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줄탁 - 도종환 참 신기한 일입니다. 지난 해 말 연극연출을 하는 친구 ㅂ이 희곡에 넣을 시에 대한 상의를 하기 위해 집에 찾아오면서 장미꽃 한 다발을 가지고 왔습니다. 그때가 12월 하순이었습니다. 집 주위에 늘 꽃이 피고 지니까 구태여 방안에 꽃을 꽂아 놓을 필요를 느끼지 못해 그냥 양동이에 담아 놓았다가 마침 누가 작은 질항아리를 주셔서 거기다 꽂아 놓았습니다. 방안에 꽂을 꽂아 놓기는 처음이었습니다. 대개 집안에 사다 놓은 여느 꽃처럼 한 열흘 피어 있다 서서히 지겠지 하고 생각했습니다. 생각한대로 꽃은 조금씩 시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가 바뀌고 겨울은 깊어갔습니다. 가끔씩 한파가 몰아치기도 하고 천지가 다 꽁꽁 얼어붙어 꽃이 있는 창가와 방안 사이에 커다란 커튼을 쳐서 외풍을 막았습니다. 커튼으로 거실의 반을 막음으로 해서 꽃이 있는 창 쪽은 더 추웠습니다. 겨우내 바닥에 불기운 하나 들어가지 않는 냉골이었습니다. 다만 낮에는 창문보를 걷으면 겨울햇살이 창 가득 들어와 그 온기로 언 방바닥이 좀 녹곤 했습니다. 나도 추위를 견디느라 의자에 앉아서도 무릎담요를 어깨에 둘러쓰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일월이 가고 이월이 갔습니다. 그런데 장미는 언제부턴가 더 이상 시들지 않고 그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삼월이 되면서는 줄기에 싹이 돋기 시작하였습니다. 싹은 자라서 초록의 잎을 피웠습니다. 줄기마다 앙증맞고 예쁜 새의 부리 같은 잎을 내었습니다. 항아리에 꽂아둔 줄기에서 새순이 돋고 푸른 잎이 자라다니 신기한 일이었습니다. 연약한 장미줄기에 무슨 힘이 숨어 있어 삼동의 추위를 견디며 살아남아 새 잎을 내는지 경이롭기까지 하였습니다. 황토집이라서 거기서 나오는 원적외선의 힘이 허리 잘린 꽃을 살아나게 하는 건지 아니면 벽 한쪽이 커다란 통유리로 되어 있기 때문에 창을 통해 들어온 햇살이 온실처럼 온기를 불어넣어 주기 때문인지, 낮은 온도, 통풍, 습도 그런 것의 조화가 꽃을 살리고 있는 건지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지만 내 과학상식으로는 대답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이 꽃에게 생명의 힘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꽃은 초록의 빛을 뿜어내고 있는 것이겠지요. 무엇보다 꽃 내부의 생명의 파장이 늘 멈추지 않고 살아 움직이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이파리를 내고 있는 것일 겁니다. 생강나무 꽃봉오리가 움트고 쥐똥나무 꽃봉오리가 좁쌀 만하게 몸을 열고 나오는 것을 보면서 이건 우주의 줄탁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줄탁이란 알에서 병아리가 나오려고 연약한 부리로 알 껍질을 톡톡 쫄 때 밖에서 어미 닭이 그걸 알고 동시에 알 껍질을 부리고 쪼아 알을 깨고 나오게 만드는 것을 말합니다. 아직 안에서 준비가 되지 않았는데 어미가 알을 쪼면 병아리는 죽고 맙니다. 알속에 있는 생명도 나올 준비가 되고 어미도 그때를 놓치지 않아야 줄탁이 이루어지는 것이지요. 매화나무고 산수유나무고 개나리고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 꿈틀대며 밖을 향해 생명의 입김을 뿜어댈 때 우주가 그걸 알고 봄의 부리로 톡톡 쪼아 꽃봉오리가 열리게 하는 것 같습니다. 봄이 그 따뜻한 부리로 쪼고 간 자리마다 돋아나는 풀, 피어나는 꽃을 보며 생명의 크나큰 힘에 대한 외경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해월 최시형 선생은 물물천(物物天 事事天)이라 했습니다. 자연만물 하나 하나마다 한울님 아닌 것 없고 일마다 한울님 아닌 것 없다는 말입니다. 우주의 힘이 아니면 어떻게 겨울을 이기고 메마른 가지에 꽃 한 송이가 앉을 수 있단 말입니까. 거기 꽃 한 송이 속에 하느님이 앉아 계시는 게 아니라면 어떻게 저렇게 생명으로 충만할 수 있단 말입니까. 그래서 경물(敬物)하라고 했습니다. 천지의 자연 만물 하나도 소중한 생명이요 작은 우주가 거기 깃들어 있는 것이므로 공경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함부로 대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지요. 사물도 그렇다면 사람의 생명이야 얼마나 더 소중한 것이겠습니까. 당연히 경인(敬人)해야 합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그리고 하늘을 공경해야 합니다. 경천(敬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뿌리 잘린 장미도 겨울을 이기고 꽃을 피우며 다시 살아나는 집에서 내가 함께 살았다는 생각을 하자 내 안에서도 푸른 생명의 이파리가 돋는 게 느껴졌습니다. 그동안 우주의 부리로 내 병든 껍질을 톡톡 쪼고 있는 걸 내가 알아듣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줄탁동시(口卒啄同時). 그렇습니다. 나도 힘차게 내 껍질을 깨고 일어서야 합니다. 천지가 이미 자기 껍질을 깨고 나온 것들로 가득하지 않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