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올해 개교 51주년을 맞이한
교계 최초의 비구니교육도량인 동학사
승가대학장 일초스님(63세)을 뵈러 가는 길목에서 만감이 교차하였다.
때아닌 폭설로 1m나 쌓였다는 눈들은 봄볕에 이미 다 녹고,
간혹 길가에 쌓여 있는 누운 나무더미와 속절없이 쓰러진
아름드리 소나무들만이 그 날의현장을 말없이 대변하고 있을 뿐
계룡산은 더 높고 맑았다.
100년 만에 왔다는 봄날의 폭설과 폭설에 꺽인 설해목들의 모습이, 탄핵정국과 하나의 수레바퀴가 되어 소용돌이 친다. 그나마 이렇듯 답답하고 혼란스러울 때 평생을 후학 교육과 전법에 힘쓰신 눈 푸른 스님을 뵈러 간다는 것만으로도
큰 위안이 되었다.
"평생 눈이 그렇게 많이 온 것은 처음 봤습니다.
처음에는 눈이 오는 게 좋았지요.
하지만 밤새도록 설해목 부러지는 소리를 들으면서 마음이 아팠어요.
봄볕이 나면 다 녹고 쓰러진 고목만 남을 것입니다.
삶이란 다 그런 것이에요.
아주 작은 것이 모여서 몇 백년 된 소나무를 쓰러뜨리는 겁니다.
절대 대통령의 일이 아니고 국민의 일이에요.
이런 때일수록 자숙하고 각자 맡은 바 직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스님은 소리없이 내린 눈이 소나무를 쓰러뜨리듯,
거대한 바위에 의해서 넘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돌멩이 때문에 넘어지듯이 평소의 생활 습관을 강조하셨다. 그러고보니 스님의 위의가 단아하다. 몸짓 하나만으로도
그 사람의 인품과 이력을 알 수 있다는데.....
"행자들은 행자시절만 행자 노릇을 하면 되지만
나 같은 강원교육자는 영원한 행자예요.
학인들이 나를 지켜보고 있으니 눈뜨면서 잘 때까지
몸가짐, 마음가짐을 살피면서 행자 노릇을 해야 하고
어른 노릇을 해야 합니다."
나이가 들고 보니 이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것이
어른 노릇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스님,
이즈음 원효 대사의 발심수행장 중에서
노인불수(老人不修:노인은 닦기 어렵다.)라는 대목이 가슴에 와닿는다는
스님은 매우 솔직히 속내를 드러내셨다.
"학인들을 가르치면서 살다보니 욕심을 부리고 싶어도 자제하게 되고,
화를 내고 싶어도 참게 되고, 게으름을 부리고 싶어도 세으를 수 없고,
그런 세월을 오래 살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공부가 되었지요."
경전공부는 물론이고 수행이 뒷받침되어야만 교육할 수 있다는,
그러하기에 끊임없이 정진할 뿐이라는 스님의 말씀을 들으면서
천인사(天人師)인 부처님의 미소가 떠올랐다.
꿈이 꿈인 줄 알면 꿈이 아니다
"이불속에 전구를 넣고 볼 정도로 책을 좋아했지요. 스물 한 살 때
우연히 한글화엄경을 보는 순간 세상의 철학자들이
시시해 보이더군요.
부처님의 말씀이 바다였다면 철학자들의 말은 개울물같이 느껴졌어요." 정철
송강의 후손으로 정통적인 유가집안에서 태어난 스님은
화엄경을 읽고 환희심이 충만하여 부모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출가,
이듬해 동학강원에 입학,
학인으로 강사로, 지금은 학장을호 근 40여년 동안
이곳에서 살아왔으니 필시 전생부터의 인연이리라.
"호경 노스님께서 너는 공부를 더 열심히 해서 강사를 하는 게 좋겠다고
하시면서 대교를 마치기도 전에 강사를 할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셔서
그 때부터 스님들을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티 대교를 마치고도 출가본사로 가지 않고
동학사에 남게 됐지요."
스님께 넌지시 비구니로서 남녀 차별문제에 대해 여쭙자,
"부처님께서 유정무정(有情無情) 개유불성(皆有佛性), 만 중생의
평등성을 주장하셨는데...
수행이 문제다. 부처님이 계실 때나 안 계실때나 성적 차별보다는
어떤 힘을 갖추느냐가 문제"라고 일침을 놓으신다.
한편 "사람을 상대할 때 자신이 해놓고도 마음에 안 들때가 있다.
그 누가 내 마음을 맞추겠는가 ?.
남이 나를 맞춰 주리라 생각하지말고 내가 그에게 맞춰주라"고 말씀하시는데, 스님께서 주석하고 계신
화경헌(和敬軒)이 뚜렷하게 떠올랐다.
"화(和)는 우유와 물이 섞이면 둘로 나뉘지 않듯 위 아래가 하나되어
조화하는 것이요,
경(敬)이란 그런 가운데서도 예의가 바른 것을 말한다.
모름지기 서로를 공경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니
그 한마디로도 세상사는 이치로서 족할 듯 싶다.
동학의 문필봉이 더욱 높고 푸르게 보였다.
월간 [불광] 에서 발췌하였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