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망울 초롱초롱한 어린 시절. 12월만 되면 TV에서건 라디오에서건 산타 할아버지에 대한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매년 12월 24일 밤 루돌프 사슴이 끄는 날으는 썰매를 타고 온 세상의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준다는 그 냥반.. 바로 산타 클로스. 굴뚝으로 기어 들어와 머리맡에 매달아 둔 양말 속에 선물을 넣어주고는 잠든 아이의 이마를 쓰다듬어 준다는 냥반.
사춘기 소녀에게 백마 탄 왕자님을 기다리는 가슴 설레는 환타지가 있다면, 코흘리개 아이였던 우리에겐 산타를 향한 애잔한 로망(?)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매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뜬눈으로 지새며 그토록 애타게 기다렸던 산타 할아버지의 선물은 단 한번도 받지 못했다. 물론 지금은 안다. 다음날 아침 아이들의 손에 쥐어진 선물들은 다름아닌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고픈 부모들의 연극이었음을.
가난했던 어린시절 매년 12월 25일은 내게 있어서 기쁘고 즐거운 날이 아닌 절망과 좌절의 날이었다.
물론, 나 처럼 선물을 못 받은 애들 중에는 산타가 준 거라며 자랑하는 애들에게 "그거 니네 아빠가 어제 문방구에서 산 거야"하며 초를 쳐댔던, 지나치게 일찍 진실에 눈을 떠버린 조숙한(?) 녀석이 있는가 하면 '내년엔 더욱 더 착한 아이가 돼서 산타에게 꼭 선물을 받겠다'고 다짐하는 긍정적 자아의 소유자도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느 축에도 끼지 못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나의 동심이 심각할 정도로 진지했다는 데 있다. 친구들의 선물자랑이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스산한 골목길 귀퉁이에 쪼그리고 앉아 나는 선물을 받지 못한 이유를 고민하고 또 고민했던 것이다.
'분명 착한 아이들에게 선물을 준다고 했는데 어째서 못된 짓 많이 하기로 소문난 녀석들까지 선물을 받은 것일까',
'착한 아이의 기준이 뭘까, 단지 울지만 않으면 되나?',
'산타 할아버지는 나를 싫어하는 걸까?'
나는 그렇게 결론이 나지 않는 고민으로 서글픈 성탄절을 보냈다.
그리고 십여년의 시간이 흘러 대학 1학년이 되었던 지난 94년 성탄절. 나름의 분석력과 가치관을 갖게 된 나는 그해 12월 문득 잊혀졌던 산타 할아버지를 생각하게 됐다.
어린시절과 비슷한 문제를 고민했지만 달라진 점이 있다면 처량맞은 골목길 귀퉁이가 아니라 자취방 한켠에서 쐬주에 오징어 뒷다리를 뜯으며 고민했다는 것 정도다.
그리고 어린시절 그 골목길에서 미처 깨닫지 못했던 많은 사실들을 알게 됐다. 대학생이랍시고 다들 애인이랑 흥청망청 들떠있던 당시 외로이 자취방을 뒹굴며 밝혀낸 산타 할아버지의 진실...
인터넷도 제대로 보급이 안된 그 시절, 산타에 관련된 자료라곤 '울면 안돼(원제-Santa Claus is coming to town)'라는 오직 한 곡의 캐롤송 가사 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쐬주의 알딸딸한 취기와 자취방에 베인 카오스적 꼬랑내 등의 초자연적인 기운에 힘입어 한 곡의 캐롤을 단서로 산타의 전모를 파헤쳐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아아.. 그때의 감격이란 아인슈타인이 상대성 이론을 발견했던 순간 느꼈던 감동에 필적하는 것이자, 윤봉길 의사의 도시락 폭탄이 터지던 그 순간의 전율이 아니고 무엇이었으랴.
자, 이제 그날의 발자취를 찬찬히 따라가 보자. 우선 가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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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산타할아버지는 알고 계신대 누가 착한 앤지 나쁜 앤지 오늘밤에 다녀 가신대
잠잘 때나 일어날 때 짜증낼 때 장난할 때도 산타할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계신대
울면 안돼 울면 안돼 산타할아버지는 우는 아이에겐 선물을 안 주신대 |
너무나 유명한 곡이라 더 이상의 설명이 필요 없을 듯 하지만 그 가사를 자세히 살펴보면 산타의 그릇되고 전근대적인 아동 가치관이 고스란히 내포돼 있음을 쉽게 발견 할 수 있다.
별생각 없이 이 노래를 접했던 독자들 가운데도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분들은 벌써 몇가지 거슬리는 점을 발견했으리라 믿는다.
산타 분석에 앞서 노래 가사의 전반적인 성향을 살펴보면 동요에선 일반적으로 금기시되는 부정적인 어법을 사용하고있다.
'울면 안돼'를 반복하며 시작된 부정적 표현은 후렴마저 '~선물을 안 주신대'로 끝남으로서 '울어도 안되고, 더군다나 선물도 안주는' 완벽한 논리적 부정의 대칭구조(?)를 이루고 있다.
이렇게 네가티브한 곡에 노출된 아이들 특히 여자 아이의 경우에는 어법이 자칫 '먹어도 안되지만, 살도 안 빠지는'식의 이중부정적 사고에 젖을 수 있어 심히 우려된다.
이제 어린아이들에 대한 산타의 가치관을 살펴보자.
가사를 찬찬히 살펴 볼 때 산타는 착한 아이에게(만) 선물을 준다. 나쁜아이도 아니고 착한아이에게 선물을 주는 거니까.. 뭐, 그런대로 납득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이를 가늠하는 '기준'에 있다.
산타 할아버지가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를 구별하는 유일무이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은 오직 '울음'이다. 즉, <우는 아이 = 나쁜 아이>라는 도식이 성립하는 것이다. 울지 않아야만 착한 아이라 할 수있으며, 울지 않아야만 산타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울었으냐, 울지않았느냐'라는 잣대로 아이들을 착한 아이와 나쁜 아이로 결정하는데 이러한 분류법은 최근 그 문제점이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는 수능시험보다 더욱 고도화된 획일적 잣대로서 그 대상이 되는 아이들의 다양한 측면들이 평가에 전혀 반영되고 있지 않는 것이다.
수능시험은 그나마 수리영역, 언어영역 등 몇가지 영역으로 나뉘어 여러 측면으로 대상을 평가하려는 노력을 하지만 우리의 산타는 오직 한가지, '울음'이라는 기준으로 아이들을 분류하는 만행을 저지르고 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아이들이 중심이 아닌 평가자인 산타의 편의 위주로 만들어진 평가기준인 것이다.
울음이 나쁜가?, 운다는 것은 죄악인가?, 우는 아이는 나쁜아이인가?
알프레드 드 뮈쎄는 <슬픔>이란 글에서 '지상에 남은 내 단 하나의 선함이란, 이따금 울었다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더군다나 정서적으로 건강한 아이는 잘 웃고, 잘 우는 아이다. 웃음이 건강에 좋은 것 만큼이나 울음 역시 스트레스를 해소해주는 '영혼의 환기작용'인 것이다.
아이들의 울음은 나쁘고, 울어선 안된다고 강요하는 건 그것을 귀찮고 성가신 소음정도로 여기는 감성적 장애를 갖고 있는 어른들의 그릇된 일방주의이며 몇 푼 되지도 않는 선물상자로 아이의 감수성을 좌지우지하려는 물질만능주의라 아니할 수 없겠다.
고로 이토록 인격적으로 불안정한 산타 클로즈를 연말연시 어린이들의 친구로 방치한다는 것은 아이들이 자유롭게 자라날 환경을 만들어주어야 할 의무를 지닌 어른으로서 직무유기이며 어쩌면 유아지향성변태성욕자를 유치원에 풀어 놓는 일 만큼이나 위험할 수도 있는 일임을 상기해야 할 것이다.
선물을 못받은 것이 아니라 어른들의 그릇된 가치관을 거부했었던 거였던
노레스트 (딴지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