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인 3색 패션 디자이너의 가을 패브릭

항상 원단을 매만지며 일하는 디자이너의 집에는 어떤 인테리어 패브릭이 있을까 하는 궁금증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결론은 아주 심플했다.디자이너 자신을 드러내는 또 한 가지 수단이라는 것.

임선옥 >> 자투리 천을 손길 닿는 곳에 늘어놓았을 뿐

‘ego’의 디자이너 임선옥을, 그리고 그녀의 옷을 수식하는 말은 의외로 많지 않다. 짧게 설명하면 ‘오리엔탈 인디 패션’, 조금 더 친절한 설명이 ‘에스닉 룩과 스트리트 패션을 레벨 업시킨 빈티지 스타일’ 정도다. 그녀의 집에 들어서는 순간 그 수식에 ‘사람의 손길, 터치감에 대한 애착’이란 표현을 넣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적한 망원동의 욕심 없는 1층 아파트. 32평 아파트에 그 흔한 개조 공사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가 막힌 공간 개념으로 지어놓은 화려한 저택에서 느끼지 못했던, 풍성한 기운이 농밀하게 꽉 들어차 있다.
이 모든 것이 그녀의 ‘손길’ 덕분. “옷을 만들고 남은, 적체된 패브릭들이 있어요. 그냥 창고에 쌓아두는 것이 아까워서 어떤 날에는 소파에 씌우고, 어떤 날에는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서 창문에 걸어요. 어차피 내가 쓰지 않으면 버려질 처지인 자투리 천을 사용하는 것이니까 싫증날 때마다 바꾸어 달아도 돈이 아깝지 않죠. 쿠션 커버링은 바느질할 것도 없어요. 그냥 매듭 지어서 묶으면 그만이지요.
피부를 보드랍게 스치는 패브릭의 촉감을 좋아해서 실크나 면, 울 같은 천연 패브릭을 주로 쓰고, 패턴이나 색감이 강한 것도 많이 쓰는 편이죠. 흔히 패턴은 섞어 쓰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그것끼리 모여 충돌을 일으키는 느낌도 재미있지 않나요?” 책을 읽고 싶을 때 책이 바로 옆에 있지 않으면 가지러 나가는 것이 귀찮아서 이 방 저 방 책을 늘어놓는다는 그녀.

영감이 떠올랐을 때 스케치북이 없으면 벽지에 스케치를 하기도 한다. 집의 물건들이 ‘이 지경’으로 나뒹구는 이유는 모두 자신의 게으름 탓이라며 쑥스럽게 웃는 그녀의 모습은 또 어찌나 예쁜지. 그녀의 집은 말한다. 한낱 조각 천도 집주인의 손길에 따라 유일무이한 귀한 소품이 될 수 있다고 말이다.

패턴이 충돌하는 집안 풍경

그녀가 이사 와서 유일하게 손댄 것이 있다면, 바닥. 장판을 드러내고 에폭시를 깔았다. 각종 패턴이 충돌하는 빈티지스러운 집 풍경과 잘 어울린다.

이정우 >> 동대문 패브릭의 실용성에 열광한다

“글쎄요. 우리 집이 기사의 주제와 잘 맞을지 모르겠네요. 저는 어떻게 하면 집에 패브릭을 덜 쓸까 고민하는데, 어쩌죠?” 인터뷰를 의뢰하자 의외의 답변이 돌아왔다. 한복 디자이너 이영희 선생의 딸이자, 프레타 포르테(기성품) 파리 컬렉션 참가 10년 경험에 2002년부터는 오트 쿠튀르(고급 수제 의상) 컬렉션에도 참가하고 있는 한국의 대표 디자이너가 패브릭을 덜 쓰려고 고민한다니, 뭔가 재미있는 스토리가 숨어 있겠다 싶었다. 그래서 찾게 된, 방배동 서래마을 그녀의 빌라. 특유의 또랑또랑한 말투로 집 안 구석구석을 구경시켜 주는데, 이야기대로 침구와 커튼 이외에 눈에 띄는 패브릭이 없었다.
“저는 우리 집 네 식구의 취향을 100% 수렴해서 이 집을 꾸몄는데, 우리 네 식구 공통점이 뭔 줄 아세요? 먼지 알레르기가 있다는 거예요. 패브릭이 많으면 먼지가 날릴 수밖에 없으니까 덜 쓰려고 했지요. 또 패브릭 선택의 제1원칙을 ‘물세탁할 수 있는 것’으로 고집하고요. 이불이니 커튼이니 빡빡 물빨래해서 햇볕에 쨍 하고 말려야 속이 시원해요. 옷을 만들 때는 꼭 실크를 사용하지만, 집에 사용한 패브릭 중에 물빨래가 어려운 실크는 단 한 장도 없지요.”
경쾌한 뱅 헤어에 강렬한 빨간 원피스, 차림만 보면 화려하고 고급스러운 것만 ‘탐닉’할 것 같지만, 의외로 그녀는 동대문 패브릭 마니아였다. “이사 오기 전에 수입 패브릭 가게에서 이 집의 커튼과 침구 견적을 내본 적이 있어요. 2000만원이 나오더군요. 창문에 2000만원을 걸어 놓고 어디 부담스러워서 세탁이나 제대로 할 수 있겠어요? 안녕히 계세요, 인사하고 나왔죠. 그러고는 동대문에 가서 견적 냈던 패브릭이랑 가장 비슷한 느낌의 국산 패브릭을 찾아냈어요. 결국은 1/10도 안 되는 가격에 집을 꾸밀 수 있었어요. 그렇다고 동대문 패브릭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에요. 정확한 눈과 발품 팔 의지만 있다면

보석을 건질 수 있는 곳이 동대문이에요." 두 아들의 방과 남편의 방에 가장 잘 어울릴, 게다가 물빨래를 할 수 있고, 가격까지 싼 패브릭을 찾아 동대문을 헤매는 그녀의 모습을 상상한다. 집주인의 에너제틱한 발품이 집에 이야기를 담는다. 이야기가 담긴 집은 아름답다.

둘째 아들 방

꼭 올리브 그린 색깔 페인트로 벽을 마감해 달라는 특명을 받고, 몇 번의 시행착오 끝에 원하는 컬러대로 칠해줬다. 침대 위 베드 스프레드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손빨래를 해야 하는 패브릭. 욕조에 물 받아 놓고 울 샴푸를 풀어서 조근조근 주물러준다. “뭐, 예쁘니까 이 정도 수고는 해야죠. 대신 딱 이 정도까지만이에요.”

트로아조 >> 20년을 써도 멋스러운 실크의 매력

대화할 때 상대방과 눈을 맞추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는 매너, 자신보다 한참 어린 사람의 의견에도 성심껏 귀 기울이는 관용, 마룻바닥에 철퍼덕 앉아 화장을 고치는 자유분방함, 온 마음으로 ‘새로운 것’이 주는 흥분을 느낄 줄 아는 감각… 나이가 들면서 사람들이 놓쳐버리고 마는, ‘멋지게 나이 들기’의 필수 조건들. 디자이너 트로아 조는 그 조건들을 이미 체득해버린 멋진 ‘할머니’다. 1980년대 미국 현지 디자이너들도 입성하기 어렵다는 매디슨 애비뉴 66번가에 랄프 로렌보다 먼저 자신의 부티크를 내고 독자적인 패션 세계를 구축한 그녀. 일흔을 바라보는 지금도 뉴욕 패션계에서 ‘트로아의 옷은 고전적이면서(classic) 섹시하고(sexy) 젊어 보인다(young)’는 평을 듣고 있는 한국 패션계의 대모이면서 그녀는 너무나 겸손하고, 공손하다.
삼성동에 위치한 트로아 매장의 꼭대기 층에 자리하고 있는 그녀의 집은 오래 두고 관계 맺은 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보여준다. 시골 헛간에서 떼어온 고목 문짝이나 궤, 파티션으로 용도 변경한 문틀 등 이 집의 가구들은 기본 20년 이상 쓴 것들이다. 20대에 구입해 지금껏, 50년 가까이 쓰고 있는 의자도 있다. 한번 기르기 시작한 화분도 어떻게든 살려서 십년 넘게 기른다니, 그녀의 이 ‘오래 쓰기’ 습관은 패브릭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저는 실크를 무척 좋아해요. 옷을 만들 때뿐만 아니라 침구나 쿠션 커버링도 실크를 이용하지요. 모르는 사람은 고급스러운 원단으로 사치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상 그렇지 않아요. 지금 쓰고 있는 실크 침구는 20년 전에 옷을 만들고 남은 천으로 만든 것이에요. 그 후로 가을 겨울마다 쭉 쓰고 있으니 오히려 알뜰한 것 아닌가요? 실크의 매력은 바로 이런 것이에요. 오래 두고 써도, 시간이 지나 날긋날긋해져도 그 나름의 멋이 있다는 것. 오히려 세월의 더께를 고급스럽게 표현해주는 원단이지요.”

그녀는 ‘인테리어’라는 개념 자체가 없던 시절, 고급 홈패션 사업을 시작했다가 현실적인 벽에 부딪혀 사업을 접은 경험을 하기도 했다. 그토록 선구자적인 감각을 지닌 그녀의 밑바탕에는 오래된 것에 대한 애착이 있었다. 새로운 것과 오래된 것을 동시에 볼 줄 아는 힘. 그녀 앞에서 세월이 무색해지는 이유다.

햇살이 부서져 들어오는 거실

흔들의자의 패브릭은 며칠 전에 지인이 커버링해준 새것. 동양적인 문양의 공단도 그녀가 애착을 갖는 패브릭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