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로읽는세상] 개꽃과 참꽃
〈배병삼/ 영산대 교수·정치학〉
지난해 12월은 겨울답지 않게 포근했다. 남극의 빙산이 무너지는
사진을 접하면서 ‘겨울이 정말 실종되고 마는 것은 아닌가’싶었다.
그 틈에 양달에는 개나리며 산철쭉이 몽우리를 터뜨렸다. 노란 개
나리꽃과 붉은 산철쭉꽃은 마치 지구 온난화 현상을 한 걸음 앞장
서 보여주는 듯했다. 하나 늦게 찾아왔을 뿐, 겨울은 또 거기 있었다.
먼저 핀 개나리꽃과 철쭉꽃은 꽁꽁 얼어버렸다. 온힘을 자아내
어 꽃을 피웠다가 저렇게 얼어 죽으면, 곧 찾아올 봄엔 무슨 힘으로
꽃을 또 피울 수 있을까. 때를 아는 게 생과 사를 가르는구나싶었
다. 산철쭉을 시골에선 흔히 ‘개꽃’이라 불렀다. 이 이름 속에는 허
기진 시절의 설움이 배어 있다. 쌀은 떨어지고 보리는 아직 패지 않
은 이른 봄을 보릿고개라고 했다. 고픈 배를 속이려면 꽃이라도 따
먹어야 할 형편인데 그때 먹었던 꽃이 진달래였다. 그 고마움에 참
꽃이라 이름 붙였다. 반면 진달래와 모양이나 색깔은 닮았지만 먹
고 나면 입이 퉁퉁 붓는 건 개꽃이라 불렀다. 그게 산철쭉이다.
-산철쭉·진달래의 다른 이름-
한데 개꽃이라는 이름이 단순히 먹을 수 없어서 붙여진 것만이 아
님을 이번 참에 알겠다. 시절을 모르고 제 살갗에 닿는 온기만 적당
하면 한겨울에도 피어나는 것이 개꽃이다. 제때가 아닌데도 피어나
죽음을 자초하니 개꽃인 것이다. 새 시대를 알리는 선구자인 양 보
이지만, 실은 가벼운 유혹에도 속을 내놓고 꽃을 피우는 비천함이
거기 있다. 아! 개나리가 그냥 ‘나리’가 아니라 왜 개나리인지도 알
겠다. 세상(시절)의 변화에는 지나칠 정도로 민감하면서 제 처지는
옳게 헤아리지 못할 때 개나리가 되는 것이다. 추위를 빨리 벗어나
려는 욕망이, 신기루일지라도 봄이기만 하면 좋겠다는 강박관념이
설핏 스치는 온기의 손길을 뿌리치지 못하고 몽우리를 터뜨리는 것
이다. 개나리가 개나리인 까닭은 겨울의 유혹이 아니라, 실은 제 욕
망 때문임을 안다. 그러고 보면 개꽃과 같은 이름들이 우리 주변에
제법 많다. 영화 ‘넘버3’(1997)에 나온 송광호(조필 역)의 똘마니들
처럼, 조폭조차 되지 못하는 얼치기들을 날건달이라 부른다. 건달
을 흉내 내지만 옳은 건달이 아닌 것이다. 또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거들먹거리는 것은 건방 축에도 못 끼이는 ‘시건방’이다. 어설픈 것,
제대로 익지 못한 것이 ‘개·날·시’와 같은 접두어 속에 들어 있다.
반면 나무 가운데 가장 쓰임새 있는 것이 참나무요, 작아도 새다운
것이 참새이듯, 제 피어날 때를 알고서 시절에 맞춰 피는 것이 참꽃
이다. 그렇다면 사람도 참사람이 있고 거짓된 사람이 있을 터. 영화
‘올드보이’(2003) 주인공 최민식이 자신을 훌륭한 배우라고 평한 선
배의 칭찬에 대해 “훌륭한 배우란 없다. 배우와 ‘배우 비슷한 사람’,
둘이 있을 뿐이다”라던 인터뷰가 생각난다. 인기나 돈, 명예 따위는
문제가 아니고 배우의 기본에 충실한 것, 그것이 참된 배우의 조건
이라는 뜻으로 읽혔다. 하긴 어떤 시인은 “시인이란 늘 시만 생각하
는 사람”이라고도 했다. 그러면 가수는 오로지 노래만 생각하는 사
람이고, 학자는 죽도록 공부만 생각하는 사람이어야겠다. 작고한
소설가 황순원이 평생토록 다른 글을 쓰지 않았던 것도 ‘소설가는
소설로써만 말한다’는 개결함에서였다고 들었다. 그러면 참꽃이 참
꽃답기 위해서는 어떤 미덕을 필요로 할까. ‘대학(大學)’의 가르침
을 받들자면, ‘멈춰야 하는 곳에선 멈출 줄 아는 것(知止)’이 아닐까
한다. 처한 곳이 차갑다면 추위에 멈추고, 더운 곳이라면 더움과 더
불어 버티는 것. 추위에 떨면서도 따뜻함을 구걸하지 않고, 더움 속
에서는 또 묵묵히 버텨 나가는 것, 이것이 ‘참’으로 가는 길이지싶
다.
-멈출데선 멈출줄 알아야-
설중매화라, 우리 같은 범인이 어찌 감히 눈속에서 찬 땅을 뚫고 꽃
을 피워 봄을 먼저 알리는 선구자이길 바랄 수 있으랴. 다만 개꽃만
은 되지 말아야 할 일이다. 제 할 일은 하지 않은 채 경기가 쉽게 풀
려 살림이 나아지길 바라는 게 개꽃의 바람이라면, 불경기의 추위
를 버티고 이겨낼 힘을 자아내길 바라는 것, 이것이 참꽃의 정신이
지싶다. 추울 땐 추워야 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