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회찬 의원의 한자시험
정치/경제 2005/10/13 18:36   http://blog.azoomma.com/richard/207487

노회찬 의원이 의도적이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국감에서 법률 전문가인 <법제처장>에게 법률에 관련된 한자시험을 보았다고 한다. 이 시험은 비전문가가 전문가의 지식을 테스트한 일종의 우상파괴 행위이다.

노 의원이 제시한 10개 문제 가운데 ‘장리’(掌理. 일을 맡아서 처리함), ‘삭도’(索道. 케이블카 등의 케이블), ‘정려’(精勵. 부지런히 일함) 등 3개 문제는 뜻을, ‘몽리‘(蒙利. 저수지 등 수리시설의 혜택을 입음) 등 나머지 7개 문제<전촉(轉囑), 호창(呼唱), 결궤(決潰), 저치(貯置), 위기(委棄), 분마(奔馬)>는 음과 뜻을 물어보는 문제였다고 한다.

언젠가 어디로부터 ‘<해태(懈怠)>로 인해 언제까지, 어디로 출두하시오‘ 라는 공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해태라니, 이게 뭔 말이야‘ 하고 당황했다. 알아보니, ’어떤 법률 행위를 해야 할 기일을 이유 없이 넘겨 책임을 다하지 않는 일‘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음을 그제야 알았다.

전해진 보도에 따르면, 법률 전문가인 법제처장도 제대로 그 뜻을 적절히 지적하지 못했다고 한다. 아마 노 의원이 지나치게 급하게 몰아치니, 당황한 나머지 답변을 못했을 수도 있다.

대한민국에 저 말을 이해하는 자가 도대체 얼마나 될까? 거의 전무하다고 보아야 한다. 법률을 공부하지 않았으면, 대학, 아니 대학원을 나온 자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국어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말을 어느 누가, 정상적으로 공부한 사람이 알 수 있을 것인가?

게다가 법률을 다루며 먹고사는 자들도 모른다면 그건 더 한심한 일이다. 물론 그들은 알 것이다. 일생을 6법 전서를 꿰차고 살다가, 송두리 채 달달 에워 판사, 검사, 변호사 나부랭이가 되었으니 말이다.

논리학에 권위에 호소하는 논증의 오류(Argumentum ad verecundiam)라는 것이 있다. 사회적 통념, 관습, 전통, 제도 따위의 부적합한 권위에 호소함으로서 생기는 오류를 가리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특정한 분야의 전문가의 권고가 그렇지 못한 사람들의 권고보다 더 큰 권위를 가질 수 있다. 비전문가로서는 이러한 사실을 마냥 외면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어떤 특정한 분야의 권위자를 다른 분야에도 그대로 적용하는 경우에는 오류가 발생할 수 있다.

조용기 목사가 말씀하시기를, ‘지구는 네모지다’고 한다. 미국의 유명한 빌리 그래암 목사가 말하기를 ‘어쩌고 어쩌구’ 하다고 한다. 성경에 따르면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란다.

마광수 교수가 ‘남자들은 야한 여자를 좋아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니 이제부터 우리 모두 야한 여자가 됩시다.’라고 한다든가. <양자 역학의 불확정성 이론에는 확실히 타당하지 않은 무엇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오. 아인슈타인도 ‘신이 우주와 함께 주사위 놀이를 하리라고는 믿을 수 없다’고 하면서 그것에 반대했기 때문이요.>

대중의 사랑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연예인을 신형 자동차 옆에 세워놓고 광고하는 경우를 자주 보는데, 자동차 기능과 벌거벗은 여자들 간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겉보기엔 아주 좋지만....

특정한 물품의 우수성을 그 연예인의 이미지에 의존하여 광고하는 경우도 이와 유사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몸매가 뛰어난 연예인을 사용하여 의복을 광고하는 경우에도 <누구나 다 그 옷을 입으면, 그렇게 날씬해질 수 있다고 믿게 하는 것>도 일종의 전혀 연관 관계가 없는 것을 관련시켜 생각하게 하는 오류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결국 권위에 호소하는 오류는 전통과 권위에 대해서 사람들이 지니고 있는 <존경과 숭배의 마음에 호소>해 어떤 주장을 옹호하려 할 때 빠지는 오류인 셈이다. 어떤 특정한 분야에 관한 전문가나 권위자를 다른 분야에 관한 전문가나 권위자로 착각하여 그 사람의 의견을 논증의 증거로 받아들임으로써 빠지는 오류다.

누구나 승인하고 받아들이는 <정당화된 권위>란 자신들에게만 귀속하는 집단 문화에 한정해서는 결코 생겨날 수 없다. 특정한 집단에 기인한 <그릇된 집단적 권위 의식>은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이 권위는 한 사회의 보편적이고, 통념적인 원칙을 파괴시킬 수 있다. 누구에게나 보편적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전문가의 권위를 가질 때, 진정 우리가 바라는 <올바른 권위>로 그 위상을 자리매김 할 수 있을 것이다.

법률 전문가들은 왜 자신들만이 이해하고, 사용하는 용어를 고집하는 것일까? 국어사전에도 등재되지 않은 말을 사용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과 가장 친숙해야 될 법을 누구나가 동등하게 읽지 못하게 하는 장벽을 쌓는 짓이다. 여기에 비민주주성이 내재한다.

국민이면 누구나 가장 친숙하게 알아야 하는 것이 헌법이요, 또 사회 규범을 기록한 법이라면 일상적 삶에 관련된 쉬운 언어로 쓰인 법조항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하다못해 결혼신고도 하고, 억울한 일을 당하면 법에 호소해야만 하는데, 이 땅에서 대학을 나온 사람조차 자신에게 해당하는 법률행위를 법에 호소하지 못한다는 것은 비민주적이다.

국가에서 주어지는 공교육을 정상적으로 밟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자신의 억울함을 법에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다 법과 법이 상충하고, 상대방과 이해를 달리하고, 해석을 달리하는 대목에서는 법률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면 되는 것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일반 행정, 세무, 재산, 호적 문제.... 우리의 실생활과 밀접한 분야에서도 우리가 제대로 법률적 용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은 대단히 비민주적이다.

그러면 왜 법률가들은 아직도 일제식 조어 한자인 법률용어에 매달린 채로 고치려는 자세를 보이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고, 쓰고 있는가? 일제 잔재의 청산을 외치는 이 마당에 법률가들은 법률 용어를 쉬운 우리말로 옮기려 하지 않는가?

노 의원이 예로 들은 그런 류의 법률 용어를 사용하는 재판관들은 제대로 <한글>을 공부한 놈들인가? 학교 다닐 때 어땠는지, 초등학교 국어 성적이라도 뒤져봐야 할지 모른다.

그들은 <원심은, 원고는 ....오다가 ... 고소당하자, .. 받은 사실, 그런데도 ...오면서, .....말하였고, 이에 원고는 ....되었는데, ...요구하다가 ...요구하므로, 다음에 .... 원고는 .....합의 하였는데, ...... 볼 수는 있으나, ..... 없으므로, .... 판단하였는 바, ..... 없으며, .... 석명하지 않았다고 하여 ... 볼 수 없고, .... 것이므로, 결국 ....모두 이유가 없다.> 하는 따위의 저질의 <우리글>로 숨쉬기조차 힘든 만연체로 판결문을 남긴다.

그들은 절대 단문으로는 글을 쓰지 않는다. 어떤 재판 건에 관련되었든, 재판 판결문 한번 읽어 보라. 속된 말로 <이거 읽다가는 머리에서 쥐난다>. 문장 하나가 몇 장의 판결문으로 쓰여져 ‘본 건은 ..............이다’로 끝나는 한 문장 자체가 하나의 판결문을 구성한다.

이것은 잘못된 권위이다. <내가 어렵게 법조문을 공부해서 재판관이 되었는데, 너희들 비전문가 나부랭이들과 같은 차원에서 법조문을 들이 밀고 논쟁을 해. 어불성설이지.> 보통 사람들이 잘 이해하지 못하는 말로 씨부렁대야 법관으로서의 권위가 생긴다고 믿는 대단히 야만적인 사고방식에 빠진 자들이 바로 법을 다루는 자들이다.

군주법이 아닌 민주사회의 법은 누구나 그 의미를 파악할 수 있는 쉬운 말로 쓰여져야 한다는 것이 기본 원칙이다. 이게 상식에 토대를 둔 민주사회의 모습이기도 하다. 그 법이 무슨 말인 줄 몰라서 준법을 어겼다고 한다면, 무어라 하겠는가?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래야 모든 사람이 법을 지킬 것이 아닌가? 알아 먹을 수도 없는 법을 어떻게 지키나?

법률의 권위는 건전한 상식에 기초해야 한다. 법의 권위는 어깨에 걸친 법복에서 나오지 않는다. 법관의 법률 해석적 권위 또한 건전한 양식을 가진 사람이면 동일하게 판단할 수 있는 상식에 토대를 두어야 한다.

이 점에서는 의사들도 마찬가지다. 감기에 걸려 병원에라도 한 번 가보라. <어디 죽을병이라도 걸렸나요> 라고 답답해서 물으면, <아뇨 괜찮아요. 걱정 마세요. 집에 가서 아스피린 두 알 먹고 이불 팍 뒤집어쓰고 자빠져 자시오>라고 하면 안 되나. 너도 알아먹기 쉽고, 나도 알아먹기 쉽고, 서로 의사소통 잘 되지 않나? 그러나 이렇게 말하는 의사 놈들 없다.

‘며칠 병원에 나오세요’ 하면서 진찰한 결과를 진료 차트에 영어 날림 체로 큼지막하게 써 재낀다. 저만 알아먹을 <글> 지껄임이다. 아스피린 두 알이란 말로도 쓰지 않는다. 잘 모르지만, 무슨 미리 미리 그램 단위(?)던가 이런 알아보지 못할 기호로 써 댄다.

우리도 영어 좀 한다. 그 의사 놈들 못지 않게 읽을 줄도 안다. 영어 스펠링이 제대로 맞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좀 또박또박 쓰면 안 돼나. 등 너머로 영어 단어 공부나 할 수 있도록 말이다. 이것도 되먹지 못한 의사들이 가지는 <야만적 권력 상징적 권위>다. 잘못된 권위의식이다. 

이들의 배후엔, <내가 너희들보다 머리도 좋고, 부모 잘 만나서 돈 많이 써 가며 과외 공부해서 의대에 들어갔는데, 너희들과 우리가 같은 동류의 수준에서 의학적 지식을 나누면 되갔냐>는 아주 야만적이고, 비민주적 의식에 뿌리박힌 의식구조가 숨어 있기 마련이다. 이런 짓은 참으로 비겁하다.

우리가 전문가를 존경하고 그들의 의견을 구하고 그들의 충고에 따라 살아가는 것은 왜인가? 서로 의사 소통할 수 있고, 서로를 믿고, 존경하는 마음에서 그들에 대한 정중한 예의를 가진 <경청함(따름)>을 통해서 관계가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서로를 신뢰하기 위해서는 우선 잘못된 직업 이데올로기적 권위에서 벗어나야 한다.

대통령의 무소불위적 권력도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도 깨진 이 마당에 아직도 그런 잘못된 권위의식에 빠져 놀아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은 좀 부끄럽다.   ⓒ명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