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1,950m 중부 능선
하단부 하산길...
관음사 코스 입구
한라산 1,950m 정상(동능)에서 휴식(2004. 04. 21)
~~~~~코스가 다르고 계절이 다르지만 "한라산행기"에 대한 좋은글이 있어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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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받은 영혼을 치유하는 눈꽃나라
어리목~만세동산~윗세오름~백록담~영실
글 : 정수정 기자
사진 : 김도훈 기자
천지 사방이 물이오. 내 다시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를 유배길에 올랐음을 실감하고 있는 중이외다. 여기 저기 봉긋이 솟은 야트막한 언덕에 올라서면 시퍼런 바닷물 일렁이는데 섬 속 한가운데 우뚝 솟은 저 산은 흰눈을 뒤집어쓰고 보란 듯 버티어 있소. 내 이제 저 도도한 산에 올라볼 요량이오. 관직도 명예도 다 잃고 쫓겨 온 마당에 아직도 무에가 그리 서럽고 그리운지 산꼭대기 서면 그 실체를 알 수 있으려나.
어리목매표소에 이르는 길은 온통 무채색. 1100도로를 달리는 동안 이미 어둠이 속세의 원색을 삼켜버리고 오로지 눈빛만 가득하다. 위태롭게 달리던 승합차는 어리목 입구에 멈춰서고 지프가 두 차례 나누어 사람과 짐을 실어 나른다. 덩그러니 놓여진 짐 한가운데 덩그러니 선 사람은 당혹스럽다. 선명하지 않은 옆 사람의 윤곽조차 낯설어 차라리 어승생악(御承生岳·1169m)을 뛰어 올라 흰눈을 뒤집어쓰고 있을 화구벽 너머 백록담이라도 가늠해 볼 양이다. 1m쯤 눈 속에 묻혀 있던 한라산관리사무소와 매표소, 매점, 제주적십자 산악안전대 건물 사이사이 아이들 놀이하듯 내어 놓은 하얀 길만 꾹꾹 밟으며 일행을 기다리는데 서서히 어둠의 실체가 드러난다. 묽은 먹빛 어둠 속 별빛 나리는 여긴 한라산 970고지.
인적 없는 산속에 홀로 있소. 임금님의 말을 키웠다는 어승생악에서 떠나온 한성이 저 너머 어디쯤일까 생각해 보오. 하염없이 앉아 그리운 것들을 떠올려보지만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오로지 하얀 세상에 백지처럼 머리가 텅 비어버렸구려. 짐승의 애처로운 울음소리만 간간히 들려올 뿐, 세상에 오로지 나 혼자인 양 외롭고 쓸쓸하오.
겨울 산, 시간은 무의미한 관념일 뿐
밤이 깊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수첩의 빈 페이지를 펼쳐놓고 헤드램프를 비추며 편지라도 께적여보려 했지만 한참 지나도록 단 한 줄도 채울 수 없었다. 옆 사람 뒤척이는 소리에도, 가늘게 새어드는 밤바람 소리에도 몇 차례씩 잠을 깬다. 새벽녘 빈 가지에 걸린 달을 얼핏 보았는데 벌써 어리목 입구에는 바지런한 사람들의 두런거림이 들려오기 시작한다.
고어텍스 등산화 위에 쌓인 추위를 탈탈 털어내며 얼음물을 녹여 7인분 된장찌개를 끓이는 것을 돕다 말고 어수선하게 겨울산행 준비물을 챙기는 아침 7시. 오버트라우저, 스패츠에, 아이젠에, 스틱에 번거롭고 분주하다. 알면 알수록 산은 복잡해진다. 어린시절 발목까지 푹푹 빠지는 산에도 무거운 솜바지에 바닥이 맨들맨들한 운동화를 신고 미끄러지면서도 잘만 올라 다녔는데, 안전장비를 착용할수록 뒤퉁스러워 한발 내딛는 것부터 조심스러워진다. 오버트라우저를 입었다 벗었다, 아이젠을 끼웠다 뺐다, 선택은 결국 자신의 몫이지만 언제나 안전이 우선시 되어야 하는 법이니 어쩔 수 없다.
“어제랑 그제 윗세오름까지 열심히 길을 뚫어놓았다”는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 오희삼씨의 말에 마음을 놓으며 출발을 서두르는데 관광버스들이 어리목 광장에 왁자하게 단체 산행객들을 풀어놓는다. 수원의 한 초등학교에서 왔다는 보이스카우트 어린이 40명과 인솔교사 두엇은 제각각 겨울용 점퍼나 두터운 운동복 차림에 단체로 구입했는지 운동화 위에 아이젠만 일률적으로 착용하고 있다. 금세 어린 시절의 신나던 기억은 모두 잊고 ‘위험하지 않으려나’ 걱정부터 앞선다.
“이야, 하얀 무덤이다.” 어리목산장을 떠나 얼마 안 가 Y계곡을 건너며 군데군데 바위 위로 얌전히 눈이 내려앉은 모습이 크고 작은 봉분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마침 어린 학생 하나가 냅다 소리를 지른다. 하얀 봉분들 위로 족은두레왓, 큰두레왓, 민대가리동산이 아침 해를 등지고 줄지어 서 있다.
이번에는 60명이 넘는 제주시내 한 회사의 가족산행팀을 만나 그 긴 행렬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계곡을 건너고 있는데 가파른 산길 모퉁이에서 아이들 몇이 엉덩이를 들이밀고 주르륵 미끄럼을 타며 내려온다. 비탈을 올라야 하는 사람은 걱정이 이만저만 아니건만 내려서는 사람은 마냥 신났다. “안녕하세요?” 인사소리까지 밝고 경쾌한데 어쩌랴.
뚫어놓은 길은 겨우 한 사람 지나다닐 만한 외길. 그 때문에 출발한 지 채 30분도 안 되어 어리목 코스의 등산로는 일요일 북한산 백운대에 오를 때처럼 사람이 줄을 잇고 잠깐잠깐 서서 기다려야 하는 상황에 이르고 말았다. 30분 넘도록 눈 쌓인 가파른 오르막이 이어지자 힘에 부치는지 눈 위에 철퍼덕 주저앉아 일어날 줄 모르는 아이들도 여럿이다. 그렇게 가다 서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하늘이 탁 트인 너른 눈 평원 사제비동산에 닿는다. 사제비동산은 새집동산이 변해서 된 이름인데, ‘새’는 초가집 지붕을 덮을 때 쓰던 억새와 비슷하게 생긴 제주의 풀 ‘띠’를 말한다.
“여기서 약수터를 찾아내느라 눈을 어찌나 많이 파냈던지….”
사제비동산에서 잠시 발을 멈추고 숨을 고른다. 몇 년째 한라산을 거의 매일 오르내리던 오희삼씨도 평소 같으면 눈을 감고서도 찾을 수 있는 사제비약수를 눈 속에서 찾아내느라 한참 애를 먹었다고 한다. 이쯤일 것 같아서 파보면 아니고, 다시 그 옆을 파보아도 물은 보이지 않고…. 1m 넘게 쌓인 눈은 산길도 바위도 키 작은 나무까지 덮어버려 전혀 낯선 곳이 되고 만다.
등산지도에 꼼꼼히 적혀있는 운행 시간은 애초부터 무의미하다. 설산에서는 굳이 시간을 잴 필요도, 거리와 시간을 환산해볼 .....[이하생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