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쌍봉사의 가을은 고즈넉했네 |
[오마이뉴스 서부원 기자]남도의 고즈넉한 산사에도 가을은 어김없이 찾아왔습니다.
10월의 마지막 주말, 전국 어디서나 각 지방의 특색을 한껏 뽐내는 축제가 한창입니다. 종류가 하도 많아 지방자치단체 한군데에서도 축제가 서넛인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다 보니 다른 곳에서는 없는 독특함은 찾아볼 수 없고 모두 고만고만한, 축제를 위한 축제인 경우가 허다합니다. 볼거리 한 가지만을 가지고 돈벌이를 위해 곳곳의 축제마다 찾아다니는 '전문 상인'이 등장할 지경입니다.
가을의 절정기, 찾아볼 만한 곳은 어김없이 '축제 중'이고 넘쳐나는 사람들로 장사진입니다. 아마 내년 이맘때쯤도 그럴 겁니다. 가족끼리 차분하고 오붓하게 가을을 느낄 수 있는 곳이 그리운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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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쌍봉사의 얼굴 격인 철감선사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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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서부원 |
| 철감선사부도와 탑비라는 걸출한 문화재를 거느리고 있으면서도, 고풍스러운 건축물과 정돈된 가람 배치로 산사 특유의 예스러움을 자아내면서도, 찾는 사람이 적어 고즈넉한 분위기를 여전히 간직하고 있는 전남 화순군의 쌍봉사를 찾았습니다.
막바지 단풍을 즐기려는 인파가 전국의 도로를 메웠다는 신문과 방송의 뉴스는 적어도 이곳과는 별 관련이 없습니다. 광주에서 보성에 이르는 29번 국도는 화순, 장흥 지역의 유명 관광지를 찾는 인파로 늘 북적입니다.
하지만 화순 이양면 소재지를 벗어나 보성 방향으로 좌회전하여 쌍봉사에 이르는 길은 이상하리만큼 늘 한적합니다. 29번 국도를 벗어나 절에 이르는 도로도 6km나 되는 짧지 않은 길이지만, 그 흔한 '가든' 하나 찾기 어려운, 농촌 정취가 물씬 나는 정겨운 길입니다.
멀리 떨어진 도로 위에서도 절의 위치를 단박에 알 수 있습니다. 절의 담장 위로 불쑥 튀어 오른 대웅전 때문입니다. 안타깝게도 화재로 소실되어 새로 지은, 얼마 안 된 목조 건물이지만, 우리 나라에서 유일하게 3층으로 된 목탑 양식의 법당입니다. 충북 보은의 법주사 팔상전과 함께 우리 나라 목탑의 실체를 보여 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 화재를 당하지 않았다면 절의 '격'이 달라졌을 위대한 목조 건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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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년 소실되어 다시 지은 3층 목탑 양식의 쌍봉사 대웅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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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서부원 |
| 도드라진 단청 등으로 인해 사찰 건축이 주는 옛스러운 맛은 없지만, 주변과 잘 어울려 '튀는' 부담스러움은 없습니다. 아마도 산사에도 어김없이 찾아온 울긋불긋한 단풍의 색채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또, 멀리서도 눈에 띌 만큼 높게 솟아 있지만 바로 곁에 수령이 족히 백년은 넘은 듯한 느티나무로 인해 위압적이지도 않습니다. 절묘한 조화입니다.
대웅전 오른편에 자리한 승방에는 이미 가을이 만개했습니다. 여느 곳과는 달리 건물에 딸린 소담한 대문이 있고, 그 옆으로 붉게 물든 단풍이 대문 담을 넘어가고 있습니다. 누군가 문을 나서며 반갑게 손님을 맞이할 것만 같은 (승방이 아닌) 이웃집입니다. 그 느낌은 다 같은지, 지나는 관람객마다 대문 앞에서, 또는 그 옆 단풍나무 앞에서 연신 포즈를 취하며 사진 찍는 데 열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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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들이 생활하는 승방의 돌담에도 가을은 이미 와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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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서부원 |
| 쌍봉사에서 가장 오래된 듯한 극락전도 넘쳐나는 가을에 포위 당했습니다. 어른 두 사람이 안아도 다 두르지 못할 정도의 굵은 나무가 비스듬히 누워 있습니다. 오히려 그런 모습이 단청이 지워져 더욱 고풍스러운 극락전과 잘 어울립니다.
더구나 나무를 덮은 아이의 손바닥만한 단풍잎들에 초록과 빨강이 절묘하게 섞여 그 빛깔이 참으로 기기묘묘합니다. 단풍이 한창 붉게 진행되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쪽에서 보면 그 단풍나무의 화려한 빛깔이 극락전의 단청을 대신하고 있는 듯합니다. 단청보다 더 단청 같은 색을 자연은 그렇게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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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쌍봉사 극락전 오르는 계단에 수문장처럼 지키고 선 늠름한 단풍나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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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서부원 |
| 극락전을 지나 왼편으로 난 차분한 산길을 올랐습니다. 철감선사부도와 탑비를 만나러 가는 길입니다. 누군가 쌍봉사라는 절 이름을 안다면 아마 이 두 문화재 때문일 겁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두 문화재보다도 만나러 가는 '길'이 더 국보(?)답습니다.
길 왼편의 뽀글거리는 실개울과 길 오른편의 얕은 바람에도 서걱거리는 대숲이 산사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없이 맑게 해줍니다. 욕심을 더 내어 대숲 안으로 들어가 깊은 숨이라도 쉴라치면 몸까지 깨끗해지는 듯합니다. 이곳에서 생활하시는 스님들도 그 느낌을 아셨던지 오르는 길 옆으로 소담한 약수터와 풀로 이어 덮은 정자를 세워 두었습니다. 찾는 이들을 위한 따뜻한 배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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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감선사부도와 탑비를 찾아가는 한없이 편안한 대숲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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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서부원 |
| 그 길의 마지막, 돌계단을 쉬엄쉬엄 오르면 장인의 섬세한 손길이 느껴지는 두 석물이 나란히 세워져 있습니다. 쌍봉사의 주인공들입니다. 국보 제57호로 지정된 철감선사부도는 얼마 전 도굴꾼들에 의해 넘어지는 수모를 당했다고 합니다. 그 때문인지 덮개돌이 유난히 많이 상처를 입었고, 야트막한 철제 울타리의 모서리마다 CCTV가 설치되어 사뭇 위압적인 분위기가 감돕니다.
인간들의 비뚤어진 욕심에 의해 훼손된 문화재를 만나는 심정도 물론이려니와 또 다른 인간들에 의해 설치된 문화재 보호 장비조차도 찾는 이들의 마음을 안타깝게 합니다. 울타리에 갇혀 늘 감시 받고 있는 부도와 탑비의 심정도 별반 다르지는 않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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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철감선사부도와 탑비가 나란히 세워져 있는 고즈넉한 뜨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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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4 서부원 |
| 두 석물이 마주보고 있는 뜨락에 제법 큰 감나무 한 그루가 수문장처럼 지키고 서 있습니다. 쌍봉사의 가을 정취를 마무리하는 소중한 소품입니다. 곧 떨어질 듯 아슬아슬 매달린 감 곁에 새가 한 마리 앉아 있었습니다. 순간을 포착하기 어려워 사진에 담아내지 못했지만, 눈과 가슴에 그득 담아 내려왔습니다.
울긋불긋한 단풍으로 주변을 화려하게 꾸며놓았지만, 그래도 인적이 뜸한 쌍봉사의 가을은 고즈넉했습니다.
/서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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