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그녀는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다.
"뭐 하냐?"
"엄마 전화 받고 있지."
"별일 없지야 ?"
그녀의 근황이 궁금해 늘 그녀보다 한발 앞서 전화를 하시는 분이다.
조심스레 물어오는 끈끈한 목소리는 현실 속의 삶이 아무리 힘들고
지치더라도 어머니 앞에서는 헛웃음과 거짓말로 편안함을 내비칠 수
밖에 없다. 아무 일 없는 듯 잘 살고 있는 모습 보이려 가장을 해도
그녀의 힘없이 스러져 가는 목소리는 염려 어린 질문에 들통나곤 한다.
별일, 별일 있기를 바라는 부모가 어디 있을까 ?
자식을 둔 에미로서 당연한 염려에 이 세상 모든 딸들은 일류 연극인이
되어 가슴 아린 연기를 한다. 속은 시커먼 재를 쌓아 놓고도 겉으로는
밝은 척 해야 하는 표정없고 이중적인 두 얼굴에 과히 상을 받을만한
연기자라 해도 손색이 없다. 꿈자리가 뒤숭숭하다고, 통 연락이 없다고
먼저 전화를 걸어 오시는 어머니께 만족할만한 대답만 골라 답을 해
드린다.
"얘! 별일 없는거지 ?"
"글쎄 있잖아. "
친구의 전화에는 수다와 함께 눈물과 푸념섞어 별일들을 떨궈내곤 한다.
그런 것마져 박탈된다면 안에 내재되어 있는 화는 아마 살점을 뜯어내는
균들로 저당 잡히고 말 것이다.
어머니의 안부전화에 솔직하지 못함은 부모님에 대한 사랑 그것 아닐까?
초록의 행군이 점점 강도를 높이며 산천과 초목을 점령해 가는 계절, 아직
펼치지 못한 아기 조막손처럼 작은 잎새들은 소리없이 천천히 제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들여다 볼수록 새록새록 정감이 가는 풀꽃들 보는 재미와
바람타고 날아와 코를 살짝 키스해주는 꽃향기, 매일 만나는 강가의 새벽
두루미와 청둥오리 등 자연의 조화로움에 빠져있는 그녀의 여유가 '별일'
들을 제치면서 행복한 모습과 함께 봄을 그려가고 있다.
찰나의 행복도 놓치기 아까운 시간들 속에 받은 어머니의 전화..
어제 하루종일 그녀의 어머니는 033으로 눌러야 할 지역전화를 032로
누르며 받지 않는 엉뚱한 전화기만 바라보면서 그녀에게 생겼을지도 모를
어머니만의 "별일"에 불안과 함께 싸움하셨나보다.
모두가 그녀의 게으름으로 오는 또 하나의 불효인 것이다.
손전화기를 잘 하시지 않는 어머니는 그제서야 폰번호를 찾으려 수첩을
펼쳤다가 지역번호가 잘못된걸 아시고 안도의 한숨을 내셨다며 별일없냐는
말씀만 되물으신다. 사람 사는 것이 마음먹은대로 살 수만 없는 법, 평탄하게
'별일'없게만 산다면 얼마나 좋을까 ?
포물선 그리듯 행불행은 적절하게 믹스되어 우리네 삶을 채워나가고 있다.
꼭 필요할때만 전화하는 이기적인 딸이 되어 있는 자신임을 반성하면서
그녀는 별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스스로 행복이라는 꽃밭을 가꿀수 있는
현명한 여자로 거듭나리라 다짐을 해 본다.
"엄마, 다음엔 제가 먼저 전화드릴게요."
푸르른 5월 하늘과의 약속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