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 돌아보니(8)....
뒤 돌아보니 2005/09/29 03:45   http://blog.azoomma.com/nayamina/206112

 

 

첫아이가 초등학교 입학을 했던 93년, 한국의 3월은 설레임 만큼이나 쌀쌀한 날로 기억이 된다.

 

학부형이란 세글자는 1학년(?)이란 이름표를 가슴에 달고 어리 버리하게 운동장에 서 있는 내 아이와는 달리 당찬 각오와 기대와 희망을 가져다 주었다.

 

추운 바람을 막아주는 두꺼운 코트들을 입은 수많은 입학생들이 다 비슷하게 보일지라도 언제나 내 아이만은 쏙쏙 잘도 찾아냈던 나....

8년차 답게 팔불출(?) 아줌마가 되었다.

 

담임과의 첫 면담을 앞두고 무슨 선물이 좋을까? 봉투엔 얼마를 넣으면 될까? 고민하는 이웃 학부형들과 달리, 난 오전부터 준비한 닭다리 튀김과 샌드위치를 커다란 바구니에 음료수와 함께 이쁘게 포장하곤 내 아이에 대한 나의 진실된 사랑과 관심을 전해주었다.

 

그후 회자가 되었던 그 바구니(?)는 나눠 드셨던 이웃 담임선생님들에게서 까지 감사하다는 말을 듣게 된 나만의 자랑스러운 사건(?)이 되었다.

 

아마도 선천적(?)으로 두드레기가 있었던 흰봉투(?)에 대한 알러지 때문이였을까? 

'학부형으로서의 자세' 제 1원칙을 실행했다는 그 자체에 뿌듯함이 먼저였던 것 같다..

 

학부형이나 학생으로서의 출발이 좋았던 그해는 한국에 더 잔류하느냐 아님 미국행이냐를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던 우리 가족에게 직면한 커다란 고민의 해이기도 했다.

('이것을 포기 하잖이 저것이 아깝고.... 저것을 포기하잖이 이것이 아깝고...'  쩝~)

 

인간의 욕심으론 절대 그 어떤 쪽으로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는 여러날 중, 어느 하루.....

미국에 계신 아버님이 갑작스럽게 심장 수술을 받으셔야 한다는 위급한 소식에 더 이상의 고민없이 미국행을 서둘러 결정하게 되었다.

이 모든 가족간의 위급한 상황들이 예고없이 일어났고, 자식이기에 미국행에 대한 준비도 미처 하지 못한채 우리 가족들은 서둘러 태평양을 건너야만 했다.

 

전투만큼이나 치열했던 한국 직장 생활에서의 어려움들이 이제 조금씩 편해지려는 남편의 위치에서 아무런 대책도 없이 무작정 미국행을 택하게 된 우리를 바라보았던 많은 시샘(?)과 걱정(?)의 눈(?)을 가진 사람들...

(혹자는 남편이 한국에서의 좋은 조건에도 불구하고 선택한 미국행에 모종의 계약이 있을거란 나만의 희망사항(?)같은 얘기를 하기도 했다.. 쩝~)

 

남편이 심각하게 미국행을 선택하겠노라 선언 했을때 난, 아쉬움을 드러내기 보다는 그에게 용기가 필요함을 느꼈고, 기꺼이 함께 하겠다는 말로 위로를 했다.

 

아쉬웠지만 더 이상 욕심을 부리지 못했던 나의 친정 식구들의 공항 배웅으로 원없고, 화려했고, 소중했던 한국에서의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탑승했던 비행기는 다시 태평양 상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임시 백수(?)인 남편, 다시 시작할 이국 땅에서 쉽지 않을지도 모르는 삶을 각오했던 나, 그리고 새로운 환경에 대한 기대로 마냥 흥분되어 있던 아이들이 도착한 곳은 시아버님의 병환으로 시댁이 있는 Las Vegas라는 도시였다.

 

신혼초 주말에만 자주 들렀던 화려한 관광도시..

 

그곳에서의 정착된 삶은 전혀 계산되지 않은 순수한 우리의 선택이였다, 못다한 자식의 도리를 하고자.....

 

다행히 불효자를 만들지 않으셨던 아버님의 병세는 좋아지셨고, 우린 조금은 가벼운 마음으로 또다시 태평양을 건너온 이삿짐을 풀었다.

가까이 있는 많지 않은 시댁 식구들의 존재는 나에게 색다른 즐거움이였다, 예전의 신혼초 처럼 외로움이 없는....

 

어쩌면 어려울 수 있는 시어른들과의 라스베가스 생활은 하산(?)할 준비를 해도 될만한 아줌마 8년차였기에 그 뻔뻔스러움과 배짱..그리고 어울리지 않는 애교로 생각보다 수월하게 보냈다...

 

어색한 분위기엔 더 말이 많아지는 나의 장점이자 단점이 있긴 하지만 난 한국 생활만큼의 공백기를 끝없는 수다(?)로 메워 드리고 싶었다, 남편이 날 위해 희생(?)했듯이.....

 

임시 백수가족(?)인 우리집에서 시댁식구들과의 잦은 모임을 갖음으로 어색했던 동서, 시누, 시동생과의 관계는 남편의 험담을 쏟아낼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될 수 있었다, 한국서 절대 할 수 없었던.... 

 

유난히 바쁘게 보낸 그해 9월...

ABC도 모르던 아이들의 입학과 동시 난 임시 백수인 남편대신 직장을 잡아 보겠노라 큰소리 치며 '카지노 딜러 스쿨'에 입학을 했다.

'Hi!','Thank you!', 'I'm sorry~'... 밖에 모르던 간 큰 이 아줌마.....

 

것도 여자로서 카지노 딜러는 입맛이 가장 땡기는 직업이였기에 나의 그 간 큰 생각은 극히 평범하다고 여겼다, 겁도 없이...... 쩝~

 

게다가 남편의 특수한(?) 경력을 필요로 하는 직장을 라스베가스에서 잡는다는 건 그리 쉬운일이 아니였기에 나의 특기(?)인 협박용 멘트(?)로 남편의 동의를 얻을 수 있었다, 여러가지 조건을 내세운.....

 

기억력이 쇠퇴해감에도 불구하고 많은 게임 룰들을 외우며 딜러 스쿨을 마침과 동시.....

 

역시 무식이 용감(?)이였는지 그 어떤 영어에 대한 두려움도 전혀 없이 변두리에 있는 작은 카지노에 당당하게 들어갔다.

돌이켜보면 참 어처구니 없는 실수를 많이 했던 초짜 딜러로 일을 시작하므로서 화려한(?) 라스베가스의 밤처럼 난  이국에서의 내 봄날(?)을 다시 맞이하게 되었다.

 

내 생애 지우고(?) 싶었던  시간들의 시작임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채.....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