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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일 오후 올해 첫 장맛비가 뿌렸다. ‘부서져라’하고 차창을 때리는 빗줄기를 뚫고 지리산 마천면 칠선계곡 옆의 서암에 도착했다. 맞은편은 연화봉과 칠선계곡, 뒤쪽은 지리산 천왕봉의 서북쪽 한 줄기다. 빗방울 여전하고, 안개가 꿈틀꿈틀한 산사의 주변은 신비하다. 이곳 분위기의 콘셉트는 신비감이다.
절에 가기 전 기자의 마음속에는 뭔가 하나, 바라는 게 있었다. 그래서 서암으로 향하는 차 속에서 이번 산사 취재의 초점을 이렇게 잡았다. 일반인들이 뭔가 바라는 게 있을 때, 절 법당 안에서 어떻게 하면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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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굴법당은 말 그대로 암벽 속의 굴에 본존 아미타불과
8보살, 중신과 동자승을 빽빽이 새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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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세요.”
나이가 든 행자가 요사채에 안내했다. 곧 큰스님을 모셔온다기에 그에 대해 여쭸다. “법명은 ‘원응’이십니다. 50년전 칠선계곡 이쪽 골짝에 들어와 벽송사를 중건하고, 다시 10년 뒤 서암을 만든 분이죠.”
얼마 지나지 않아 자신의 키보다 큰 지팡이를 짚은 스님이 나타났다. 72세의 스님은 숨소리가 급하고 피부가 약간 검다. 말소리는 자분자분했다. 이런저런 말끝에 암벽 사이에 세워진 기이한 절 서암을 만든 내력을 들려줬다.
“처음엔 벽송사에 있었죠. 그런데 40년 전 뭔가에 이끌려 이 터 위에 섰지. 앞쪽 봉우리와 골짝, 바위며 사이사이 평평한 자리가 예사롭지 않았죠. 그래서 힘을 내기로 한 거예요.”
이어 그는 500년 고찰 벽송사가 6·25 때 소실된 뒤로 자신이 나서 중건한 이야기도 함께 했다. 뒤에 만난 벽송사의 선승은 이를 큰스님의 ‘원력’이라 표현했다.
마침 저녁예불을 앞둔 시각이라 아까부터 궁금했던 점을 여쭸다. “스님, 법당에서 어떻게 소원을 빕니까?” 그랬더니 “합장을 하고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하면 되지요 뭐”했다. 일단 수긍했지만 너무 간단해 머뭇머뭇해 하는 기자에게 그는 조금 더 보충했다.
“천수경을 외며 발원하기도 합니다. 천개의 눈과 손을 가진 부처에게 소원을 비는 거죠.” ‘나무관세음보살마하살, 나무대세지보살마하살, 나무천수보살마하살…’ 이런 내용의 천수경을 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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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첫 장맛비가 내린 날,안개가 꿈틀한 산사의 주변은 신비하다. |
| ⓒ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
석굴법당에서 곧바로 실천
하절기에는 모든 일정이 30분씩 늦춰진다고 했다. 7시30분 석굴법당에서 시작된 저녁예불에 앞서 스님에게 들은 말을 실천했다.
‘나무관세음보살, 나무관세음보살’ 그렇게 외기만 하니까 왠지 정성이 모자란 것 같다. 씩씩하게 108배를 하긴 했지만 숫자 왼다고 소원을 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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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
법당은 말 그대로 암벽 속의 굴에 본존 아미타불과 8보살, 중신과 동자승을 빽빽이 새겼다. 찹찹한 굴속에 유난히 하얗게 보이는 암벽의 조각들이 기묘하기만 하다. 스님 셋에 행자가 하나, 신도가 하나 참석한 예불은 단촐하지만 흥미롭다.
‘지심귀명례 지심귀명례…’ 하는 스님들의 목소리 높이가 다 다르다. 아주 높거나 높고, 또 낮다. 굳이 맞출 생각을 하지 않는 것 같다.
이윽고 천수경. 하기야 진리를 구하는 것도 스님들의 소원이겠다. 그렇게 매일 저녁 천수경을 왼다. 대부분의 기도는 소원이고, 기원이다. 절이든 교회든 성당이든, 사람들은 기원을 한다. 기도의 뜻, 기원의 뜻에 대해서는 다음날 새벽에 만난 벽송사 선승이 한번더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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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 부처가 소원 들어줍니까, 어디?
다음날 새벽예불을 그만 놓쳤다. 작은 절에서는 스스로 일어나야 하는 모양이다. 범종도, 목탁도 울리지 않았다. 새벽 5시, 이미 예불 끝난 시각에 차라리 벽송사로 향했다.
새벽의 지리산 칠선계곡 물소리는 굉음에 가깝다. 억수같은 비가 온 뒤였다. 그 무거움을 자잘자잘한 새소리가 가볍게 덜어줬다.
갈림길에서 벽송사까지의 거리는 서암보다 훨씬 멀다. 칠선으로 통하는 작은 계곡이 길과 반대로 흐른다. 경사가 급해 흙길이 아닌 콘크리트길을 탓할 수 없다. 이마에 땀이 맺힐 쯤 절이 보였다.
입구는 상상과 다르다. 앞뒤가 훤할 것으로 기대했지만 시원하지 않다. 골짝 안에 그냥 평범한 집처럼 앉았다. 하기야 여기는 스님들이 참선하는 선방아닌가. 경치가 좋아서는….
선방에서 나온 스님 둘이 공양을 하러 가던 길에 주고받는 말. “축군 어떻게 됐어요?? “스페인이 이겼어요. 우크라이나한테. 4대빵으로.”
법당 위에 옛 벽송사 터가 남아있다. 1520년 절이 만들어질 때 세워진 삼층석탑이 지금 그 터를 지키고 있다. 이곳은 전망이 더 훤하다. 터가 좁아 중건을 할 때 밑으로 옮겼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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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응 스님. 자신의 키보다 큰 자팡이를 짚은 이
스님이 서암을 만들었다. |
| ⓒ 경남도민일보 박일호 기자 |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스님 한분을 만났다. 공양을 끝내고 서암까지 행선 간다고 했다. 시커멓게 각이 굽은 눈썹에 광대뼈가 살짝 나온 잿빛 얼굴을 하고 있다. ‘용맹정진’의 의지가 묻어있다. 함께 서암까지 걸으며 이것저것 이야기했다. 다시 여쭸다. “스님, 뭔가 빌 게 있을 때 법당에서 어떻게 하면 됩니까?”
“부처는 절대 신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 가지 소원을 다 들어주는 존재가 아니라는 거죠. 오히려 부처 앞에 합장하고, 절하면서 자신을 세우는 것 아니겠습니까. 자신을 맑게 하는 거죠.” 고승과 수행승이 말한 내용에는 과연 차이가 있을까, 없을까. 그 차이는 또 무엇을 뜻할까.
안국사, 금대암 등 골짝 이쪽저쪽의 고찰
서암에서 칠선계곡을 따라 내려가면 엄천강이 나온다. 남원에서 흘러와 산청으로 흐른다. 스님은 강의 저쪽 골짝에 임진왜란 때 승병들이 처음 조직됐던 안국사가 있다고 소개했다. 그 옆의 금대암은 이곳 벽송사에 속한 암자로, 역시 고찰이다.
서암 법당에서 기본적 예불법까지 가르쳐준 스님과 서암 찻집 앞에서 헤어졌다. 찻집 앞에는 ‘水流花開’라고 씌었다. 자세히 해석도 달았다. ‘물 흐르고 꽃이 피니, 차 마시며 만사를 잊네.’
다시 마천에서 산청 금서면 화개로, 다시 대전통영고속도로 생초IC를 통해 갔던 길을 되돌아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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