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신문엔가 이번 선거결과를 두고 미국 <워싱턴포스트>를 인용해 '대한민국에서 최초로 좌파가 다수를 점했다'고 보도했더군요.
꽤 많은 독자들이 '제목'만 보고 혹 오해할 수도 있을 것 같더군요. 그러나 기사 내용을 자세히 보면, "한국에 자유주의자들이 많아졌고, 이들이 '좌파로의' 방향을 원했다"는 형태로 쓰여져 있습니다. 서구에서 '자유주의'란 보수주의를 말합니다.
제가 보는(아니 상당수 대학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인정하는) 이번 선거의 이데올로기적 지형은 이렇습니다.
1) 수구(한나라당) - 극우단체, 반촛불집회 세력 2) 보수(없음) - 3) 개혁(열린우리당) - 시민단체, 촛불집회 대다수 세력 4) 진보(민주노동당) - 5) 좌파(사회당) - 6) 극좌(공산당, 역시 없음) -
민주와 자민련은 이념 정당이 아님은 물론, 이젠 지역 정당도 아닌 DJ, JP 잔당이니까 더 이상 거론할 가치도 없구요.
여기에서 범보수라함은 1)번에서 3)번까지이고, 진보라함은 4)번에서 6)번까지라는 것이 사회과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일반적 인식입니다.
물론 한나라당에는 대부분 1)번이겠지만, 2)번도 일부 있을 수 있고, 열린우리당에는 2)~4)번까지, 그리고 민주노동당에는 3)~5)번까지의 이념적 스펙트럼이 존재하리라 보여집니다.
하지만 1)번인 한나라당이 3)번인 개혁을 부르짖는 것은 우습고, 3)번인 우리당이 5)번인 좌파로 불려지는 것은 적절한 명명법이 아니라고 보여집니다.
우리당을 두계단 왼쪽인 5)번 좌파로 밀어붙여야, 1)번 수구인 한나라당의 위치가 2)번 보수 쪽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가까워지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이념적 편향은 ‘진보’가 아닌 ‘보수’라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노무현 대통령이 <칼의 노래>를 읊는 것은 수구세력을 원균과 같은 존재로 보는 것일 뿐, 그도 역시 보수주의에서만이 평안함을 느끼는 50대 구세대이고, 그리고 이미 주어진 시스템을 거부한다는 것에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못하는 이데올로기적 한계를 자신도 모르게(?) 나타내 준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런 노무현에게 ‘좌파 이데올로기’라고 이야기하는 건 한편으론 진정한 ‘좌파’들을 두 번 죽이는 일입니다.
원균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순신은 그 '충'의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위험한 인물일수 있겠죠? 이 시대의 원균은 누구입니까?
수구와 보수의 차이점은 ‘도덕성’과 ‘사회에 대한 책임’입니다.
'팍스 로마나'를 연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는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지만, 자신의 후손들을 앞장세워 전장으로 내보냈습니다. 아들이 없던 그는 사위 아그리파 장군을 최전선에 보냈고, 아그리파는 적을 막다 전장에서 숨지고 맙니다.
아우구스투스는 여기에 더해 아그리파의 아들이자, 자신의 외손자인 루치오와 가이우스 마저도 반란이 일어나던 아르메니아 등에 보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아우구스투스가 63살, 65살 되던 해 각각 전쟁터에서 숨졌습니다. 이게 '보수'입니다.
포클랜드 전쟁이 터진 1982년이었습니다. 여동생의 잡지책인 <여학생>을 뒤적이다 지금의 톰 크루즈를 닮은 듯한 영국의 왕자(찰스 왕자의 동생, 앤드류였던가?)가 해군 복장을 한 채 장미꽃 가지를 물고 있는 멋진 모습이 큰 사진으로 실려 있었습니다. 해군 장교였던 그 왕자는 아르헨티나 상공으로 비행기를 몰고 전투에 나섰다가 아르헨티나 군대의 포격을 맞고 비행기가 추락당하는 일을 겪고,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으면서 국민적 영웅으로 치솟았습니다. 이런 게 '보수'입니다.
영화 <황산벌>을 보면, 난공불락의 백제 계백을 무찌르기 위해 신라 김유신은 젊은 화랑들을 희생시키기로 결정합니다. 영화에서 장군들은 자신의 자식들인 화랑을 설득시키며 "나같이 늙은 사람이 죽으면 약발이 안 먹힌다카이, 젊은 니가 죽어야 한단 말이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자식들을 죽음의 전장으로 내밉니다. 코미디 영화지만, 관창의 아비가 전장에서 관창을 내몬 것이 <삼국사기>에 나오니, 사실에 근거한 것입니다. 이게 '보수'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고려를 지키려는(보수) 정몽주는 새로운 세상을 만들자는(개혁) 이방원을 만나러 선죽교로 향하는 밤, 등불을 들고 말의 고삐를 쥐려는 하인을 물립니다. 당시 양반이 말을 타고 어디를 갈 때는 늘 말을 안내하는 하인이 함께 했습니다. 정몽주가 하인더러 "놔둬라. 나 혼자 가마"고 한 것은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하인의 목숨을 살리려는 휴머니즘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게 '보수'입니다.
김구는 임시정부의 수장으로서 얼마든지 자신의 기득권을 주장할 수 있었지만, 이승만과 미국에 자신의 기득권을 요구하기에 앞서 통일정부를 세우는 것에 온마음을 바칩니다. 이게 '보수'입니다.
선조는 임진왜란이 벌어지자 한양을 버리고 야반도주합니다. 백성들이 "우릴 버리고 어디로 가시나이까"(쿼바디스?)하고 가마를 막아섰지만, 이들을 물리치고 도망갔습니다. 의주까지 도망가서는 또 여차하면 압록강을 건너려고 눈치만 봤습니다. 전장은 모두 권율과 이순신에게 맡겨두고. 그러면서도 혹 이순신이 자신을 배반할까봐, 백성들이 자신보다 이순신을 더 따를까봐 안절부절합니다. 이게 '수구'입니다.
‘쿼바디스’(어디로 가시나이까의 라틴어)라고 하니 또 하나가 생각나네요. 소설 <쿼바디스>에 보면, 예수가 죽은 뒤 로마에서 선교활동을 하던 베드로가 당국의 박해를 피해 로마 근교로 빠져나갈 때, 자신의 스승인 예수를 다시 만납니다. 그리고 아무 말없이 자신이 빠져나왔던 로마를 향해 걸어갑니다. 그때 베드로가 내뱉은 말이 "쿼바디스, 도미네"(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였습니다. 그때 예수의 말은 "네가 버린 로마시민들을 구하러 다시 십자가에 못박히러 간다"고 말합니다. 이 말에 베드로는 로마로 다시 발길을 돌립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려(자신이 예수와 똑같이 십자가에 매달릴 수 없다며, 거꾸로 매달아 줄 것을 간청해) 숨집니다. 이게 '보수'입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리 국군이 북으로 진격하고 있으니 안심하라"는 이승만 대통령의 대국민 방송은 국민들 몰래 피난내려간 대전에서 행했습니다. 그 방송만 믿고 피난하지 않고 가만히 있다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습니까? <태극기 휘날리며>에도 나옵니다. 국민들이 정부의 말을 믿지 않게 된 게 그때부터 아닐까요? 이게 '수구'입니다.
이땅의 수구는 조선시대 송시열로 대표되는 서인 노론세력에 그 뿌리가 닿습니다. 이들은 당시의 개혁세력이었던 남인을 박해하며 온갖 기득권을 누리다가 일본에 나라를 몽땅 바치고,(이완용 등은 대부분 서인 노론 출신입니다) 일제 때는 친일파가 되어 기세등등하게 지내다가 해방 이후에는 교묘하게 '보수파'로 위장해 계속 기득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가면을 벗으십시오. 아니, 벗깁시다. 그들은 '보수'가 아니라, '수구'입니다.
간단합니다. '보수'는 남의 이익을 위해 나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 '수구'는 나의 이익을 위해 남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
이땅에 '보수'의 씨는 말랐습니다. 개혁이나 진보 세력이 그 척박한 땅에서도 싹을 틔울 수 있었던 것은 '수구'에 저항하면서 그 스스로 힘을 길러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보수'는 '수구'가 '보수'를 참칭하면서 완전히, 거의 박멸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보수세력의 대변지임을 자처하는 <조선일보>는 '개혁'이나 '진보'가 아닌, '보수'의 진정한 적입니다. '보수'라는 귀한 이름을 이처럼 욕되게 만든.
그 '보수'를 복구하는 방법은 단 하나입니다. '인적 청산'입니다. 한나라당 내부에는 이른바 '건전 보수' 논쟁이 한창입니다. 그러나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이 땅에 '수구'의 세력이 강고했던 이유는 그들은 몇 차례 위기에서 타협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확장시켜 나갔기 때문입니다. 마치 흡혈귀에 피를 빨린 인간이 그도 흡혈귀가 되는 것처럼.
한나라당의 건전보수를 희구하는 세력들은 많이 있고, 한나라당이 살 길은 그것 뿐입니다. 하지만 이 점은 단단히 명심해야 합니다. 거듭나기 위해서는 일체의 '기득권'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그것이 진정으로 사는 길입니다. 창피스럽더라도 '우리당'의 행태를 표절해야 합니다. 그리고 거대한 '수구' 세력을 소외시켜야 합니다. 더 이상 '수구'가 '보수'를 대변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그러나 나는 압니다. 이른바 한나라당에서 건전보수를 부르짖는 이들이 그렇게 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그들도 이미 가진 게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차가운 벌판에 나서본 적도 없고, 나설 자신도 없고, 나서기도 싫고, 나설 필요까진 없다고 느낄 겁니다. 그래서 아마 '수구'의 몸뚱이에 적당히 '보수'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나, 이쁘지?"하고 나타날 겁니다.
그러나 이를 어째? 이제 사람들은 콧구멍 사이에 실리콘을 얼마나 끼워댔는지를 한 눈으로도 알아볼 정도로 눈썰미가 강해졌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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