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모든 여자는 창녀다?
얼마 전 조선일보 기자가 했다는 접대부 발언이 문제가 되고 있다. 어느 분의 말대로, 난 그가 술을 처먹고 썼는지, 제 정신에 썼는지 알지 못한다. 그저, 굉장히 격한 상태, 즉 속에서 솟구치는 충동을 제대로 제어하기 힘든 상태에서 쓴 게 아닌가, 하고 짐작할 따름이다.
왜냐하면 만약에 그가 평온을 유지한, 제 정신 상태였다면, 그 발언이 낳을 파장을 염려해 감히 여자 아나운서가 접대부와 같다는 발언을 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비록 그의 제 정신에는 아나운서가 접대부라는 생각은 고스란히 남아있겠지만 말이다. 즉, 그는 그저 실수를 한 것이다. 그는 그 실수를 통탄하며 이렇게 투덜거릴지도 모르겠다.
“난 그저 아나운서를 봤을 때 접대부와 똑같다는 느낌을 받았을 뿐인데, 왜 저에게 아나운서가 어떻게 접대부냐고 물으시면, 머리 속에서 그저 접대부와 똑같았다는 느낌이 들어 그리 한 것 뿐, 어째서 그렇다는 건…….”
그리고 바로 그 전에는 밀양에서 벌어진 집단강간사건이 우리들을 충격과 분노로 몰아넣었다. 이 사회에 대해 분노하는 능력밖에 갖지 못한 소시민의 한 사람으로써 나는, 도대체 그 고등학생들의 눈에 그 어린 여학생들이 무엇으로 보였을까 하는 생각에 이르자, 이 사회가 정말 잘못 됐어도 많이 잘못 됐다는 걸 절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눈엔, 그 여학생들이 포르노에 나오는 정액받이, 그 이상이 아니었다.
이건 그들이 포르노를 많이 보고, 잘못된 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혹은 인간성이 파탄 났기 때문에 그런 것이 아니다. 위의 조선 직원이 여자 아나운서를 접대부로 본 것이나, 고등학생들이 여학생을 정액받이로 취급한 것이나, 본질적으로는 대동소이하다. 차이가 있다면 환경에 따른 문화적 차이일 뿐이다.
조선일보 기자는 자신의 사회 환경에 걸맞게 모든 여자가 룸싸롱 접대부로 보인 것이고, 밀양의 고등학생들은 자신들의 문화에 걸맞게 작고 힘없는 여자애들이 정액받이로 보인 것이다.
즉, 모든 여자가 창녀로 보인 것이다. 그렇다, 모든 여자는 창녀다. 왜냐하면 우리 사회가 완강하고도 끈질기게 여자들의 자리를 창녀로 묶어두길 고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를 비롯해 이 사회의 남자들은 절대 이 문제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사회가 여자들의 자리를 창녀로 묶어둔다니,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언제 우리 사회가 여자들을 집장촌으로 밀어 넣기라도 했단 말인가? 오히려 지금 꺼내주고 있지 않은가? 내가 언제 여자를 창녀 취급이라도 했단 말인가?
내가 보기에는 우리 사회 남자들이 여자들을 창녀로 취급하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최소한 여자들을 성적 대상으로만 바라본다. 자신의 의도와 상관없이 그렇게 보인다.
이 말은 그윽하게 여자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 그 시선을 발사시킨 나의 인식이 이 사회 권력관계의 자장 안에 있어 절대 그윽하게 유지될 수 없다는 걸 뜻한다. 우리 시선을 규정하는 인식과 권력의 문제, 그렇다. 이건 권력의 문제이다. 권력이 단순한 억압이 아니라 구성원들의 자발적, 묵시적, 무의식적 동의에 의해 작동된다는 사실이 지적된 것도 벌써 오래전이다.
여자가 창녀로 보이는 것은 이 권력 작동의 효과다. 우리는 매순간 여기에 참여하고 있다. (그러므로 모두 뭐 잡고 반성하자는 얘기는 아니다. 말이 나와서 하는 말인데, 모두 반성하자는 말은, 주소가 잘못 적힌 편지와 같다. 정작 필요한 놈들에게는 전해지지 않는다)
따라서 이 글은 이 글을 촉발시킨 분노와 어울리지 않게 굉장히 ‘관념적’이고 난삽할 것이다. 소위 ‘카프카적 상황’을 연상시킨다. 어떤 소심한 물리학자가 물을 마시려고 자기 방문을 나서 부엌으로 가려고 하는데, 생각해보니 자기가 부엌으로 가기 위해선 이리 저리 자전과 공전을 하고 있는 지구의 엄청난 속도를 뚫고 방문을 통과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그가 자신이 내야할 속도를 계산해보고 나서 물마시기를 포기했는지, 아니면 문틀에 부딪혀 죽었는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알고 있는 건, 그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더라도 최선을 다해 뛰었더라면 물을 먹을 수 있었을 거라는 사실이다. 여기서 중요한 건 최선을 다해 뛸 때에만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천천히 갈 요량이면 시도 자체가 성립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작 어려운 점은 이 글이 지극히 남성적인 시각에서 남성적인 언어로밖에 쓰여질 수 없다는 점이다. 어디 여성뿐이겠는가. 사회적 소수자의 어려움은 자신들의 언어를 갖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건 개혁의 어려움으로 통하고, 역으로 서프의 필요성을 증대시킨다.
2. 강간의 왕국
‘강간의 왕국’이라는 말은, 「살인의 추억」에서 송강호가 이단 옆차기로 뛰어 오르면서 내뱉은 말이다. 일설에 의하면 이 대사는 즉석에서 이루어 졌다는데, 아마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행위를 지적하려다 보니 동물의 왕국을 빗대서 그 말이 나온 것 같다.
그 인간으로서는 도저히 저지를 수 없는 행위를 오직 인간만이 저지른다. 강간만이 아니라 모든 흉악범죄는 오직 인간만이 저지른다. 그럼 이러한 행위는 본능적인 것일까, 아니면 문화적인 것일까?
인간을 제외한 다른 동물들은 같은 종끼리 권력다툼을 벌일 땐 사냥할 때와 다르게 상대에게 치명적인 위해를 가할 수 있는 무기는 사용하지 않는다고 한다. 종족을 보존해야하는 본능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인간은? 권력을 위해 집단학살하는 인간도 있다. 그 새끼처럼. 그럼 다시 이런 권력에의 의지는 본능적일까, 문화적일까? 딱 잘라 구분할 수 없다. 한 가지 분명한 건, 본능적인 권력에의 의지를 바탕으로 인간은 문화라는 걸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인간의 성적특성을 말할 때도 마찬가지다.
예를 들어, 「살인의 추억」의 소재가 된 화성연쇄살인범의 경우, 그가 느낀 쾌감은 정확히 성적 쾌감이 아니라 권력적 쾌감이다. 그 놈은 연약한 여자가 극도의 공포감을 느끼며 절절매는 것을 보면서 극도의 쾌감과 흥분 속에 자신이 전지전능한 신의 자리로 올라서는 착각을 하는 것이다. 물론 이건 너무 끔찍한 예지만, 이런 힘이 팽창하는 쾌감과 연결된 권력의지가 인간의 문화의 바탕을 이룬다는 것은 분명하다.

“강간범들, 밥은 먹고 다니냐”
아무리 수준 높은 문화를 구가하는 사회라 할지라도 인간의 성적특성을 바꿀 순 없다. 그건 성적특성이 수준 높은 문화를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어떤 동물학자는 이걸 이런 식으로 표현한다. “인간의 문명은 생물학적 진화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을 정도의 속도로 급격하게 이루어졌다.” 즉, 지금의 문화는 권력투쟁의 결과다.
간단히 말해서 인간이 이룩한 찬란한 문명이라는 건 야만의 앞면일 뿐이다. 어떤 이는, 역사의 장면 장면마다 떼 지어 널부러져 있는 시체더미위에 세워진 문명이란 승리자가 부르는 이름일 뿐이라고 갈파했다.
소위 인간성을 비롯한 인간적인 모든 것은 자연적인 것도, 그렇다고 이성적인 것도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권력적이다. 바로 ‘권력의지’의 역학 관계에 따라서 인간 세상은 구성되고 각각의 의미가 배분된다
3. 여자가 더 섹스를 좋아한다?
멍청한 질문으로 얘기를 시작해보자. 사랑하는 두 남녀가 섹스를 했다. 누가 더 쾌락을 느꼈을까? 정말 멍청한 질문이 아닐 수 없다. 그럼 이렇게 질문해 보자. 사랑하는 두 남녀가 섹스를 해서 모두 오르가즘을 느꼈다. 누가 ‘감각적인 쾌락’을 더 많이 느꼈을까? 역시 멍청한 질문이다. 그건 개인마다 다르고, 할 때마다 상황마다 다르고, 그 느낌을 수치로 표현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럼 더 멍청하게 ‘평균적으로 봤을 때’ 남자와 여자 중 누가 더 ‘감각적 쾌락’을 많이 느낄 것 같은가? 남자는 여자가 더 그럴 것 이라고 말하고, 여자는 남자가 더 그럴 것 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예전에도 이런 멍청한 논란이 있었는지, 그리스 신화에 보면 제우스와 헤라가 이 문제 가지고 싸우는 장면이 나온다.
인간보다 월등히 유치한 이 그리스 신들은, 그럼 여자로도 살아본 적이 있고 남자로도 살아본 적이 있는 어떤 사람에게 물어보자는 결정을 내린다. 그 사람 왈. “제가 경험한 것을 한 치의 거짓도 보태지 않고 말씀드리건대, 여자가 남자보다 아홉 배는 더 쾌감을 얻습니다.”
(헤라는 이 말에 열 받아서 그를 장님으로 만들어 버리고, 제우스는 미안해서 그에게 위대한 예언의 능력을 준다. 그가 바로 외디푸스왕에도 나오는 유명한 장님 예언가 테이레시아스다)
최소한 여자가 남자보다 더 쾌감을 얻는다? 그런데, 왜 남자는 섹스를 못해서 안달을 하고, 여자는 되도록이면 피하려고 애를 쓰는가? 보통 남자가 섹스에 더 적극적이고 여자는 수동적이다. 왜 그런가? 내숭인가? 순결 강박인가? 아니면 여자는 ‘원래’ 수동적인 존재여서?
내 생각은 만약 감각적 쾌감을 수치로 잴 수 있다면, 평균적으로 여자가 더 많이 얻을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출산에 대한 염려를 불식시켜야만 하는 생물학적 작용까지 고려하면 신화에 나오는 말이 그럴 듯하다. 하지만 이게 남자가 적극적이고 여자가 소극적인 모습과 부딪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남자는 섹스를 통해 감각적 쾌락과는 다른 무엇을 더 얻기 때문이다.
그건 바로 여자의 ‘감각적 쾌락’과 대비해서 아까 ‘권력적 쾌락’이라고 이름 붙였던 그 무엇이다. 비록 감각적으로는 남자가 여자에 비해 얻는 게 적지만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다란 권력적 쾌락을 남자는 섹스를 통해서 얻는다. 그래서 그 ‘지랄들’을 한다.
이 가설은 여러 가지 장면을 통해 그럴싸함을 확인할 수 있다. 예를 들어, 결혼한 후 일정한 시기가 지나면 남자들은 지명방어전이다 뭐다 하면서 마치 섹스에 초월한 척 그야말로 내숭을 떨면서 뒷구멍으로는 어떻게 껀수 하나 만들어 보려고 애를 쓴다. 아내를 사랑한다면서도 그런다. (그렇다, 남자들은 섹스와 사랑이 분리되어 있다)
왜 다시 그 ‘지랄들’을 할까? 답은 당연히 아내보다는 다른 여자가 ‘권력적 쾌락’을 더 많이 제공하기 때문이다. 프로이트는 이런 남자들의 속성(?)을 다음과 같은 농담으로 표현했다. “글쎄, 내가 아는 어떤 사람 중엔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바보도 있다네.”
‘권력적 쾌락’을 쫒아 2차를 갔다가 혹시 아내에게 걸리기라도 하면 남자들은 항변한다. 그건 단지 비즈니스일 뿐이라고. 이게 그저 남자들의 구질구질한 변명 같은가?
이건 단순한 변명이 아니다. 남자들은 정말 그렇게 믿고 싶어 한다. 그건 2차가 접대하고 접대받는 공적 생활의 연장에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에 비즈니스라고 하는 걸 넘어서 공적 생활 자체가 남자들의 ‘권력적 쾌락’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 남자들에게 섹스는 비즈니스다)
결혼을 하지 않은 젊은 커플들을 예로 들면, ‘권력적 쾌락’과 ‘감각적 쾌락’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진다. 대부분의 여자들은 사랑하는 내 남자가 너무 강렬히 원하니까 그 사랑의 표시로 섹스를 하지만 섹스만을 통해서 얻는 ‘감각적 쾌락’은 미미할 정도이다. 그건 호로몬 분비가 상대적으로 적은 생물학적 이유와 함께, 감당하기 힘든 ‘권력적 쾌락’에 휩싸인 남자가 너무 빨리 일을 끝내는 수가 다반사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여자가 만족을 못 느낀다는 얘기는 아니다. 대부분은 그렇겠지만 오르가즘을 맛 볼 가능성도 있다. 왜냐하면 여자의 경우는 섹스를 통해서 라기 보다는 사랑을 통해서 오르가즘을 맛보기 때문이다. 남자는 앞서 말했듯 사랑과 섹스가 분리되어 있기 때문에 사랑을 통해서 오르가즘을 느끼기가 굉장히 어렵지만 여자는 섹스와 사랑이 통합되어 있기 때문에 비록 ‘감각적 쾌락’이 형편없이 부족하더라도 만족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고 위에서 눌러서 헉헉대는 걸 좋아서 그러는 것으로 오해하지 말자)
(그렇다. 여자는 남자처럼 그렇게 섹스와 사랑이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리고 거기에 따라서 여자의 ‘감각적 쾌락’이라는 건 집중되어 있지 않고 분산되어 있다. 반면, 남자는 섹스와 사랑이 분리된 상태에서 ‘권력적 쾌락’마저 한 곳에 집중되어 있다)
그럼 한 번 단도직입적으로 물어보자. 강간은 성관계인가, 아니면 일방적 폭력인가? 앞서 살펴본 대로, 서로 사랑하는 남녀의 경우에도 한쪽은 성기에 집중된 섹스를 하고, 한쪽은 자신의 전체로 사랑을 함으로써 “성관계가 없는데” 하물며 강간을 성관계라 주장한다면, 이런 사람을 뭐라고 불러야 하는가? 미친놈일까? 정상일까?
정답은 물론 정상이다. 왜 그런 미친 주장이 정상이 되는지. 왜 그런 의미와 가치의 전도가 일어나는지 천천히 둘러보자.
4. 어머니는 위대하다?
여자들에 관한 이야기는 수도 없이 많을 것이다. 너무 많아서 그런지 얼핏 생각이 안 나는데, 가령 이런 말들이 흔히 떠돈다. 여자는 쓸데없이 말이 많다. 여자는 분위기에 약하다. 여자는 도저히 속을 모르겠다. 여자는 북어와 함께…, 여자는 수동적이다 등등. 어떤가, 맞는 말 같은가? 이걸 한 마디로 뭉뚱그리면, ‘여자는 주체적이지 못하다’가 된다. 위의 말들은 주체적이지 못한 여자들의 변주된 모양이다.
여기서 잠깐 주체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성립하는지 아주 간단하게 기술해보자. 주체는, 사물 대신 상징(언어)를, (어머니에 대한) 사랑 대신 (거세 위협 아래) 도덕을, 더 확대하면 육체, 감각, 놀이 대신 정신, 이성, 노동을 즉, (너무 너무 충만했던) 앞의 것들을 억압하고 (뼈대만 남은) 뒤의 것들을 ‘필요’에 의해 취함으로써 주체가 된다. 그런데, 억압은 완전하지 않고 승화는 불충분해 주체는 항상 욕망하는 주체가 된다.
아까 나는 남자는 사랑과 섹스가 분리됐고, 여자는 통합되어 있다는 말을 했다. 아울러 남자는 섹스를 통해 권력적 쾌락을 얻고, 여자는 사랑을 통해 감각적 쾌락을 얻는다고도 했다. 그럼 이걸 ‘주체화 과정(외디푸스화)’에 대입해 보면, 여자는 주체화 이전의 미분화된 존재임이 드러나고 남자만이 승화에 성공한 주체란 걸 알 수 있다. 자연적인 성은 두개지만 사회적인 성은 남성 하나 밖에 없다.
즉, 분화되지 못한 여자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언어, 이성, 도덕을 갖지 못하고 ‘주체’인 남성들에 의해 사회적 위치를 할당받고 존재의 의미를 부여 받는다. 그 사회적 위치는 바로 가족이라는 울타리에 갇힌 ‘사적 영역’이고 그 존재의 의미는 다름 아닌 ‘성적 대상’이다.
그래서 여자는 오로지 성적 존재로서 두 가지 이미지로 대변된다. 하나는 창녀이고 다른 하나는 어머니이다. 창녀는 여기서 쾌락적인 성을 대표한다. 찰나적이고 경박하고 소모적이며 믿을 수 없는, 타기할 만한 성, 반면 어머니의 성은 신성한 ‘생산’에 이바지 하는 성을 대표한다.
즉, 같은 성적 존재라도 생산적인 성을 담당하는 어머니는 거룩해지고, 소모적인 성을 대표하는 창녀는 하수구 취급을 받는다. (거룩한 어머니의 역할이 중단될 때는 곧바로 요부, 곧 창녀 같은 아내로 돌아가야 한다)
‘어머니는 위대하다’라는 말이 있다. 어머니가 도대체 왜 위대한가? 나를 낳고 길러주셨기 때문에. 그렇다. 나라는 ‘주체’를 ‘생산’하고 주체를 위해 ‘헌신’ 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좀 더 풀어 말하면, 어머니의 모성(여성성)이 그 자체 위대한 것이 아니라 생산과 헌신이라는 ‘남성적 가치’를 실현했기 때문에 위대한 것이다. 이런 말을 누가 하는가? 당연히 ‘나’라는 ‘주체’가 한다. (무엇을 말하는 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누가 말하는 가가 중요하다)
고로, 성적 존재로서의 여자가 가질 수 있는 최상의 가치는 외모밖에 없다. 과거가 있는 여자는 용서해도 못생긴 여자는 용서가 안 되는 것이다. 외모가 여자의 유일한 가치이다. 그건 여자가 개인적으로도 미분화된 존재일 뿐만 아니라 시대적으로도 미분화된, 즉 전근대적 존재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근대를 통과하지 못한 여자에겐 ‘내면’이 없다. 내면을 가지지 못한 존재가 무슨 개인적인 생각이 있겠는가? 내면이든, 개인이든 모두 근대의 산물이거늘. 우리는 여기서 위에서 말한 주체화 과정이 근대화과정의 다른 이름임을 알 수 있다.
즉, 주체화(외디푸스화) 과정이란 근대사회가 요구하는 사회화과정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5. 여자는 비즈니스를 해도 섹스다?
‘근대 이전에도 여자들은 그런 취급 받았는데요?’ 하고 질문이 나올 것 같다. 맞다. 근대 이전에는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도 그것이다. 무슨 말인가 하면, 전도가 일어나는 지점은 정확히 여자들은 근대이전의 미분화된 존재로 남겨놓고, 남성들이 자신들을 근대적 주체로 새롭게 태어났다고 오해하는 곳에서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 오해의 근거가 무엇인가 하면, 자신들은 ‘사회적 생산’을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이 모든 걸, 자기 안의 자연까지 대상화하고 변형시켜 뭔가를 만들어내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생산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여기서 근대의 역설이 발생한다. 자신들이 근대적 주체라고 내세우는 근거가 되는 뭔가를 생산하는 능력이 고스란히 자본으로 이양되는 것이다.
여기서 자본주의화에 따른 근대화 과정을 길게 서술할 수는 없지만, 아예 서술하지 않을 수도 없다. 아주 간단하게 근대화의 과정을 말한다면, 근대화란 기존의 지역공동체 대신 시장이 생산-교환의 중심을 이루면서 그 시장을 관리할 (근대)국가가 출현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시장과 국가에 걸쳐 거대한 공공-공적 영역이 출현하고 거기에 따라 새로운 정치체계와 법체계를 비롯해 여러 사회적 제도가 구비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젠 남성들이 자신들을 주체로 내세우는 진짜 이유를 알 수 있다. 그건 바로 공공영역을 독차지하기 위해서이다. 합리적인 이성을 바탕으로 한 정신적인 주체, 자유롭게 행동하고 그 행동에 책임을 지는 도덕적인 주체, 그런데 그 주체는 스스로를 긍정함으로써 그런 모양을 띠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자신의 대립항목들을 부정하고 타기하고 배제함으로써 유지된다.
이른바, 여성적인 것, 곧 성적인 것. 미분화되고 물질적이고 비생산적이고 믿을 수 없는 욕망 덩어리를 부정해야한 주체의 가오가 서는 것이다. 이렇게 공적 남성 주체/사적 여성 성적존재가 분할된 상태에서는, 앞서 잠깐 말한대로, 똑같은 성관계를 해도 남자에겐 사회적 생산에 복무하는 비즈니스고, 여자에겐 쾌락을 위한 성행위다. 즉 남자는 섹스를 해도 비즈니스고, 여자는 비즈니스를 해도 섹스가 된다.
(여자가 술집에서 웃음을 팔던, 몸을 팔던, 영혼을 팔던 이건 명백히 공적 매매행위다. 남자들이 노동력을 팔고, 간혹 사주에게 영혼은 물론이고 전 존재를 파는 행위와 똑같다는 말이다. 하지만 여자는 사적영역에 묶어둬야 하는 존재기 때문에 그 행위는 사회적 생산이 아니라 개인적인 속성에서 기인한, 즉 끼가 많아서, 혹은 밝혀서 하는 행위로 그 의미가 둔갑한다)
이게 가증스러운 자본주의 사회의 일반적인 성 구도이다. 그 가증스러움은 소위 도덕적이고 이성적인 주체가 여성적인 것을 극복했다고 생각하고 또한 그걸 대단하다고 여기는 허황되고 기만적인 믿음에서 발원한다. 쾌락, 성, 여성적인 것으로 매도되는 것은 극복될 수 있는 게 아니다. 오히려 남자들이 이성과 도덕을 무기로 사회적 생산에 임하는 모습이 이런 것들을 탐하는 권력의지의 현상인 것이다.
그런데, 잘 알다시피 우리 사회의 근대는 자본주의화에 따른 근대화가 아니라 근대화에 따른 자본주의화였다. 국가가 주도해서 근대화를 이룬 ‘덕분에’, 우린 시민 사회가 담당해야 할 공공영역이 배제된 모래시계 모양 사회가 된 것이다. 즉, 이름만 공화국이고, 그 안을 채워야 할 내용이 뭉텅이로 빠져있어, 사람들은 자신들이 누군지도 모른다.
근대화 과정이 왜곡되다 보니 주체화 과정을 통해 얻어내야 할 항목, 주체, 내면, 개인, 개성, 도덕, 이성등 시민 사회를 이루어가야 할 필수 항목들이 누락되어 있는 것이다. 즉 주체화과정을 통해 가상적으로나마 서있어야 할 이성과 도덕의 미비로 말미암아 ‘위선을 발휘할 능력’마저 빼앗겨버린 것이다.
그 항목들이 사회적으로 누락되어 있는데, 여자들에게만 누락되어 있다고 뒤집어씌우는 것,
그래서 되도록이면 현 체제를 길게 유지해 나가고자 하는 것, 이 차별을 통한 지배전략에 대부분의 남자들이 즐겁게 동조하는 것, 그리고 공동체의 붕괴와 시민 영역의 미비로 여성들조차 믿을 건 가족밖에 없다는 ‘가족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있다는 것. 그래서 남성들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는 데 근거로 이용된다는 것. 이것들이 대충 성차별 문제의 정치적 함의가 아닌가 한다.
6.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이끈다?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이끈다는 말은 괴테가 한 유명한 말이다. 여기엔 사실 남성적 권력의지에 의해 갈갈이 찢겨 싸우는 세상을 통합하고 치유하는 여성성에 대한 무한한 경외가 포함되어 있다.
그런데 언제나 그렇듯이 모든 위대한 사상은 속화되어 이용되는 운명을 겪는다. 니체의 ‘권력의지’가 나찌에 의해 오용되고, 이반 까라마조프의 생각이 스메르쟈코프에 의해 실행되듯이.
이 말도 마찬가지다. 자칫 잘못하면, 현실에서 벌어지는 고통과 부조리의 문제를 상징적인 차원에서 해소하고 할 일 다 했다는 ‘교양인’의 태도를 낳기 쉽다. 이 때 필요한 것이 난 기본적으로 계급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문제를 계급으로 환원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성차별뿐만 아니라 지역차별, 학벌차별 등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는 모두 계급의 문제고 지배 세력의 통치 전략의 문제라는 것이다.
솔직히 말해보자. 우리 사회의 여자와 남자 중 누가 더 공사 구분을 잘 하는가? 누가 더 원칙을 잘 지키는가? 어느 재벌회사 이사가 언젠가 이런 말을 했다. 여자들은 자기들이 요구하는 업무능력이 떨어진다고. 어련하겠는가.
그 능력이라는 것이 말 그대로 실력이 아니라 접대 능력, 조직에서 인맥 형성하는 능력, 접대를 통한 부패 적응 능력, 집 같은 건 도외시하고 조직에 헌신하는 능력을 의미하니까, 여자는 영원히 그런 능력을 발휘하느라 스트레스 ‘이빠이’ 받은 남자들을 위무하는 능력만 발휘하게 되는 위치에 앉아 있는 것 아닌가.
아무리 너그럽게 생각해도, 현재 우리 사회에서 공사구분을 잘하고 상식과 원칙을 지키며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이 능력 있다는 평가를 받기는 힘들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진 뛰어난 사람들이 어디든 있기 마련이지만, 원칙을 지키는 게 무슨 ‘고귀함’도 아닌데 언제까지 원칙을 지키는 것을 힘들고도 드문 상태로 둬야 하겠는가.
이런 상황에서 여자들이 갈 곳은 결혼밖에 없다. 결혼 잘 하는 것이 주체적 삶을 사는 유일한 방법이라는 어거지 말이 성립할 지경이다. “난 노예적 삶을 주체적으로 결정했다. 남편이 뭘 하건 돈만 많이 가져오면 된다. 난 남편과 상관없이 소비의 주체로 살면 그만이니까.”
분명 여성들이 이 사회를 위해서나 자신을 위해서나, 소비의 주체로 사는 것보다는 생산의 주체로 서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런데 주체로 서기 위해서는 좀 가혹하게 보일지는 모르지만 결혼이 아니라 전혀 다른 과정을 거쳐야 한다. 물론 이건 여성들에게만 해당되는 얘기는 아니다.
그건 바로 ‘존재의 긍정’이라는 과정이다. 이건 영원히 여성적인 것이 세상을 이끌어야 하는 소명(?) 과 통하는 얘기다. 무슨 말인가 하면, 남성에 의해 낙인찍힌 성적존재라는 레떼르를 똑같이 부정하면 안 된다는 것이다.
아까 여자는 감각적 쾌락, 성적 존재 고로 열등한 존재로 낙인 찍혔다. 그런데 그것들이 남성들이 규정한 대로 진짜 열등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긍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그것들이 열등한 것이 아니라는 평가와 함께 긍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즉 가치의 전도가 다시 일어나면서 긍정이 되는 것이지, 가치의 전도 없이 긍정한다는 것은 우선 말이 성립되지 않는다. 그건 여성이 남성보다 열등한, 뭐냐, 거세당한 남성이라는 것을 긍정한다는 것인데, 열등한 것은 긍정될 수가 없는 것이다.
남성이 부정하는 쾌락이, 여성이, 성적 존재가 그들이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정신 혹은 이성 혹은 주체보다 우월하다는 것, 오히려 그것들은 파생적인 것이고 여성적인 것이 근본적이라는 평가와 함께 긍정할 수가 있는 것이다. 애초에 왜 여성적 가치가 열등한 것으로 낙인 찍혔는가? 인간의 문화라는 게 남성적 권력의지에 의해 축조되어서 그런 것 아닌가?
그럼 니체를 오용해서 한 번 따져보자. (오늘 니체 자주 나온다. 사실은 전체에 걸쳐 흐르고 있다고 하는 게 맞을 것이다. 가장 ‘반여성적’이라고 평가받는 니체를 통해 여성에 대한 얘기를 하고 있다니) 우월함과 열등함. 다시 말해 잘난 존재와 못난 존재는 긍정과 부정으로 구분된다.
즉, 그것은 존재의 질을 가리키는 표현들이다. 반면에 힘이 센 것과 힘이 약한 것, 곧 강함과 약함은 능동과 수동으로 구분된다. 그것들은 힘의 형태를 나타내는 것들이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힘의 형태가 존재의 질을 규정할 수 없다는 점이다. 언제나 존재의 질이 힘의 형태를 규정한다. 즉 힘이 강하다고 잘난 게 아니라는 것이다. 힘만 세고 못난 것, 우린 그걸 괴물이라고 한다.
그럼 한 번 보자. 남자가 노련한 척 하면서 여자들을 열등한 존재로 모는 근거가, 자기들은 생산하는 주체라는 것이다. 그 사회적 생산 능력이 자신을 잘나게 한다는 것이다.
좋다. 일단 그 힘은 능동적이라고 할 수 있다. 부정하고 배제하고 착취하는 힘, 착취하고 착취해서 더 힘이 붙고 그만큼 더 잘난 체하고. (브레히트의 말대로, “남자는 노련한 척 하는 동물이다”) 그런데, 그건 말 그대로 잘난 체 하는 것이지 진짜 잘남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의 질 자체가 부정이기 때문이다.
진짜 잘남은 다른 걸 착취하지 않는다. 긍정은 다른 것에 ‘대해서’ 서 있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서있는 존재의 질에 대한 표현이다. (석가모니의 ‘천상천하 유아독존’이 이런 뜻 아닐까)
너무 거창한가? 그런 것 같다. 그래도 마무리는 해야 하니까. 그럼, 자신을 긍정하는 여성적 주체의 존재 방식은 어떻게 될까? 이 야만적인 문화에서. 최소한 남성적 주체처럼 자신의 못남을 보상받기 위해 다른 대상을 착취하는 형태가 아닌, 착취를 통하지 않고 생산하는 그런 방식이 될 것이다. 예전에 김현이 자주 그랬다. ‘문학은 억압하지 않는다’고. (그렇다고 문학하라는 얘기 아니다.)
억압하지 않고 영향력을 끼치는 행위. 그게 뭘까? 니체는 “인간은 극복되어야 할 그 무엇이다”라고 외치면서 예술을 염두에 둔 것 같은데, 난 정반대로 사랑을 염두에 둔다.
사랑. 고작? 그렇다. 사랑으로 남성적 권력의지에 터 잡고 있는 문화가 극복되지는 못하겠지만, 거기서 파생되는 엄청난 고통을 완화시킬 수는 있기 때문이다. 고로, 남자들이여, 사랑할 능력이 모자라거든 최소한 지속적인 위선의 능력을 보여 달라. 소통의 수준을 조금이라도 높여야 하지 않겠는가. ⓒ jamin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