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이야기가 있는 집 (경기 광명의 오리 이원익 종택)

조선 중기의 문신 오리(梧里) 이원익(李元翼, 1547~1634) 정승은 선조, 광해군, 인조 3대에 걸쳐 영의정을 지낸 분으로 청백리의 표상으로 꼽힌다. 임진왜란 때 선조의 피난길을 열어 임금을 구하였고, 부당한 조세 제도를 개혁해 대동법을 시행한 분이기도 하다. 한평생 백성의 생활을 굽어 살펴 ‘오리 정승’으로 불렸다는 그는 허세가 없고 성품이 곧아 그 업적에 비해 널리 알려지지 못했다.

광명시 소하동 1084번지, 옛 지명 오리마을. 40여 년 전까지만 해도‘시흥군 서면 제일 큰 기와집’이라고만 써도 우편이 들어왔다는 일대를 통틀어 가장 큰 이 터에는 오리 대감이 말년을 보낸 5칸짜리 집과 종가와 함께 박물관, 사원 등 관련 유적들이 자리 잡고 있다. 이 규모 있게 건사된 유적은 오리 선생의 13대 종손인 이승규(66세), 함금자(66세) 부부가 뜻을 합쳐 오랜 세월 가꿔온 결실이다.

오리 이원익 대감의 13대 종부 함금자 씨.
오랜 세월 취미로 차를 공부한 그는 다도할 때 입는 치마폭이 좁은 한복을 곱게 차려입었다. 남색 치마에 옥색 저고리는 예부터 사대부들이 입던 차림이다.

◆ 늘 바쁜 오리 유적지의 실무 담당

전쟁의 피해도 문명의 혜택도 넉넉히 받았던 수도권 일대에서 ‘사연 있는’ 기와가 남아 있는 집을 찾기란 쉽지가 않다. 바쁘게 돌아가는 서울 땅에서는 어렵게 찾아, 눈여겨, 마음 깊이 기약해둔 ‘그런 집’도 갑작스레 빈집이 되거나 사람 안 사는 기념관이 되어버리는 경우가 꽤 있었다.
앞으로는 오밀조밀 사각형 건물, 뒤로 아파트를 병풍처럼 두르고 있는 이원익 대감 유적지. 도시 가운데 어색하게 들어앉은 이 터에는 달랑 종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른쪽으로는 충현 박물관, 종가 왼편으로 별채 관감당, 뒤로는 정원 같은 뜰과 삼상대니 풍욕대니 하는 정자에 서원까지 갖추고 있다. 주변 경관만 떠나면 담장 안쪽은 조경수 한 그루까지 어우러지도록 신경을 써서 다듬어놓은 모습이다. 이 큰 규모의 유적지는 국가나 시가 아닌 오롯이 후손들의 애정과 노력과 비용으로 유지되고 있다는 것, 종부가 박물관의 관장이자 유적지 관리, 운영 실무를 맡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그녀가 그렇게 분주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는 것을 알겠다.

◆ 일을 할 거라던 엘리트 처녀

8남매의 맏며느리였던 친정어머니를 보며 자란 함금자 씨는 늘 일하는 여성이 되리라 생각했다고 한다. 대학에서 1등 자리도 여러 번 차지했고, 전국 간호학생회의 회장도 맡았다. 대학교 2학년 때 남편을 만나 스물다섯에 결혼을 하고 이 시골로 들어앉아버렸다. 사대부 집인 줄은 알았지만 이렇게 큰 종가인 것은 몰랐다고 한다. “기독교 동아리에서 남편을 만났어요. 고등학교 때 국어 선생님이 이야기해준 오리 정승이 이 사람의 선조였지요. 유독 오리 정승 기억이 생생했는데 이게 인연인가보다 생각했답니다.”

◆ 일찍부터 개화한 종가

13대 종손인 이승규 씨는 4대 독자, 손이 귀한 집이라서 증조부도 양자로 삼아왔다. 오리 대감이 워낙 청렴결백하여 오랜 세월 높은 벼슬을 하고도 인조 임금이 하사한 5칸짜리 관감당이 재산의 전부였는데 증조부는 집안이 가난해 양자로 와서도 굶는다며 재산 늘리는 데 힘을 쏟았다. 번지가 생겨나던 일제시대 때 땅을 많이 부쳤다고 한다. 지금 박물관 터도 증조부가 산 터고, 종가의 ㄱ자 안채도 그때 지어졌다. 선진 문명에 밝았던 증조부는 일찍이 아들을 미국, 일본으로 공부하러 보내기도 했다. 당시 신문물을 공부했던 그분이 늘 제사를 없애라는 편지를 썼다고 한다. 그래서 종부가 시집 왔을 때 제사가 있기는 했지만 이 집은 다른 종가처럼 열두 달을 제사 지내는 데 보내지는 않았다. 대를 이어 종손인 이승규 씨도 마찬가지로 합리적이다. 본인이 경험해보니 30~40대의 한창 일할 나이에 각지에 흩어져 있는 조상의 봉분을 하나하나 살핀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본인이야 사람도 사고 시간도 쪼개어 묘지기 노릇을 했다지만 자식대에 같은 어려움을 남겨놓고 싶지 않아서 해마다 이장하여 가족묘를 만들고 있다. 1. 서울과 광명 두 곳의 집을 오가며 관리하는 종부. 올가을에는 서울 집을 정리하고 아예 내려올 예정이라고 한다. 지난주에는 장을 담그러 내려왔었다. 장독대 항아리에는 갓 담근 장이 가득하다. 2. 안채에서 바라본 마당. 안채의 격자 유리문은 낡고 해져서 한옥을 전문으로 하는 사람을 수소문해 수리하였다.

◆ 가문을 위해 일하는 13대 종부

부부가 차근차근 공부를 해보니 오리 정승은 집안 뿐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본받을 것이 많은 훌륭한 어른이었다. 그에 비해 너무 덜 알려져 있는 것이 안타까워 박물관도 열고 이래저래 일을 도모하게 되었다고 한다. 2003년 충현재단을 세우고 이듬해 박물관을 열었다. 아무래도 재단으로 세워두면 후손들도 임의로 경솔한 결정을 내리지 못할 테고, 보존도 더 수월할 거라는 생각이다. 사실, 개인이 박물관을 운영하는 것은 품도 많이 들지만 비용이 가장 큰 문제다. 재단으로 운영하고, 박물관은 몇 천원의 입장료를 받고 있지만 그 돈은 인건비며 관리비 등 전체 운영비의 불과 5% 정도도 해결하지 못한다. 매 해 억에 가까운 자비를 쏟아부어가며 유지하고 있는데 이렇게 가다간 제풀에 지칠 것 같아 수익 사업이나 다른 방법을 궁리 중이라고 한다.

칠십을 바라보는 종부는 올 봄 학기 문화예술행정 대학원에 등록했다. 책만 펴면 눈물이 줄줄 나는 노안이지만 박물관을 제대로 운영하려면 필요할 것 같아서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뿌듯하게 일을 하며 살 거라는 스물다섯 처녀의 꿈은 박물관장을 하면서, 오리 유적을 도맡아 관리하면서 이렇게 올곧게 이루어진 것이다.

1, 안채는 1917년 증조부가 ㄱ자로 지은 집에 할아버지가 ㄱ자로 증축을 하여 현재는 ㅁ자형 13칸 가옥이다. 문중 행사뿐 아니라 안팎으로 모임이 있을 때는 종가로 내려와 손님을 치른다.

2, 팔작 지붕에, 회벽을 바른 관감당 뜰에는 4백년 된 측백나무와 1백년 이상 된 향나무, 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다. 사철나무가 있어 겨울에도 황량하지 않은 풍경이다.

▶ 오리 이원익 유적지 찾아가기

광명시 소하동에 위치한 오리 이원익 유적지에는 조선 중기 명상 이원익의 문집과 서간, 영정 사진과 함께 조선시대와 개화기에 이르기까지의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관감당과 종가, 정자, 서원 등 드물게 볼거리가 많은 유적지다. 나무 푸르고 꽃 피는 계절에 찾아가면 정성 들여 가꾼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다.
박물관은 전화 예약 후 관람 가능, 유료.
문의 02·898-0505, www.chunghyon.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