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겨울의 찻집, 하루(霞樓)>
바람 속으로 걸어갔어요.
이른 아침에 그 찻집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마셔요.
아름다운 죄 사랑 때문에
홀로 지샌 긴 밤이여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
삶의 고갯길에 설 때면 어찌 하느냐고 물어오는 후배들이 가끔 있다.
“외로울 때는 차를 마시고 그리울 때는 편지를 써 봐.”
간단명료한 답이 외려 그들을 아리송하게 만들기 일쑤였다. 사람이 가장 사람다울 때는 외로움 한 뿌리 그리움 한 자락을 가슴 한켠에 묻어두고 살 때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삶의 고갯길에 섰다고 생각하게 된다. 어쨌거나 외로움이나 그리움 따위는 스스로 풀어야 할 숙제가 아니던가.
그래도 비책 또한 있기 마련이니 ‘그 겨울의 찻집’에 가서 외로움을 찻잔에 부어 마시는 것
이 특효약이다. 많은 가수들이 리메이크해서 부르곤 했으나 역시 원조 조용필의 하늘가에 닿는 소리는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사람에게 효험 백 프로의 처방이다.
차를 즐겨 마시는 사람은 아니, 서정이 머무는 청춘부터 빛바랜 추억을 회상하는 실버에 이르기까지 ‘그 겨울의 찻집’이란 노래에 빠져보지 않았던 사람이 있을까.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나는 통과의례를 한번쯤은 거쳤겠지만 감히,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말은 해보지 못했으리라. 눈물 한번 찐하게 쏟고 나면 뒤이어오는 후련함이란, 어찌 백가지 명약을 따르겠던가. 거기다 차 한 잔에 외로움을 풀고 그리움을 섞어 마시면 백 프로를 넘어서는 비방이니 ‘그 겨울의 찻집’을 찾는 일이 숙제인양 여기게 되었다.
그러니 오래전부터 올 겨울만큼은 ‘그 겨울의 찻집’을 찾아내고 마리라는 다짐을 하게 되었
다. 그러나 번번이 그 겨울은 봄 마중채비에 쓰고 다시 그 이듬해로 넘기곤 했었다.
오랜만에 남도로 내려가게 되었다. ‘남도를 모르고 사람을 논하지 말라’던 한 시인의 말처럼 가면 갈수록 안온하게 착 감기는 남도였기에 갈 적마다 차바퀴에 설렘도 함께 실리곤 했다.
일기예보는 적중했고 전주는 모처럼의 과객을 하얀 눈밭으로 맞았다.
속 깊은 한 친구도 만날 요량으로 서둘러 일을 끝냈다. 주말이면 산을 오르내리기에 산기슭 외딴 곳에 괜찮은 카페라도 있으면 한 번 봐두라고 당부해 두었던 그였다. 바람 속으로 걸어가서 마른 꽃 걸린 창가에 앉아 외로움을 찐하게 타서 마실 만한 데가 있으면 꼭 연락을 해달라고 일찍이 일러두었기에 ‘그 겨울의 찻집’을 찾아내는 숙제를 덩달아 안고 있던 그였다. 귀띔조차 하지 않던 그가 그저 갈만한 데가 있다 해서 따라 나선 곳이 바로 ‘하루’다.
전주를 벗어나 남도 길로 접어들자 눈발은 점점 굵어지고 하얗게 쇤 머리털의 모악산이 어미 된 노파심인지 지그시 따라왔다. 순창으로 내려가는 이정표를 따라 내달리니 임실의 지표가
손짓을 했다. 내리는 눈으로 경계가 없는 운암 호숫가에는 뼈대에 막 살을 붙여가는 빌라와 러브호텔이 좋은 자리는 다 차지하고 있었다. 경관 좋은 땅들은 속속 들어서는 건축들로
숨구멍이 버거워지는 것을 그들도 아려나. 나 하나의 욕심만 저 아래 호수에 풀어보자는 심산인지...
.
'이제야 오셨군요. 그대가 오시는 길을 싹 싹 쓸어두었습니다.’ 주인이 미리 나와 길잡이를 하듯 어귀부터 비질이 잘 된 골목길을 오르자 낯익은 글씨체의 문패 ‘문화공간 하루’가 유일한 유색으로 반겼다. 전주톨게이트에 걸린 ‘전주’ 현판의 독특하고 호방한 서체와 참으로 닮았다. 하루, 이틀... 의 하루인가. 어설피 넘겨짚기가 주저되었다.
설국은 고요했다. ‘하루’로 들어선 세상은 천지의 끝 간 데를 분간할 수가 없었다. 홀로 들어
앉은 무릉설원에나 찾아온 듯도 하고 동행한 친구조차 멀리 떠나버린 듯, 외딴 섬에 버려진 고아마냥 우두커니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순백이었다. 사랑채에서 아이 둘이 뛰어나와 까르륵
까르륵 눈밭에 웃음꽃을 피우나 그저 먼 허공에 스며들 뿐이었다. 혼자라는 절절한 외로움만 끓어올랐다.
하느님도 외로워 가끔 눈물을 흘린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구나, 이렇게 아름다운 눈은 하느님이 외롭다고 흘린 눈물의 결정체이던가. 이토록 고운 눈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헤아려도
이만큼 아름답지는 못했으리라. 설국의 무심한 아름다움에 웃음이 슬몃 배어나지만 아이들 마냥 까르륵거리지도 못한 채 눈물만 핑 도는 외로움을 안고 ‘하루’의 다락집에 올랐다.
노을이 좋아 지었다는 정자라 해서 노을 하(霞), 다락 루(樓)란다. 전북의 아름다운 정자 중의 하나인 고창 ‘송계정’을 운암호숫가에 지는 노을을 바라보게 옮겨온 ‘하루의 송하정’이다.
송계정의 가운데 ‘계’자를 ‘하’자로 바꾼 ‘송하정’의 현판 글씨는 역시 한글서예가 여태명 선생의 서체였다. 아름다운 한글 이름표가 많은 남도는 그래서 더 친근하다.
마른 꽃 걸린 창가는 아니지만 따뜻한 온돌방의 창호로 하얀 송이 눈이 쏟아져 들어왔다. 단아한 ‘하루’의 아낙이 녹차와 황차를 권했다. 차림표 따위가 없어 좋다, 차 한 잔에 노을하나 다식으로 삼으면 될 터에 전통차, 대용차의 많은 차림이 무슨 소용 있겠는가. 더구나 오늘은 흑과 백만 있는 세상이니 간결해서 좋다. 이럴 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뜨거운 물 바로 부어 마시는 황차가 오늘의 특선 메뉴다. 이런 날은 주전자 위로 찻물이 넘쳐도 좋다. 그러라고 주전자 밑에 작은 수반까지 받쳐 왔나보다. 진한 다갈색 황차가 피우는 향에 외로움도 저만
치 달아나게 된다. 여기 ‘하루’의 외로움은 진부하지 않다. 주접스레 눈물을 섞어 마시는 외로움의 노래가 필요하지 않았다. 색채 번잡한 세상을 떠나 신선세계에 마실 온 내가 구두라도
한 짝을 흘려놓고 가야겠다고 장난기마저 들었다. 다시 와야 할 이유를 구두 한 짝으로 삼으려고 말이다.
아직은 언론이나 방송에 ‘하루’를 내어 놓고 싶지 않다는 아낙의 말이다. 그러나 열린 문 사이로 발 하나 들여놓는 사람은 무조건 환영하는 아낙의 찻살림 솜씨이다.
돌아가자는 친구의 채근에 구두 한 짝을 흘려두고 온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런데 돌아오는 석양에서야 ‘아, 거기가 바로 ‘그 겨울의 찻집’이었구나.’ 되뇌다니.
봄 마중 가는 길목에 숙제 하나 풀었으니 올해는 운수대통이리라. 그럴싸한 찻집 하나 찾아내려 여기 저기 두르고 다닌 인고의 세월이 대견하고 기특하기까지 하다. 친구의 안목에 고맙다
고, 그래서 그대를 더욱 사랑한다고 편지라도 써야겠다.
월간 다도 2007년 3월호 '솔바람 이는 소리'에 기고한 글입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