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따뜻한마음,깔끔한 강의 일초스님(17)
|
|
|
|
|
|
 |
문득 계룡산에 가고 싶다. 그곳에 가면 빛나는 눈빛으로 또랑또랑하게
글을 읽던 내 도반들과 그윽한 미소를 지닌 강사스님을 볼 수 있을 것
만 같은데 벌써 20여년이 흘렀다.
동학사 강원 시절 난 강사 일초一超스님의 시자侍者(덕망이나 지위 높
은 스님을 가까이 모시고 시중드는 스님)를 자원해 세 철을 살았다.
그 당시 전국의 강원에서 가장 알차고 깊이 있는 강의를 하시기로 정평
이 나 있던 일초 스님은 강사란 일상의 모든 삶이 경전 속에서 녹아내릴
때라야 제대로 부처님말씀을 전할 수 있다며 항상 행주좌와, 어묵동정
을 우선으로 하셨다.
그 분이 강의를 하시면 아주 난해한 논서들도 아름다운 수필처럼 가슴에
와 와 닿았고 편지글들은 마치 역사속 인물들이 우리에게 보낸 편지처럼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사집반 때 ‘영가답서’. 세속에서 자신을 기다리다 지쳐 눈이 멀어버린 어
머니가 마을에 들어서는 모든 스님들의 발을 씻어드리며, 스님이 도니 아
들의 발을 기억해내기 위해 애쓰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다리지 마시
라고 어머니에게 보낸 편지글을 배울 때였다.
일초 스님의 섬세한 감정과 단아한 번역이 우리로 하여금 우리들의 어머
니를 기억케하고 가슴 아파 울게 만들더니 다시 단박에 냉정하고 결연한
수행으로 이어지게 깔끔한 마무리를 하셨다.
공부가 끝난 뒤에 우린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며 열심?공부하지고 파이
팅까지 했다. 그리고 우리는 알았다. 일초 스님의 눈에도 우리와 똑같은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을⋯⋯.
그 때 경전공부도 항상 엄숙하게 그리고 경건하게만 가르치고 배우는 것
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가르치는 스승도, 배우는 제자도 서로 감정의
교류가 잘 이루어져 정말 몰입해서 이해하고 가슴에 새겨 수행으로 이어
지도록 해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일초 스님의 스승이셨던 호경 노스님의 연극적인 수업방식의 영향이었는
지는 몰라도 스님은 다른 강사스님과는 달리 예술적인 시각을 갖추게 하
려고 노력을 많이 기울였던 것 같다.
< 스님이야기 중 - 동문 원욱스님의 글입니다. - >
|
가을 체육대회때 학인들과 함께 경기하는 모습
늦은 밤이나 이른 새벽, 어느 때 보아도 일초 스님 방에는 언제나 불이 켜져 있었다.
그 때마다 낮고 고즈넉한 경읽는 소리가 어두운 밤길을 따라 퍼져나갔다.
나는 그 소리가 좋아서 염화실 마루에 앉아 졸면서도 일어설 줄 몰랐다.
사실 내가 스님이 시자를 살았던 것은 나름대로 꿍꿍이가 있었다.
강사스님 방에 있는 많은 경전이 나를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반 수업시간이면 어김없이 그 방의 책들을 읽고는 했다.
그런데 문제는 점점 다른 책들을 읽고 싶은 욕망이 일어나는 것이었다.
강원에서는 경전을 제외한 책은 ‘외전外典’이라 부르며 무조건 반입이 금지됐다.
지금은 강원에 도서관까지 훤칠하니 지어 다양한 책들을 보며 공부할 수 있게 됐지만
20년 전엔 어림도 없었다. 몰래 읽다가 걸리면 무조건 정학이었다. 정학이라고 해서
공부를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공양주 일을 3박 4일 하며 수업에 들어가야 하니 지치고
졸려서 제대로 공부를 못한다고 봐야 한다. 그러니 외전 볼 용기를 내기가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강당채 마루를 지나가다 보니 몇 명이 책상 쌓아 놓은 곳에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살그머니 다가가서 “뭐하는데?” 묻자, “저리 가라마. 난 또 입승스님인 줄
알았잖아.”
허둥대는 그들 손에는 당시 신부님과의 슬픈 사랑을 주제로 세간에서 꽤나 인기가 있었던
『가시나무새』라는 책이 표지가 벗겨진 채 너덜너덜한 모습으로 들려져 있었다.
“어, 소설책이네! 오랜만이다. 나도 좀 보자.” 조르고 졸라 일주일 후 그 책이 내 손에
들어왔다. 나는 그 책을 들고 강사스님 방에 들어가 걸레질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며
책읽기 삼매에 빠져 그만 강사스님이 들어오신 것도 몰랐다.
“원욱, 뭐하는고?” 순간 나는 하늘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더니 하필이면 소설책을 보다 들켰으니 정학은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
“보던 것 이리 가져오고 그만 나가봐라.” 시자실로 돌아와서도 마음이 어찌나 불안한지
그 날 밤잠을 못 이루었다.
어디서 났느냐고 물으시면 줄줄이 출처를 대야할 내 심정은 말 할 수 없이 괴로웠다.
그 때 시자실 문이 살그머니 열리더니 일초 스님이 부르셨다.
“달이 좋다. 이리 나와 봐라. 공양간에 가서 양동이랑 바가지 가지고 따라 오렴.”
동학사는 산골짜기에 있어서 골바람 때문에 겨울이 되면 몹시 추워 사람은 물론 숲과
전각들과, 심지어는 시간마저 얼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질 정도다.
바람이 몰아치는 이 추운 밤에 나를 어쩌시려고 저러시나 싶어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뾰족한 수가 없으니 시키는 대로 개울가로 나갔다. 스님은 바짝 긴장한 나를 보고
웃으시면서 개울물을 퍼오라고 하셨다. 그 웃음에 나는 벌받는게 아니구나 싶어 얼른
물을 길어왔다.
양동이 물을 받아든 스님이 갑자기 주지실 옆 작은 비탈길 아래로 물을 쏟아 부우셨다.
“이 추운 겨울에 공부하느라 애쓴다. 내 눈에 그 책이 뜨인 게 달포쯤 되는데 아직도
돌아다니는 걸 보니 꽤나 심심한 모양이구나. 외전을 보지 못하게 하는 것은 너희가
아직 세속인연들을 다 털어 내지 못한 마음자리를 가다듬게 하기 위함이야. 차라리
자연에서 즐기는 것을 하나 찾는 것이 더 좋을 것 같구나.
우리가 학인 시절 때는 이곳에 물을 뿌려 밤새 얼리고 다음 날 아침에 신나게 미끄럼을
따고 놀았단다. 내일은 강의를 일찍 끝낼 터이니 한판 재미있게 놀아보거라.
탈 것으론 가마니가 제일이지.”
그 날 밤 강사스님하고 나는 개울에서 물을 퍼다 비탈길에 계속 뿌렸다.
양동이랑 바가지를 내 손에 쥐어주시고 책 많이 보면 눈 버린다며 걱정스런 눈빛을
남기고 가시는 일초 스님의 뒷모습에 가슴이 뭉클해졌다.
다음 날 아침 눈 내린 비탈길을 곱게 쓸어 놓고 반 스님들이랑 가마니에 대여섯 명씩
올라타고 신나게 미끄럼 타며 아이들처럼 웃고 놀았다.
웃음소리가 계곡을 타고 계룡산 굽이굽이 메아리치는 게 듣기 좋다며 흐뭇해하시던
스님의 모습이 그립다.
철없던 학인에게 꾸지람보다 따뜻한 마음을 주셨던 일초 스님을 방송을 통해 깔끔한
강의를 들을 수 있어 그나마 아쉬움을 달랜다.
| | |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