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재의 마술사' 佛건축가 페로
건물 자체의 조형미보다 주변 풍경과의 조화 중시해 '땅을 재단하는 건축가'라 불려
ECC·용산 등 한국서도 인기
최근 한국 대학의 캠퍼스에서는 다양한 건축적 실험이 진행 중이다. 유명 건축가 설계로 독특한 건물을 세우기도 하고, 캠퍼스를 지하로 확장하기도 한다. 지난 2008년 서울 이화여대에 들어선 이화캠퍼스센터(ECC)는 그중에서도 가장 주목받은 사례 중 하나다. 강의실과 식당·영화관·헬스장 등을 모은 복합 시설인 ECC는 지하를 지상으로 끌어낸 듯 독특한 모습을 하고 있다. 깊게 파인 중심부는 거대한 골짜기처럼 보여 '건물'이라고 부르는 게 맞는지 망설여질 정도다. 완공된 뒤에는 캠퍼스의 풍경을 완전히 재창조했다는 호평과 오래된 교정(校庭)의 고즈넉한 정취를 지워버렸다는 비판이 함께 제기됐다.
이 건축물은
프랑스 건축가 도미니크 페로(Perrault·58)의 작품이다. 그는 36세였던 1989년 프랑스 국립도서관 설계자로 선정되면서 세계 건축계의 스타로 떠올랐다. 이후 룩셈부르크 유럽공동체재판소,
독일 베를린 자전거 경기장과 올림픽 수영장 등을 설계했다. ECC로 2008년에 서울시 건축상을 수상했고 용산국제업무지구 설계자 중 하나로 선정되는 등 한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페로는 최근 제주 서귀포시 색달동에 건설 중인 롯데리조트 '아트빌라스' 설계에 참여했다. 지난주 이 프로젝트의 감리를 위해 한국을 찾은 페로를 제주도 공사 현장에서 만났다. 그는 제주 자연에 대한 예찬부터 풀어놨다. "
제주도엔 바다 옆으로 산이 솟아 있다. 산이 높지는 않지만 수평선과 대비되면서 자연의 밀도가 아주 높다는 느낌을 준다. 건축의 배경으로 훌륭한 곳이다." 그는 "현재 건설 중인 리조트의 경우 건물이 제주의 자연을 머금을 수 있도록 외벽을 환하게 트인 통유리를 썼다"고 했다.
- ▲ 페로가 설계한 독일 베를린 벨로드롬(자전거 경기장). 독일이 2000년 하계올림픽 유치에 도전하면서 만들었다. /Georges Fessy/DPA/Adagp
그에게는 '땅을 재단하는 건축가'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닌다. 건축물 주변의 콘텍스트(맥락)를 중시하고, 개별 건물의 조형미보다 건축물에 의해 새롭게 형성되는 풍경에 주목한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에 대해) 한 일본 비평가가 '땅의 디자이너'라는 표현을 쓴 뒤로 그런 별명이 생겼다"고 했다. "서울과 제주도만 봐도 같은 나라이지만 땅이 전혀 다르게 생겼다. 건축물이 놓이는 주변 환경으로부터 해법을 찾아내기 위해 늘 노력한다."
페로의 이름이 한국에 널리 알려지게 된 계기였던 ECC에도 이런 접근법이 반영돼 있다. 그는 "이미 건물이 많이 들어선 캠퍼스에 건물 하나를 또 더하기보다는 새 건축물을 지형의 일부로 빚어내 새로운 풍경(landscape)을 만들어내는 게 목표였다"고 했다. 건축물 상부에 잔디를 심고 산책로를 낸 것도 이런 설계 의도에 따른 결과다. "자연이 차지하는 공간을 늘려 캠퍼스 전체의 녹지 안에서 이질감을 주지 않도록 했다."
- ▲ 스페인 마드리드에 세운 아르간주엘라 보행교(Arganzuela Footbridge). 햇빛이 다리를 통과하도록 금속그물 소재를 사용했다. /Georges Fessy/DPA/Adagp
그 역시 이 건축물이 "급진적(radical)이고 극적(dramatic)인 시도"라고 했다. 하지만 "ECC가 외부에서 기존 건물군(群)으로 이어지는 출입구이자 학교의 새로운 상징이 되면서 캠퍼스 전체와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뤘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페로는 다양한 소재를 활용하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그는 "새로운 소재를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것도 건축가의 역할"이라고 했다. 특히 메탈 메시(금속으로 짠 그물)는 그가 즐겨 쓰는 소재로,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불린다. 올해 스페인 마드리드에 세운 보행교에도 이 소재를 썼다. 그물로 된 띠를 나선형으로 감아놓은 모양의 다리를 설계한 것. 햇빛이 다리를 통과해 그 아래의 공원까지 닿도록 한 배려다.
- ▲ 이화여대 이화캠퍼스센터(ECC)는 운동장이 있던 자리를 파내 골짜기 모양의 6층 건물을 만들었다. /André Morin/DPA/Adagp
그는 올해 광주 디자인비엔날레 어번폴리 프로젝트에 참가했다. 10명의 세계적 건축가가 옛 광주읍성 터를 따라 소규모 공공 건축물을 설치한 작업이다. 페로는 이 중 옛 광주시청 사거리 교차로에 작은 정자(亭子)를 만들었다. 그는 여기에도 한국 전통 목조건축의 색감을 표현하기 위해 황금빛 메탈 메시를 활용했다.
페로는 "패션 디자이너가 미세한 차이를 주기 위해 신중하게 옷감을 고르듯 나도 건물에 쓰일 소재를 신중히 택한다"고 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