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프런티어 닛센, 반신욕·족욕·수면욕·전신욕 독서문고 ‘설국(雪國)’ 등 20여종 상종가
일본인들은 기본적으로 하루에 한 번씩 목욕을 한다. 우리 나라 사람들은 더럽혀진 몸을 깨끗이 씻기 위해 목욕을 한다고 생각하지만, 일본인들의 목욕 개념은 그 성격을 달리 한다. 일본인들은 때를 밀러 목욕탕에 가는 것이 아니라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기 위해 목욕탕에 가는 것이다. 실제로 목욕탕에 가서도 일본인들은 때를 밀지 않고 30∼40분간 온수에 몸을 담갔다 나오는 것이 전부다. 물론 최근에는 한국산 때밀이 타월의 대량 유입으로 때를 미는 일본인들이 부쩍 늘어난 것도 사실이지만, 기본적인 목욕문화는 변하지 않았다.
이처럼 일본인들이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목욕을 하는 것은 일본의 주택구조가 우리 나라처럼 난방시설이 잘 된 온돌방이 아닌 다다미방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자기 전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가, 그 몸의 보온을 그대로 유지한 채 잠자리에 드는 것이다.
책읽기 좋아하는 일본인들 겨냥
한데 매일 저녁마다 대중목욕탕을 즐겨 찾던 중·장년층들이 최근 들어 건강에 좋다는 이유로 낮에 집에서도 반신욕을 즐기게 됐다. 그러자 관련 업계들이 후끈 달아올랐다. 반신욕, 족욕(발만 물에 담그는 것), 수면욕(누운 채 잠자면서 목욕을 즐기는 것)의 용도에 맞게 욕조를 디자인하고, 새로운 주택을 지을 때는 이 디자인의 설계대로 집을 짓는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인기 있는 주택은 욕조가 어떤 형태의 디자인이냐에 따라서 판가름이 난다. 요즘 세대를 불문하고 가장 인기 있는 주택은, 누워서 안락한 상태로 목욕을 하게끔 ‘베개가 있는 욕조’가 갖추어진 집이다. 욕조 가장자리에 붙박이 베개가 설치되어 있어 실제로 욕조에 누우면 안방에 누워 있는 것 같은 안락함을 느낄 수가 있다. 반신욕 욕조는 아예 의자에 앉아서 목욕을 즐길 수 있는 의자 형태의 욕조가 설계되어 있다.
이밖에도 목욕탕에 음향시설과 함께 목욕을 하며 TV를 시청할 수 있는 브라운관, 간단하게 잡지를 읽을 수 있는 특수 조명 스탠드, 방수전화 커버 등 목욕탕 디자인과 인테리어에 신경을 쓴 주택설계가 많은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바로 얼마 전, 이번에는 이 같은 목욕탕 관련 상품을 훨씬 능가하는 획기적인 상품이 등장했다. ‘물에 젖지 않는 책’이 바로 그것이다.
일본인들이 독서광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아침 출근길에 전철 안에서 문고판 책을 읽고 있는 모습은 이제 고전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인지 일본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자그마한 서점 하나 눈에 띄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만큼 1억2500만명의 전체 인구 중 독서인구가 많다는 방증에 다름아니다. 그 독서 인구가 이제 목욕탕으로 옮겨갔다.
도쿄에 본사를 둔 ‘프런티어 닛센’은 얼마 전 새로운 아이디어 상품을 공개했다. 물에 젖어도 책장이 찢어지지 않고 들러붙지 않는 비닐 소재의 문고판 책을 선보인 것이다.
“최근 일본인들이 반신욕을 하면서 독서한다는 신문기사를 보고 힌트를 얻어 물에 젖지 않는 책을 만들게 됐습니다.”
마시모 다케루 사장의 말이다. 원래 ‘프런티어 닛센’은 국제전화 카드 등을 제작하는 벤처 기업으로,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초반까지는 국제카드를 애용하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급증으로 호황을 누렸던 업체다. 하지만 최근 몇 년 동안 이시하라 신타로 도쿄 도지사의 불법체류 외국인 노동자들에 대한 단속 강화로 국제전화 카드의 수요가 급감하자, 판로를 지난 10여년간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출판계로 시선을 돌린 것이다. 그래서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목욕탕 인테리어 붐에 편승, 젖지 않는 책을 만들게 되었다고 마시모 사장은 말했다.
제작비 비싸 흥행은 미지수
‘물에 젖지 않는 책’은 이미 자연파 소설가로 널리 알려진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 ‘설국(雪國)’으로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다자이 오사무(太宰治) 등 일본 유명 작가의 작품과 함께 해외 작가의 작품까지 포함, 약 20여종의 문고판이 인터넷(www.f2000.co.jp)을 통해 판매되고 있다.
지금까지 소비자들의 반응은 호기심 그 자체다. 사실 그동안 사진집이라든가 일부 호화 장정 단행본의 경우 비닐 코팅을 한 예는 있었지만, 이렇게 대중을 상대로 문고판 비닐 책을 선보인 것은 처음이다.
때문에 독자라 할 수 있는 목욕탕 애호가들의 반응은 일단 합격점수다. 왜냐하면 우선 책이 물에 젖지 않으므로 욕조에 누워서도 책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책값도 700엔(7000원 가량)대여서 일반 문고판의 400∼500엔대에 비해 200엔 정도가 비싸기는 하나 목욕을 하면서 읽을 수 있다는 장점에 비하면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금액이다.
그래서인지 회사 측은 올 연말까지 무협지, 역사, 애정소설, 유명인의 에세이 등 책의 성격을 확대해 만화책까지 총 100여종의 책을 발간할 예정이라고 한다. 또한 소비자들이 보고 난 책을 전량 회수, 비닐에서 생성되는 다이옥신이 발생하지 않도록 고온 소각로에서 처리해 환경오염을 미연에 방지할 계획이라고 한다.
한데 문제는 제작비용이 만만치 않다는 것이다.
“아직까지는 일반출판사로까지 확대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이유는 제작비용이 일반 단행본이나 문고판보다 많이 들고, 또한 프런티어사처럼 이미 판매된 책을 전량 회수해 고온 소각로로 처리한다는 것이 결코 간단치 않기 때문이지요. 그 과정을 생각하면 절로 머리가 아픕니다. 일본 출판계의 주문판매 기간이 최저 2주에서 3주 가까이 돼 가뜩이나 주문 판매가 급감하는 상황에서 이미 팔린 책까지 회수해서 처리하는 것까지 책임져야 하는 출판은 대형 출판사가 아닌 중소 출판업체로서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이야기하는 이는 고단샤(講談社)의 문고판 담당자. 때문에 고단샤나 쇼가쿠칸(小學館), 슈에이샤(集英社) 같은 대형 출판사도 기획단계에서는 몇 번 이야기가 나왔으나 실행에는 아직 손을 대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소비자들의 입장은 그 반대다. 점점 목욕문화가 첨단과학을 걷는 상황에서 목욕을 즐기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은, 제작비가 그 얼마가 들든지 간에 관계가 없다는 것. 한 독자는 일반 문고판보다 책값이 300엔 정도 비싸다면 얼마든지 ‘물에 젖지 않는 책’을 살 수 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일반 문고판보다 책값이 500엔 이상 비싸다면 절대로 사지 않겠다고 장담했다.
이렇듯 최근 등장한 ‘물에 젖지 않는 책’은 소비자들에게는 호평을 받은 반면, 출판사들 사이에는 가능성 있는 출판업의 낙관론보다는 과다 제작비를 이유로 들어 회의론이 압도적이다.
실제로 ‘물에 젖지 않는 책’은 일반 대형서점인 ‘기노쿠니야(紀伊國屋)’나 ‘야에스(八重州) 북센터’에서조차 별 시선을 끌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프런티어 닛센’사 측은 인터넷 주문 판매가 꾸준히 늘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낙관하고 있다.
한편 우리나라에서도 ‘물에 젖지 않는 책’이 이미 출판된 적이 있다고 한다. 삼성출판사에서 ‘물에 젖지 않는’ 아동용 도서를 출판해 이미 호평을 받았다. 아이들이 책을 읽다가 물을 엎지르거나 유동식 음식물을 흘릴 경우를 염두에 두고 이 책을 제작했다는 후문이다.
“일본인들의 성향으로 볼 때 반신욕을 하면서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우리나라 성인들의 경우 하도 성질이 급해서 욕탕에서 빨리 나오기도 바쁜데 과연 책을 읽는 것이 가능할지, 우리나라에는 좀 시기상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국출판마케팅 연구소 한기호 소장의 말이다.
이렇듯 ‘물에 젖지 않는 책’은 목욕을 좋아하는 일본인의 기호에 딱 맞게 ‘맞춤 책’으로 등장했다. 하지만 고가의 제작비 때문에 가뜩이나 10년 이상 극심한 불황을 겪고 있는 일본 출판계가 이를 대중화로 연결시킬 수 있을지, 그 전망은 아직 불투명한 상태다.
도쿄=유재순 자유기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