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 인터넷 속 또 다른 나의 발견] 종여울 지기

－검천리·귀여리·분원리－

봄이 오는 속도가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만큼 내가 그를 기다리는 마음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봄은 언제나 생각보다 빨리 와 있게 마련이다.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다. 그러니 1주일 만에 다시 찾은 강가 버드나무의 태가 마치 한 줄기 초록빛 빗줄기라도 된 듯 바람결에 강으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봄비를 매우(梅雨)라고들 하지만 물 오른 수양버들이 하늘거리며 나부끼는 모습을 보면 마치 그것은 유우(柳雨)와도 같다. 그 간드러진 유혹을 못내 견디지 못하고 걸음은 더디고 또 더디다.

종여울을 지나 만난 강가의 포구이다. 방죽에는 갈대를 심고 그 가운데로 배가 드나들 수 있게 출입구를 만들어 놓았다.

그저께 내린 비 탓인지 아니면 간밤의 그 지독했던 황사의 모래먼지를 가라앉힌 때문인지 강물은 누렇게 변했건만 산천 또한 온통 꽃 천지였다. 노란 산수유나 생강나무 꽃만 가득하던 산에 진달래가 점점이 박혔으니 그 어우러짐이 또한 아름답지 않은가. 길섶의 벚꽃 망울이 금세라도 터질 듯이 탱글탱글 부풀어 오르고 논틀밭틀에서는 냉이꽃이 살갑게 흔들리는 모습을 두고 그저 떠나지 못하는 나그네의 심사는 또 어떻겠는가.

못내 아쉬운 마음으로 수청리 청탄(靑灘)마을을 떠나 검천리 종탄(終灘)에 이르렀지만 기어코 강가에 우뚝 선 미루나무에 발길이 묶이고 말았다. 까치 두 마리가 나무 끝에 앉아 있는 미루나무에 기대서보지 않고는 차마 떠날 수 없었으니 붙잡을 새도 없이 발길은 강으로 내려서고 있었다. 채 새벽 안개가 가시지 않은 강, 나무 둥치를 그러안았다가 뒤돌아 나무를 기대고 섰다. 저 멀리 아스라이 보이는 곳이 양강이 끝나고 북한강과 남한강이 한바탕 소용돌이로 만나 어우러지는 두물머리, 곧 용강(龍江)인가. 강은 드넓은 호수처럼 펼쳐졌고 철썩이는 물은 곧 발이라도 적실듯이 넘실거렸다.

아! 이만한 정경을 또 어디에서 만날 것인가. 고개 돌리면 산에는 꽃이 한 가득이요, 눈앞에는 호수 같은 강에 물이 한 가득이니 봄기운이 잔뜩 들어 찬 마음은 자꾸 들뜨기만 할 뿐 도무지 가라앉을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꽃은 산에만 가득할 뿐 강기슭에는 꽃 한 송이가 없었다. 다만 새 움을 틔운 나무들이 지난 겨울의 흔적을 지워가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꽃만 꽃이던가. 이맘때 새로 돋은 잎은 그 자체가 이미 꽃이 아니던가. 여린 잎이 햇살을 머금었다가 내 놓는 빛깔이 꽃보다 못하다고 할 수 있는 사람 몇이나 될까.

고려의 문장가 이규보는 유난히 봄날에 대한 시를 많이 남겼다. 그중 어느 봄날, 술에 취해 지은 ‘취가행(醉歌行)’이라는 시가 오늘 나의 심사와 잘 맞아 떨어지는 것 같았다. 주필(走筆)이라고 했으니 필시 술이 거나한 그가 단숨에 써내려간 것일 텐데 그 앞부분이 이렇다. “하늘이 나게 술 못 마시게 할 것이라면 / 아예 꽃과 버들 피어나게 하질 말아야지 / 꽃 버들이 아리따운 이때 어이 안 마시리 / 봄은 나를 저버릴망정 나는 그리 못하리. / 잔 들고 봄 즐기니 봄 또한 좋아라. / 취하여 손을 휘두르며 동풍(東風) 춤추네. / 꽃 또한 웃는 얼굴로 아양 떨고 / 버들 또한 찌푸린 눈썹 펴는구나.”

그는 또 봄날의 여러 가지 느낌을 읊은 ‘춘일잡언(春日雜言)’ 둘째 연을 “꽃은 나를 향해 붉은 마음 바치는 듯 / 버들은 누굴 맞기에 청안(靑眼)을 들었는가”라고 노래하고 있으니 봄은 꽃으로만 오는 것이 아닌 것이다. 백안(白眼)이란 흘겨보는 것이요, 청안이란 반갑게 맞이하는 것이니 물오른 버드나무 가지가 흩날리는 것이 마치 반가운 손짓이라도 하는 양 느꼈던 것이다. 그러니 이규보의 봄은 언제나 꽃과 버들이 함께 했던 것이다. 꽃보다 화려하지는 않을지언정 새 순 움튼 버드나무 또한 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 때문인가. 삼월 삼짇날이 되면 여인들은 어여쁜 꽃을 떠나고 남정네들은 버드나무 아래로 답청(踏靑)을 떠나는 것이 말이다.

종여울 근처의 미루나무

나 또한 그가 그러했던 것처럼 오늘 하루쯤은 잔 기울이며 강가에서 노닐고 싶지만 어쩔 것인가. 술 대신 커피를 마시고 걸음을 재촉했지만 검천리를 지나 귀여리에 채 닿기도 전에 또 발길은 붙들리고 말았다. 미처 이마에 땀이 맺히기도 전에 멈추어야 했으니 마치 봄맞이산책이라도 나온 사람처럼 마음은 절로 한가해졌다. 그 여유 때문인가. 저 먼 곳에서 강은 점점 넓어져 바다와 같아지지만 그 넓음에 매료되기보다 오히려 오밀조밀한 사람살이의 흔적들이 배어 있는 소소한 것들에 빙긋이 미소가 머금어지니 말이다.

종여울 언저리의 길에서 바라보는 강기슭에 작은 포구가 만들어져 있었다. 서른 평 남짓이나 될까, 빙 둘러 갈대숲이 방죽을 이루고 작은 나룻배 한 척만이 드나들 수 있는 문을 만들어 놓은 앙증맞은 포구였다. 남한강을 따라 이곳까지 걸어오는 동안 그저 강기슭에 배를 매어 두는 모습만 봤을 뿐이니 어찌 바다의 포구처럼 만들어진 이곳을 그냥 지나칠 수 있을까. 옛사람들의 글에서 더러 강에 있는 포구를 떠나거나 닿았다고 했지만 강에 무슨 포구일까 하고 늘 궁금했었다. 물론 충주의 목계나 가흥 그리고 원주의 흥원과 같은 곳이야 말할 것도 없이 배들이 따로 안전하게 정박할 수 있는 포구의 기능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처럼 작은 마을 앞에도 포구가 있는 것은 처음 본 것이다.

띠를 두르듯이 갈대로 방죽을 둘러쌓은 것은 큰물이 들고 강줄기의 흐름이 빨라져도 포구 안은 그 영향을 덜 받게 한 것이다. 그 때문에 비록 나룻배일지언정 홍수가 나서 큰물이 내려 갈 때에도 안전하게 배를 정박할 수 있었을 것이니 아직 그 흔적이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이 참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강을 따라 펼쳐진 땅뙈기라면 한 뼘도 남기지 않고 논이나 밭을 일구어 놓은 사람들이 적지 않은 땅을 농토로 일구지 않고 배를 위해 포구를 만들었다는 것은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농사 못지않게 어업이나 혹은 강을 건너는 교통수단으로서의 배가 절실하게 필요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제는 강마을 사람들일지라도 물고기를 잡아 생계수단으로 삼는 이들의 수가 줄어들었을 뿐 아니라 먼 길을 에돌지라도 이동수단을 자동차로 바꾸지 않았는가. 그럼에도 소담한 정취가 물씬 풍기는 포구를 만났으니 또 어찌 쉬이 발길을 돌리겠는가. 마른 갈대를 꺾어 자리를 만들고 앉아 낡은 나룻배 한 척이 매여 있는 포구의 아름답고 살가운 정경을 바라보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강 건너 산기슭으로는 중앙선 기차가 달려가고 있었다.

기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그만 일어섰다. 그러나 발길은 서붓서붓 나아가지 못하고 가다 서기를 반복하고 말았다. 길이 도무지 편치 않았던 것이다. 그것은 길이 험하거나 공사 중이어서가 아니라 너무도 아름다웠기 때문이었다. 귀여리를 에돌아 분원리로 향할 즈음 북한강을 받아들인 강은 산이 아니라면 그 경계가 어디인지 모호할 만큼 넓어져 있었다. 강이 끝나는 곳에 산이 솟았고 그 산중에 수종사가 있으며 강 건너엔 다산(茶山)이 태어난 소내, 곧 마현리(馬峴里)가 강기슭에 아스라이 보였다.

다산은 연이은 귀양살이 끝에 한 장의 그림을 그렸다. ‘소계도(苕溪圖)’라는 것이다. 소계는 곧 자신이 태어난 소내(苕川)를 말하는 것이다. 그가 소계도를 그린 까닭은 ‘장난삼아 그려본 소계도(戱作苕溪圖)’에 자세히 남았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소동파가 호주(湖州)에서 귀양살이 할 무렵, 하남성 겹현에 있는 아미산이 고향인 촉(蜀)에 있는 아미산과 모양이 닮았다 하여 작은 아미산이라고 부르고 그 아미산을 그리면서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달랜 것을 흉내 내어 고향인 소내를 그렸다는 것이다.

스스로 먹을 갈아 소계도를 그리기를 여러 날, 드디어 비단 폭에 옮겨 그리고 객당의 서북쪽에 걸어 두었다고 한다. 그 시의 마지막 연에서 “소나무 노송나무 덮고 있는 것 우리 정자이고, 망하정(望荷亭)임. / 뜰에 가득 배꽃 핀 곳 저건 우리 집이지 / 우리 집이 저기 있어도 갈 수가 없어 / 나로 하여 저걸 보고 서성대게 만드네그려”라고 했던 그 집이 이곳에서 어렴풋이 보이는 것이다. 그의 집이 이처럼 바다와 같이 넓은 강가에 있었으니 양강이 택당(澤堂)의 강이었다면 이 강은 당연히 다산의 강이기도 하다.

어디에서 강을 건너 그에게로 갈까. 머리는 다산에 대한 생각으로 꽉 차 있건만 어느새 발길은 분원리 분원초등학교 운동장에 닿아 있었다. 10여 년 전만 하더라도 초등학교 운동장은 온통 사금파리 투성이였다. 눈썰미 좋은 사람들은 빛깔 고운 사금파리를 주워 들곤 즐거워했던 곳, 이곳은 사옹원(司饔院) 소속으로 어용기(御用器)를 구워내던 가마가 있던 곳이다. 분원(分院) 분주원(分廚院)으로도 불리기도 했던 가마가 하필이면 강가에 있었던 것은 무슨 까닭일까. 그것 또한 수운(水運)의 편리함 때문이다. 질 좋은 흙을 실은 배들이 남한강 물길을 따라 쉽게 드나들 수 있었으며 만들어진 그릇 또한 물길을 이용해 쉽게 한양으로 옮길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그만 운동장에서 내려와 강가로 나가 척척 늘어진 버드나무 아래에 앉았다. 그곳에서 수종사가 있는 운길산과 무량한 넓이로 펼쳐진 두물머리 용강을 바라보다 다시 되짚어 수청리로 강을 거슬렀다. 배를 타고 건널 나루터라곤 그곳 밖에 없으니 핑계 김에 다시 수청호를 타고 양평으로 건널 요량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