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죽음도 무디게 만들고....미움도 사랑으로 바꾸는 힘이 있나 보다.
내가 추억하는 할머니는 아랫목에서 도란도란 옛날 이야기를 말씀해 주시는 그런 인자한 할머니가 아니었다.
항상 '빌어먹을 년'이 내 언니와 날 부르는 호칭이었고 익숙한 욕설이었다.
학창 시절에 친구들과 학교 앞 분식점에서 맘 편히 떡볶이를 먹으며 떠들어본 기억이 별로 없고, 집에 가서 '아...피곤해..'해며 책상에 가방을 던지고 누워본 기억은 전무할 정도로....
늘 집안 일과 내 빨래감과....막내 삼촌의 협박으로 불안한 나날이 계속 되었고.....-민감한 사춘기에 느끼는 고통은- '차라리 죽는 게...어쩌면 더 행복한...' 그런 삶을 근근히 버텼던... 그런 시간의 연속이었다.
그런 과거도....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떠올리면....아주 아름답게 포장되고...감상적인 느낌으로 아련히 떠오르는....그런 힘이 있나 보다.
음지가 양지되고 양지가 음지 된다더니....
그리 떠받들던 자식들이 하나 둘....치매 증상을 보이는 할머니 곁을 떠나고...
이젠 '보호 시설'을 공식적으로 운운할만큼 가까운 미래에 할머니가 기거하실 장소는 치매 노인 보호시설이 될 것 같은 분위기 막바지에....아주 잠깐 우리집에 다녀가셨다.
일주일을 못 채운 기간이었지만, 오신 첫 날부터 토하기 시작하고 진지를 드시지 못하길래 내내 죽으로만 식단을 구성했고 간간히 간식으로 '사과 간 것'과 요구르트 등 소화에 신경을 써야 했다.
게다가 이젠 청력도 현저히 떨어져서 귀에다 소리를 질러가며 말을 전해야 하고...치매 중기쯤으로 접어드는 시기라서 지금 있는 장소가 어딘지...눈 앞의 사람이 누군지...재롱떠는 아이들의 정체가 누군지...내가 지금 자야하는지 일어나 있어야 하는지....그런 자각이 전무한 상태라 시시때때로 '할머니 자식들이 몇 명이예요? 지금 여기가 어디예요? 제 이름이 뭐예요? 지금 드시는 게 뭐예요?'를 반복해서 질문을 해도 그때 그때 답이 달랐다.
더구나 화장실은 수백번 드나드시고도 가시기 전엔 '화장실이 어디나?' 물어보시고 '내가 잤던 방이 어디나?'며 좁은 집을 탐문하셨다.
잠드시기 힘들어서 한번 잠들어도 깊은 잠을 못자고 밤새 뒤척이고 수십번 일어나시더니 급기야 방방마다 문을 열어 확인하시고 다시 주무시고....
혼자 생각해야 한다며 아이들에게도 할머니께 화장실 일러드리지 말라고 '화장실...할머니가 찾아보세요...' 했더니...뒷베란다 냉장고 앞에서 볼일을 보시고 들어오시곤 '*도 저기다 누나...?' 하시며 신기해(?) 하셨다.
'할머니....자식들 몇 명이예요...?'
-하나...둘...셋.........다섯명이나...?
'7명.....언니랑 나까지 9명이라고 했잖아요...??'
'그랬다고....?'
'첫째 이름이 뭐예요?
-준기...
어디 갔어요?
-외국 갔나..?
'하늘나라 갔잖아요....우리 아빠였잖아요.....제가....준기 딸이잖아요...제가 누구라구요?'
-........경희....
'할머니 그건....여섯째 자식이고....제가 누구예요..?
-손주딸.......이름이 뭐더라...?
'은미.....할머니 손녀,..'
-응....그래...
그리고 둘째 이름은...?
-.........아이고 모르겠다. 누구나...?'
'준원이...'
세째는...? 네째는...? 다섯째는...? 여섯 일곱째는....??
이런 질문을 하루에도 몇 번씩 반복했는데....
참...이상했다.
다른 살아있는 자식들은 이름을 하나도 제대로 못대도,,,,죽은 큰아들 이름은 한번도 잊질 않으신다.
치매다 뭐다....그리도 깜빡하고 아무 것도 몰라도....
죽은 자식을 가슴에 묻은 부모 맘인가 보다.
할머니를 안고 밤 12시가 넘어서 통곡을 했다.
'할머니...안그러셨잖아요...? 할머니 똑똑했잖아요...?'
-'..........그러니까 화장실이 어딘지 가르쳐 줘야지...'
그런 할머니가 작은 집으로 가시고 나는 차를 타고 서울로 향하는 내내 세 시간을 울었더니....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어쩌면.....아무 것도 모르실 할머니 머리가....더 아플 거다.
자신이 지금 어디로 가는지...내 앞에서 자꾸 목소리를 꽥 꽥 질러대는 사람이 누군지....나름대로 파악하시느라....

** 다시 읽어보니....엄청 구박만 받고 산 동화 속 주인공처럼...그니까 신데렐라나 콩쥐나....뭐 그런 식으로만 그려진 것 같은데.....
할머니 입장이나...막내 삼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언니와 저만 싸고 도는 할아버지가 미웠을 수도 있어요,
비슷비슷한 나이인데....자기 아들이 누리지 못하는 걸 손녀들은 누리고 사니까....제 자식이 먼저인 할머니는 우리가 미웠을 꺼고.....자기 엄마를 등에 업고 우리를 눈엣 가시로 보던 삼촌도 입장이 어느 정도 이해는 가구요.
할아버지는....과하다 싶을 정도로 저희에게 사랑을 쏟으셔서....오히려 다른 식구들이 우리한테 애정을 못 줬을 수도 있어요.
물론 고모들이야 지금도 미안할 정도로 우릴 챙겨주지만, 어렸을 땐.....받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우리한테 사랑을 안주는 할머니나 삼촌을 미워했어요, 많이.....
그 시절엔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조차 갖지 못한 '레이스 달린 잠옷'이나....어린이 날 선물로 동화책 전집 같은 걸 받았어요.
'마론인형'이라고 불리는 바비 인형도 네 개나 되었고.....그 당시 제 친구들이 제일 부러워 하던 인형 세간살이는 거의 갖춰져 있었지요.
그러구 보니....제가 부모 없는 설움을 받으며 컸다고는 하지만.....울 애들한테도 그렇게는 못 주고 사네요.
부모....그 자체가 이미 많은 걸 준다고 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나 봐요.
제 아이들은 그걸 느낄 수 있으려나....?
'부모'라는 자체가...곁에 있다는 거 하나만으로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얼마나 행복한 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