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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무덤 앞에는 그 차가운 빗돌을 세우지말라
나의 무덤 주위에는 그 노오란 해바라기를 심어달라
그리고 해바라기의 긴 줄거리 사이로
끝없는 보리밭을 보여달라.
노오란 해바라기는 늘 태양같이 하던
화려한 나의사랑이라고 생각하라
푸른 보리밭사이로 하늘을 쏘는 노고지리가 있거든
아직도 날아 오르는 나의 꿈이라고 생각하라.
위 작품은 국내 시인 함형수(咸亨洙, 1914∼1946)가 쓴
'해바라기 비명(碑銘) ― 청년 화가 L을 위하여'의 전문(全文)입니다.
정열적인 삶에 대한 의지를 5행의 짧은 글 속에 쏟아 넣은 작품으로
5행을 모두 '말라, 달라, 생각하라'는 명령 형 어미로 맺고 있어
시의 어조가 단호하고 힘이 있습니다.
화자는 젊은 화가입니다.
묘지의 모습은 한 폭의 살아 있는 그림이라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작품은 묘비명이라는 극한 상황을 설정하여
자신의 삶에 대한 열정과 의지를 강렬하게 표출한 작품으로 볼 수가 있습니다.
묘비명, 즉 죽음이라는 상황 설정은 한 사람의 인생관이나
삶의 태도를 가장 절실하게 드러낼 수 있는 수단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저는 시인의 이 작품을 읽을 때마다 품고 있는 의문이 하나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무덤 앞에는 차가운 빗돌대신 노오란 해바라기가 심어져 있는지~~
끝없는 푸른 보리밭이 무덤 주위에 펼쳐져 있는지~~
성묘를 오가며 늘 느끼는 바지만 우리네 묘비는 참 밋밋합니다.
천편일률적인 모양과 크기는 그렇다 치고
각인된 내용마저 생몰 연도와 이름만 다를 뿐 거의 똑같습니다.
성경 구절은 눈에 띄어도 정작 이 풍진 세상을 살다간 사람에게
의당 있을 법한 '자기만의 한마디'는 여간해서 눈에 띄지 않습니다.
반면에 영국의 노벨문학상 극작가 조지 버나드 쇼(1856~1950)의 묘비에
새겨진 말은 우리의 통념을 여지없이 깨고 맙니다.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
아무리 글 쓰는 것으로 평생 업을 삼았고 위트와 유머가 넘치는
사람일지라도 자기 묘비에 이렇게 새겨놓기란 쉽지가 않습니다.
확실히 버나드 쇼는 범상치 않은 인물임에 틀림없습니다.
더구나 근 100년의 세월을, 그것도 제1, 2차 세계대전을 모두 겪으며
산전수전, 심지어 공중전까지 다 치른 사람의 말이기에 한 번 더 눈길이 갑니다.
그렇습니다.
우물쭈물하다간 그냥 갑니다.
그러다 놓쳐버린 기회가 얼마나 많았던가요?
평범한 휴대전화 판매원에서 일약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가 된
폴 포츠의 데뷔 앨범 명이 '원 찬스(One Chance)'입니다.
'단 한번의 기회'란 뜻입니다.
실제로 그는 영국판 '전국 노래자랑'이라 할 만한
'브리튼스 갓 탤런트(Britain’s Got Talent)' 예선 무대에 나가
푸치니의 오페라 투란도트 중 '공주는 잠 못 이루고'를 불러
엄청난 반향을 불러일으켰습니다.
그날 '브리튼스 갓 탤런트'는 55%라는 경이로운 시청률을 기록했습니다.
물론 폴 포츠 덕분이었습니다.
그가 열창하는 장면은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서 단 9일 만에
1천만 명 이상이 본 동영상으로 사상 최다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비록 폴 포츠는 부러진 앞니에 낡은 양복을 입고 다소 주눅 든 표정이긴 했지만
단 한번의 기회였던 그 무대에서 듣는 이들로 하여금 전율을 느낄 만큼
혼이 담긴 열창을 해 인생역전의 드라마를 펼쳤습니다.
하지만 그의 인생역전은 우연도 요행도 아니었습니다.
그가 종양 수술을 받고 교통사고로 쇄골이 부러져
더 이상 노래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어도
오페라 가수가 될 꿈을 움켜쥔 채 자기 삶을 또박또박
우직하게 밀고 간 결과였습니다.
일본 사무라이들의 고전이라 할 <오륜서(五輪書)>의 저자
미야모토 무사시(宮本武藏, 1584~1645)는 진검 승부에 임하는
첫 번째 자세를 "머뭇거리지 말라"는 한 마디로 압축했습니다.
연습이 아닌 진검 승부에서는 머뭇거리면
그대로 칼을 맞기 때문입니다.
칼 맞은 후에 자세를 가다듬어 봐야 소용없습니다.
뒤늦게 상대의 마음을 꿰뚫어 몸 사리지 않고
공격의 리듬을 타 본들 이미 늦었습니다.
어차피 인생은 진검 승부입니다.
머뭇거리면 칼 맞고, 우물쭈물하면 그냥 사정없이 밟혀 버립니다.
참고로 미야모토 무사시는 일본 에도 시대 초기의 무사이기도 한
이색적인 화가로 힘있고 직선적이며 무사다운 패기가 있고
예리한 기백을 간직한 약필에 의한 수묵화, 특히 새 그림을 잘 그렸으며,
쌍검을 사용하는 검도인 니토류를 개발하여
니텐이치류의 시조가 된 자입니다.
묘비에는 예외 없이 시작과 끝을 일러주는 생몰 연도가 들어 있기 마련입니다.
오래전에 세워진 묘비에는 죄다 한자로 적었지만
요즘은 대개 아라비아 숫자를 씁니다.
그리고 태어난 날과 죽은 날 사이에는 으레 '대시(-·dash)'를 넣습니다.
결국 그 대시 안에 그 사람의 삶이 응축돼 있는 셈입니다.
짧든 길든 삶의 희로애락, 그 모두가 그 대시 안에 압축돼 있습니다.
사실 삶을 압축한 대시는 날마다 한 점 한 점 찍어서 만들어집니다.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매일 자기 인생에 작지만
지울 수 없는 점을 찍고 있습니다.
그 점들이 모여 우리 인생을 만듭니다.
때론 엉성하게~~
때론 촘촘하게~~
이젠 황금같은 추석 연휴도 다 지났습니다.
괜히 손에 잡히지도 않는 달만 쳐다보며 우물쭈물하지 마십시오.
인생의 진검 승부 앞에서 머뭇거리지도 마십시오.
오롯이 내 삶을 이어갈 점들을 정직하게, 또 다부지게 찍어가십시오.
후회 없도록~~
살아있는 동안 치열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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