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지식] 광주 민주화 항쟁
정치/경제 2004/05/18 11:44   http://blog.azoomma.com/richard/130175

마음의 풍경님께서 알고 싶다고 하셨고, 아래 동영상과 연관되는 내용이기에 옮겨 봅니다.

밝혀지게 된 배경
1980년 5월 광주광역시를 중심으로 일어난 시민들의 민주화항쟁. 88년 <여소야대(與小野大)>의 정국판도 아래 '광주민주화 항쟁에 대한 청문회'가 도입되면서 진상이 밝혀지기 시작했다.

민주화 항쟁의 배경
1979년 10·26사태 직후의 혼란기를 한고비 넘긴 80년 5월. 대학생들은 참된 민주화를 실현하고자 <계엄철폐> <유신세력척결>을 외치면서 본격적인 시위로 돌입하였다.

15일 서울역광장에서 학생 10만 명이 모여 시위를 한 다음날, 서울시내 24개 대학 학생대표들은 교내 및 가두시위를 일시 중단하고 시국 추이를 관망하면서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자는 데 합의하였다.

광주 역시 16일, 3만 명의 학생·시민이 도청 앞에서 횃불시위를 한 뒤 정부답변을 기다리며 각자의 일에 전념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정부당국은 18일 0시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에 확대시켰다. 계엄확대발표직전 서울에서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16일부터 이튿날까지 계속된 전국대학총학생회장단회의에 참석한 학생들 대부분이 연행되고 김대중(金大中)을 비롯한 26명의 재야인사와 김종필(金鍾泌) 등 정치인들이 체포되었으며 김영삼(金泳三)은 가택연금되었다. 광주에서도 시위의 주도적 인물들이 연행되면서 상황은 급박해지기 시작했다.


상황의 전개
전국 각 대학에 휴교령이 선포된 5월 18일 아침, 전남대학교 학생 200여 명은 교내로 들어가려다 이미 주둔하고 있던 계엄군과 투석전을 벌였다.

부상당한 학생들이 금남로(錦南路)로 몰려가자 흥분한 시민들이 합세하여 연좌시위를 벌였고, 계엄군의 진압으로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19일 시위대 수가 5000여 명으로 불어나자 계엄군은 장갑차를 앞세우고 곤봉과 착검소총으로 시위대를 진압하였으며, 관공서와 공공건물이 폐쇄되는 등 삼엄한 경비가 펼쳐졌다.

20일 오후 시내 중심가에는 3만여 명이 연좌농성을 벌였으며 밤에는 20만 명에 육박하는 시민들이 군경저지선을 뚫고 시청건물을 장악하였다. 이 과정에서 파출소와 방송국이 파괴 또는 방화되었으며, 계엄군에 의해 시외전화가 두절되어 광주는 고립되었다.

이날 밤 11시 도청방어가 위태롭다고 판단한 계엄군은 마침내 발포를 개시하였으며, 21일 오후 1시 무렵 계엄군의 총격으로 54명이 사망했다.

30만 명으로 불어난 시위군중은 아세아자동차공장에서 대형버스·장갑차 등 80여 대의 차량을 몰고 도청의 군경저지선 돌파를 시도하였으나 기관총에 막혀 희생자만 늘어났다.

<시민군>은 급기야 경찰서를 습격하여 무장하였고, 계엄군과 총격전에 들어가 마침내 도청을 점거하였다.

계엄사령부는 이날 처음으로 <서울을 이탈한 시위주동학생 및 깡패들이 대거 광주에 내려가 유언비어를 날조 유포하여 발생한 사태로, 현재까지 민간인 1명, 군경 5명이 사망하였다>고 발표하였다.

시내를 장악한 시위군중은 22일부터 <5·18사태수습대책위원회>를 결성하고 계엄군측과 협상을 시도하였으며, 무기·차량 회수를 시작하고 사망자 신원을 확인하였다.

26일 새벽 계엄군이 시내로 재진입하여 무기를 반납하지 않으면 공격한다는 최후통첩을 내렸다.

자정을 기해 계엄군이 대대적 무력진압을 개시하자 오전 5시 무렵 도청의 잔여 시민군은 투항했으나, 빌딩에 배치되었던 20여 명의 시민군들은 끝까지 싸우다 오후 2시 무렵 전원 사살되었다.


피해·조치
85년 6월 7일 정부는 사망자 총 191명, 중상 122명, 경상 730명, 총피해액이 260억 원이라고 발표하였다.

88년 제 6 공화국이 들어서자 <광주의거부상자회> 및 <광주의거유족회>는 계엄군의 발포로 광주사건이 야기된 것이라면서 철저한 진상규명, 책임자의법조치, 광주시민의 명예회복, 피해자에 대한 정신적·물질적 피해보상 등을 주장하였다.

같은 해 11월 국회 국정조사권 발동으로 <광주문제> 청문회가 열렸고, 94년 검찰의 1차수사, 96년 2차수사가 있었다.

96년 김영삼 정부는 전두환(全斗煥)·노태우(盧泰愚)·정호용(鄭鎬溶) 등을 구속수사하고 5·18민주화운동특별법을 제정하는 등 진상규명과 피해보상을 하였다.

97년 12월 김영삼정부는 수감중이던 전두환·노태우 전대통령을 특별사면하였으며 98년 김대중정부는 두 전직대통령을 복권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