 첫째, 수도인 한양을 모도시로 해서 계획적으로 조성한 위성도시였고,
둘째는 신도시의 번성을 위해 수도의 기능 일부를 이전했다는 점,
그리고 셋째는 자족적인 도시로 키우려고 했다는 점 들을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이는 20세기 후반 들어서 전세계적으로 불어 닥치는 신도시의 열풍과 견주어 볼 수 있다. 대개의 신도시들이 잠만 자고 생활은 수도에 가서 행하는 베드타운의 역할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는 반면,
세계 최고의 계획된 신도시 화성은 서구의 구상보다 100여년 앞서 훌륭하게 건설되었던 것이다.
이점은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예가 되어 국민들이 자부심과 자긍심을 느껴야 하는 것이다.
실학자들의 연구에 따른 실천
지금의 수원은 출발부터 실학 사상을 깔고 있었다.
실학의 비조라고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이 그의 저서 반계수록 군현제에서,
지금의 수원을 지목해 당시의 수원은 적합치 않다고 갈파했고,
실학자들의 연구와 실천에 따라 아름답고 튼튼한 성을 이룩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실학 정신은 시대가 어려울수록 부각되는 법이고,
실학으로 무장하여 나라를 이끌어야만 발전을 기대할 수 있다.
서양이 일찌감치 과학을 근거로 실학을 실천했기에
오늘날의 발전을 도모했다는 점을 우리는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