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인터넷 속 또 다른 나의 발견] 초록주유소

태백산 하늘님, 메리 크리스마스

[오마이뉴스 정근영 기자]지난 25일 새벽 어스름을 헤치고 택시를 잡아탔다. 등산복 차림의 일행을 보고 택시기사는 “이렇게 추운데 소풍을 가요?”하고 말을 건넨다. 새벽 여섯 시에 집을 나서 밤 열한 시가 넘어서 돌아왔다. 고속도로로 교통이 좋아져서 일일 생활권이 되어 이 나라 어디이고 하루 만에 여행을 다녀오기는 한다. 하지만 차안에서 10시간 이상 갇혀 지내는 여행이 고역스럽기도 하다. 이 생각도 잠시, 차에서 내리면 오늘 여행을 잘 다녀왔다는 보람이 남아 쉬는 날이면 말 타고 달리며 구경하는 여행이지만 재미는 있다.

태백산. <삼국유사>에는 환웅이 처음 내려와 신시를 베푼 산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 산은 한반도의 어느 산인지 확실하지는 않다. 백두산이라는 설이 정설처럼 되어 있기는 하지만 오늘 오른 태백산도 단군신화와는 무관한 것 같지는 않다.

태백산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천제단이 세 군데나 된다. 천왕단과 장군봉, 하단이 그것이다. 천제단은 산 정상에 있다. 이렇게 산꼭대기에 제단이 있는 곳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일이라고 한다. 하늘의 자손임을 믿고 하늘을 숭배해 온 우리 겨레는 하늘에 대한 신앙이 지극하기 때문일까. 이 나라 곳곳에 하늘에 제사 지낸 천단이 있다.

▲ 눈길을 즈려 밟고 태백산을 오른다

태백산 등산길은 정보지에 따라서 다소의 차이가 있으나 많게는 5개 정도로 잡는다. 오늘 등산길은 유일사 길로 유일사 매표소에서 등산을 시작해 유일사 천제단을 거쳐 망경사로 해서 당골 광장으로 내려오는 것이다.

아침 7시에 부산을 떠나서 태백산 주차장에 도착했을 때 시침은 12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을 먹기 위해 차에서 내리니 찬바람이 가슴을 스며든다. 일행 중 누군가가 “어이, 추워. 교회 가는 것 보다 못한데”라고 한다. 크리스마스. 독실한 신자라면 등산보다는 교회에 갔겠지.

▲ 눈밭에 서서 추위와 맞서다

차 안에서 향목 산악회에서 준비해 온 김밥을 들었다. 싸늘하게 식은 김밥이지만 아침밥도 먹지 않고 나선 길이라 굶주림은 면할 수 있었다. 종이컵에 따신 국물을 받아 마시니 그런대로 요기는 된다.

눈이 왔다고는 하지만 서툰 산골 새악시 화장한 것 마냥 눈가루가 부슬부슬 흩날릴 때면 속살이 다 드러난다. 날씨가 추운 탓인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산을 올라가지만 좀체 땀이 솟지 않는다. 아이들은 좋아라고 눈을 긁어서 던진다. 산길로 들어서니 추위는 덜하다. 숨길도 골라지고 추위도 밀려간다.

▲ 하늘을 뒤덮은 주목의 구부러진 가지들

주목 군락지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을 간다는 주목. 몇 그루나 되는지 가슴팍에는 이름표를 달고 섰다. 이름표에는 관리 번호가 선명하다. 다 죽은 것 같은 나무 등걸에 몇 개의 이파리를 달고서 ‘나 살아 있어’ 하는 것 같다.

저기 저렇게 앙상하게 뼈만 남은 주목들, 그렇다면 2천년이나 된 것일까. 그들이 듣고 보고 한 이야기가 궁금하다. 주목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나 바람 소리만 들릴 뿐이다.

▲ 멀찌감치서 바라본 유일사

한참을 오르니 눈 아래 골짝에 유일사가 나타난다. 손님을 모시려는 손길은 계단의 눈을 말끔히 쓸어 놓았건만 쫓기는 시간에 먼 발치에서 카메라의 셔터나 누르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태백산에는 유일사를 비롯해서 심원사, 망경사, 만덕사, 청원사들과 같이 여러 절이 있다. 모두가 신라 때의 자장 스님이 창건했다는 전설만을 얻어 들을 뿐, 그 이상의 정보는 얻지 못했다.

▲ 천제단, 천지하감지위

▲ 동상이몽,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선이 각기 다르구나

산길을 오른 지 두 시간이나 되었을까. 드디어 천제단에 이르렀다. 돌벽이 성곽처럼 쌓여 있다. 안내판에서 읽은 천제단은 높이가 3m, 둘레가 27m, 너비가 8m라는데 그렇게 커 보이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천제단이 따로 있을 것 같다. 이것은 그 정도의 크기에 훨씬 미치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다.

역시 그랬다. 저 멀리 또 하나의 돌벽이 보였다. 그곳이 바로 천제단이었다. 천제단은 3군데라고 하는데 안내판의 천제단은 아마도 가장 큰 천제단인 천왕단을 말하는 듯했다. 천제단은 1991년에 중요민속자료 제228호로 지정됐다. 언제 만든 것인지는 알 수가 없고 고려, 조선 시대까지 이곳에서 천제를 지냈다고 한다.

아니 지금 이 순간에도 등산객들이 천제를 올리고 있고 무당이 천제를 올리고 있다. 한말의 우국지사들도 나라를 되찾기 위해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한말 의병장인 신돌석 장군은 이곳에서 백마를 잡아 천제를 올렸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에는 독립투사들이 이곳을 찾아 천제를 올리기도 했다는 것이다.

▲ 한배검께 귀의합니다

서기 137년 신라 일성이사금이 이곳에서 천제를 올리고 370년엔 기림이사금이 이곳에서 제사를 지내자 낙랑과 대방이 항복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태백산 천제단은 하늘과 통하는 그런 성스런 곳인가 보다.

지금도 강원도에서는 도민 체육대회를 할 때면 이곳에서 채화를 한다고 하니 천제단은 아직도 하늘과 통하는 민속 신앙, 아니 민족신앙의 중심에 서 있는 것 같다.

천제단은 위쪽은 원형이고 아래쪽은 사각형이다. 이것은 우리 선조들의 우주관을 나타낸 것이다. 즉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라는 생각을 표현한 것이다.

태백산 꼭대기는 넓었다. 수백 수천의 인파를 수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산 꼭대기에 이렇게 넓은 평원이 있다는 것은 놀랍다. 관광 안내판에 적혀 있는 안축의 싯귀가 가슴에 머문다. 안축은 고려말의 문인으로 관동별곡, 죽계별곡 등을 남겼다.

태백산에 올라

긴 하늘 바로 지나 자연속에 들어섰다.
그제야 알고 보니 절정에 올랐구나
한덩이 흰 해는 머리위에 나직하고
사방 뭇 산들은 눈앞에 깔렸구나
몸이 구름을 쫓아가니 내가 학을 탄 것인가.
길이 벼랑에 걸렸으니 하늘 오르는 사다리인듯
비와서 일만 골짜기 물이 휘몰려 넘치니
구비쳐 도는 오십천을 건널일이 걱정이다.

태백산 학을 타고 산을 내려오려니 발걸음이 가볍다. 단종비각에 이르렀다. 단종이 왕위에서 쫓겨나 영월에서 귀양살이를 하고 있을 적에 이곳 관리 한 사람이 태백산에서 산과를 따서 드렸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밤 꿈에 단종이 나타나 이상히 여긴 그는 산과를 따서 영월로 갔더니 단종이 그날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단종은 태백산의 산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비의 글씨는 탄허 스님의 글씨라고 한다.

▲ 우리 나라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샘물, 용정이다. 이 물 한잔 들고 용꿈을 꾸시라.

단종비각 바로 곁에 망경사가 있다. 갓 태어난 듯한 문수보살상이 눈에 들어온다. 돌이 너무 깨끗해서 역사가 느껴지지 않는다. 문수보살에 얽힌 전설에 힘이 느껴지지 않는다. 용정이란 샘 앞에 섰다. 예사로 보아 넘길 샘이 아니다. 용정의 샘물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것이 다행이다. 용정은 우리 나라 샘물 가운데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것이라고 한다.

▲ 당골의 단군성전

높이 1567m에 넓이 7.44제곱킬로미터의 강원도 도립공원 태백산을 내려와 당골 광장에 이르니 태백석탄 박물관이다. 이제 석탄은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는 것일까. 가난한 광부의 삶이 박물관 구석에 박혀 있다.

▲ 태백석탄 박물관, 이제 석탄도 박물관에서나 보게 되는 것인가.

먼 곳을 오가다 보니 가보고 싶은 곳이 있어도 발길을 재촉하며 놓칠 수밖에 없다. 태백산은 우리 한겨레의 역사가 시작된 곳이라서 그런지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가 태백시 안에 있다. 한강의 시원지 검룡소, 낙동강의 발원지 황지를 놓치고 가는 아쉬움을 안고 발길을 돌렸다.

/정근영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