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박해현 논설위원
청년 백수의 풍자 담은 소설 '철수 사용설명서'
스펙 쌓기에 지친 청춘의 자조와 해학으로 가득차
남이 원하는 理想型이 아닌 자신의 진짜 얼굴 찾아야
스스로를 먼저 사랑하라 '당신들의 천국'이 오리니
1946년부터 30여년 동안 초등학교 국어교과서의 주인공은 '철수'였다. 철수는 가슴에 흰 손수건을 달고 등교했고, 집에 돌아와선 영희와 함께 냇물에 종이배를 띄우며 놀았다. 철수는 대한민국 보통 남자를 대표하는 이름이 됐다. 금융실명제 이전에 차명계좌를 만든 남자들이 애용한 가명이 '철수'였다.
최근 우리 문단에도 '철수'가 나타났다. 스물여덟 살의 젊은 작가 전석순이 장편소설 '철수 사용설명서'를 냈다. 이른바 '안철수 현상'이 일어나기 전에 그는 '오늘의 작가상'을 받았다. 주인공 철수는 스물아홉 살의 대졸 취업준비생이다. 번번이 입사시험에서 낙방한 철수는 자신을 세탁기에 비유한다. '세탁 기능을 배우는 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헹굼이나 탈수 기능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세탁기'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취업시장에서 '항균 기능'에 '삶음 기능'까지 갖춘 경쟁상품들에 밀려난다. 철수는 소비자들에게 자신을 알릴 사용설명서를 쓰기 시작한다. "철수에게 무리한 힘을 가하거나 충격을 주지 마십시오.…"라는 식이다.
이 소설은 효용과 기능만 강조하는 사회에서 인간을 사물처럼 다루는 규격화와 표준화를 냉소적으로 비판한다. 자조(自嘲)와 해학으로 가득 찬 스토리에 제품 설명서와 소비자의 이용 후기 같은 잡글이 뒤섞인다. 철수는 우등생도 아니었고, 연애도 서툴다. 그를 만나보고 실망한 여자들은 '세탁기인 줄 알았더니 식기세척기'란 평을 인터넷에 올린다.
- ▲ 일러스트=이철원 기자 burbuck@chosun.com
이 소설은 학벌과 외모, 집안 등 뭐 하나 내세울 것이 없는 청년의 취업과 연애 실패담을 통해 우리 사회를 풍자한다. 어릴 때는 학교가 요구하는 대로, 커서는 취업시장에서 요구하는 대로 기능을 업그레이드해야 품질을 인정받는 세태를 코믹하게 비틀고 조롱한다.
안철수의 '청춘 콘서트'에 열광하는 젊은이들이 바로 이 소설의 주인공 '철수'에 해당하는 세대란 점에서 남다르게 읽힌다. 현실의 '철수'세대는 사회인으로 진입하기 힘든 나머지 기성체제에 분노한다. 그들은 '안철수 바람'을 일으키면서 '철수의, 철수에 의한, 철수를 위한 나라'를 꿈꾼다. 게다가 이 땅의 수많은 '영희'들도 철수와 뜻을 같이한다. 영희는 조세희의 소설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난장이 일가의 막내딸 이름이기도 하다.
요즘
미국에서도 대졸 청년들이 취업난 때문에 뿔 났다. LA 타임스는 신세대를 '약오른 세대(generation vexed)'라고 불렀다. 소설 '철수 사용설명서'에선 주인공 철수가 주변으로부터 무시를 당할 때마다 열이 나는 증상을 보인다. 이 땅의 철수와 영희들은 비좁은 취업시장에서 열을 받을 대로 받은 상태다. 소비자에게 불량품 취급을 당한 그들은 왜 '나의 사용설명서'를 제대로 읽지 않느냐고 절규하고 싶다.
신세대의 감성 코드를 이해하려면 독서경향을 알아야 한다. 올해 상반기 전국 345개 대학 도서관에서 가장 많이 대출된 소설책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신', 조앤 K 롤링의 '해리포터' 시리즈였다. '해리포터'가 청소년을 위한 판타지라면, 하루키와 베르베르의 소설은 현실에 환상을 뒤섞었다는 점에서 요즘 대학생들이 좋아하는 문학은 초현실적 상상력에 바탕을 둔 것임을 알 수 있다.
철학자 니체는 "모든 환상이 부정적이거나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라며 "환상은 정신에 필요한 것이어서 인생의 가혹함을 견딜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우리 대학생들이 얼마나 현실에 지쳐 있으면 환상문학이 이처럼 인기를 끌까. 그렇다고 대학생들이 지적(知的) 미숙아인 것은 아니다. 인문서로는 마이클 샌들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가장 많이 빌려봤다. 신자유주의와 공리주의를 비판하면서 공동체주의를 내세우는 책이다. 신세대가 지향하는 사회는 시민의 연대(連帶)를 강조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소설 '철수 사용설명서'는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이란 유행어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은 잘 읽히지만 개그를 뛰어넘는 풍자문학까지 도달하진 못했다는 아쉬움을 남긴다. 주인공 철수를 '루저'의 모든 요소를 다 모아놓은 인물로 그리다 보니, 오히려 현실성이 떨어지고 작위적이란 느낌이 든다. 그러나 철수는 마지막에 '철수 사용설명서를 쓸 사람도, 그것을 가장 먼저 읽어야 하는 사람도 한 사람'이라며 자아성찰의 끈을 놓지 않으려고 한다. 그는 거울에 자신의 이상적(理想的) 모습을 투사하길 그치고 언젠가 자신의 진짜 얼굴을 찾을 것이다. 이 땅의 모든 철수와 영희에게 "너 자신을 스스로 사용하라"고 권하고 싶다. 그래야 진짜 '당신들의 천국'을 세울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