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인터넷 속 또 다른 나의 발견] 초록주유소

산은 말이 없고 가을은 자신을 태운다

[오마이뉴스 윤희경 기자]

▲ 수채화로 변한 가을 산

가을은 하늘이 가까운 곳으로부터 산을 잠재우며 내려온다. 개옻, 단풍, 북나무를 시작으로 갈참나무, 물푸레, 머루, 칡덩굴 등…. 차례로 옷을 갈아 입힌다. 여름내 푸르렀던 영혼들은 간 곳 없고 산 전체가 수채화로 변한다.

단풍이 보고 싶어 길을 떠났다. 가리산 단풍은 언제 보아도 사람을 자지러지게 만든다. 강원도 홍천에서 인제를 넘기 전 두촌에서 좌회전하면 막 바로 가리산 휴양림에 가서 닿을 수 있다. 아니나 다를까. 산을 들어서자 눈을 홀릴 듯한 단풍 숲하며 맑은 물, 그림 같은 개울 골짜기가 턱하니 가슴을 쓸어 내린다.

"가리산님, 제가 왔습니다."
"어서 오너라."
"저를 안아 주세요."
"그래, 안기려무나."

▲ 갈참나무에 달린 겨우살이

말이 끝나자마자 가리산 산신령과 단풍 숲은 그냥 그대로 나그네를 안아 때때옷으로 갈아 입힌다. 금방이라도 옷을 벗어 짜면 붉은 물이 죽죽 흘러나올 것만 같은 단풍 숲,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노라니 새빨간 물감이 좌르르 흘러내린다.

▲ 단풍이 된 사람들. 한점 산이 되어 정상을 오르고 있다.

단풍은 붉은가 하면 노랗고 노란가 하면 또 붉다. 어찌 이리 곱고 아름답더란 말이냐.

▲ 가리산 정상. 목말을 태워 주세요

신갈나무는 몇 살이나 먹었을까. 얼마나 많은 세월에 단풍이 물들고 시들어 몸살을 앓는 모습을 지켜 보았을까. 단풍이 지고 또 지면 지금처럼 구멍이 풍풍 뚫리고 파여 고사목이 되는 자연의 이법을 단풍은 알고 있을까.

▲ 정상에서 내려다 본 가리산 단풍. 멀리 소양댐이 보인다

"헉-헉헉--." 기를 쓰고 팔부 능선에 오르니 갈참나무는 벌써 옷을 벗고 겨울 준비를 하고 있다. 겨우살이 풀 한그루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배시시 웃고 있다. '아저씨, 숨 좀 쉬어요.' 헉헉한 숨소릴 돌려 놓는다.

▲ 노랗게 단풍든 소나무

가리산 제1봉으로 가는 길은 높고 가파르다. 정상을 향해 오르고 또 오르고…. 숨이 막히고 다리가 달달 떨린다. 그러나 가쁜 숨이 문제랴. 거기엔 산이 있고 정상이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을…. 숨을 헐떡거리고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힘든 줄을 모른다. 어느새 산이 되고 산에 매달려 한점 단풍으로 물이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리산 정상 1051m에 서 본 사람만이 산이 주는 기쁨을 안다. 그리고 겸손을 배운다.

▲ 석양을 받은 단풍과 골짜기

"가리산님, 저 목말 좀 태워 주세요."
"그래, 올라타렴."
"산님, 철 모르는 사람들이 산을 정복했다고 한다면서요?"
"그렇단다. 산을 정복하다니. 쯧쯧…."
"목말을 탄 기분예요. 옛날 아버지 어깨에 탔을 때처럼 말예요."
"그래, 목말 참 오랜만에 들어 보는구나. 어서 오르거라."

가리산은 어느새 목말을 태우고 하늘을 날고 있다. 둥둥…둥 둥둥…두리두리 둥둥…. 산은 아버지처럼 편하다. 넉넉한 어깨에 목말을 타고 춤을 추며 붉게 물든 산 아래를 내려다 본다. 소양댐, 한강의 젖줄이 까마득히 반짝이고 있다.

▲ 단풍. 붉은가 하면 노랗고 노란가 하면 붉다.

보고만 있어도 행복하다. 소나무는 천년도 더 버티어 냈을 바위산에서 푸른 빛을 더하며 자신을 조금씩 털어 내고 있다. 속옷만 벗고 나머지는 푸른 모습 그대로다. 수선을 떨지 않아도 산 속 어른이 되어 의젓하니 늠름한 모습이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다. 붉게 타오르는 가을 산을 바라보며 내 성숙의 깊이를 재어 본다. 단풍이 되어 활활 타다 남을 것인가. 소나무처럼 자신을 조금씩 털어 내며 청청한 모습으로 영혼을 씻어 내릴까. 산은 말이 없고, 가을은 조금씩 자신을 태우고 있다.

▲ 많은 세월을 견디어 낸 고사목

/윤희경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