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 얘기하는 사람이 나라서 무조건 내가 잘했다는 건 아니다.
다만 확실한 건....남편과 나 사이에 명쾌한 커뮤니케이션이 안되고 있다는 것과 너무도 천진난만한 남편을 둔 덕에....그 날의 가출은 감행되었다.
그저 내 맘이 저 사람 맘이겠지....하는 남편의 버릇처럼 그 날도 아픈아이 3박4일 돌보기가 얼마나 힘든지 꿈에도 알 턱이 없는 남편은 그 전날 친구들과 마신 술의 여독으로, 내 기분과 컨디션과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눈치채지 못하고....이불을 좀 깔아달라는 내 청을 거부하고 자리를 옮겨 잠자리에 드는 죄밖에 없었던거다.
평소에도 고목나무에 매달린 매미 형상을 하고 있는 딸아이는 아프다는 상황을 십분 발휘하여 3박4일을 내게 안겨 도대체 내려갈 생각을 안하고 징징거리고 있었고, 넘쳐나는 에너지를 주체 못하는 아들내미는 그 3박4일을 씻김굿 하는 무당처럼 내내 펄쩍펄쩍 뛰고 있었으나 내 기분은 평소와는 사뭇 분위기가 다른 쪽으로 흘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손대면 톡~하고 터질것만 같은 그대인 양 이미 머리의 뚜껑은 열려 있었고 이런 내 분위기와는 대조되게 너무도 평안하게 잠이 든 남편에게, 울다울다 이제 목이 쉬어버린 딸아이를 맡기고 눈에 띄는 점퍼를 걸치고 '술 한잔 마시고 온다'며 지갑하나 달랑 챙겨 집에 있던 그 차림 그대로 가출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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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워낙 관심이 없었던 나지만...그날따라 티비에서 많이 보이던 그 흔한 포장마차도 다 어디로 사라졌고 그 때서야 지갑안엔 아무데라도 호기롭게 다녀올 왕복 택시비도 없다는 게 생각이 났고 월남치마에 꽃달린 검정고무신이 그 날의 살떨리는 추위엔 너무도 안어울리는 코디였음이 집 밖을 나오자마자 밝혀졌다.
마땅히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소도 없고 갈 데도 마땅찮은 시간대에, 그래도 기세좋게 집을 나온 배짱으로 무작정 며칠동안 다녔던 아이 병원 가는 길을 그대로 왕복달리기 하며 수많은 술집과 주점을 밖에서 답사해 봤지만 도대체 들어갈 곳이라곤 한 군데도 없었다.
(......................................사실 무서운 생각도 들었고.........)
양 볼은 추위에 얼얼해져 표정근은 마비상태에 들어갔고 빠른 걸음으로 20여분 되는 거리를 왕복달리기를 해놔서인지 다리도 아파오고 거의 폭발직전까지 같던 감정의 기복도 많이 릴렉스된 거 같아 집 앞 가게에서 포천막걸리와 강릉 동동주를 비교하고 고심 끝에 동동주 쪽으로 결정하고 복숭아통조림을 안주로 골라 집으로 들어갔다.
내 각본대로라면.... 평소 교양과 지성과 품위를 지키고 있던 부인의 가출에 남편도 적잖이 당황하고 아이들도 엄마의 부재에 심히 방황하고 있으리라 여겼건만......................
내 머리 뚜껑을 열리게 한 직접적인 원인제공을 한 딸내미는 대ㅡ자로 뻗어 자고 있었고 남편은 이불을 펴고 코메디 프로를 껄껄 웃으며 보고 있었고......그나마 아들아이의 눈에서 눈물 흔적이 보여 조금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나중에 아들내미한텐 엄마가 아빠한테 과일통조림 사러간다고 분명히 얘기했었는데 몰랐냐고 막 우겨댔다)
여자의 가출...더구나 아줌마의 가출도 사회가 어느정도 분위기를 조성해줘야 성공을 한다.
내가 가출을 감행해 본 결과, 우리나라에서 여자가 가출을 해서 단 몇 시간을 버텨보기란 사회의 분위기상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게 되어 있다.
더불어 이 사회에 요구하는 건 여자들의 단 몇 시간의 일탈을 허용해 줄 것과 그 일탈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줄 여자들만의 주점을 만들어 달라는 것이다.
내가 로또에 당첨이 된다면 아줌마들이 아이들을 데리고도 눈치 안보고 편안히 쉴 수 있는 까페와 여자들만 갈 수 있는 주점 하나 만들겠다. 나를 국회로 보내달라...
*** 에필로그: 동동주 한잔 이상 마시는 게 목표였으나 한잔으로 마무리 했고 아들내미가 통조림 국물(?)로 나의 술친구가 되어 주어 결코 외롭지 않은 술자리를 할 수 있었고 '엄마의 행복을 위하여!!' 아들내미는 건배를 해 주었다.
이 자리를 빌어 '술 한잔 했냐?'며 덤덤히... 가출한 아내를 웃으며 맞아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