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중에서도 나의 아버지!
나는 지금 60을 훨 넘은 지금도 아버지가 그립다.
며칠있으면 아버지의 기일이 닥아와서 그런가?
아니면 나의 친정이 여의치 못해서 이렇게 아버지가 그리운 것인가?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하고 정이 많이 들었다.
6.25사변때 피난을 가서 어머니는 자식들을 데리고 아예 정착을 하셨고,아버지는 수복이후 가장의 경제적인 책임때문에 서울로 혼자 올라오셨다.
뒤이어 내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년 쉬다가 공부를 하겠다고 서울로 아버지한테 와서는 둘이서 자취를 했다.
이래서 아버지와 나는 15년간 같이 살면서 어머니보다 아버지가 정이 더 많이 들은 것같다.
어느정도 자리가 잡히고나서 동생들을 데려다가 학교를 보내고 내가 엄마노릇을 하며 살았고 어머니는 그곳에 터전을 쉽게 어쩌지 못해 양쪽에서 왕래만 했다.
딸 다섯에 막내로 아들하나를 얻어 금이야 옥이야 키웠는데 지금은 비록 안계시지만 부모님한테 불효를 저지르고 있기에 내가 맏이로서 이렇게 가슴저미는 그리움으로 사모친다.
어머니가 갑자기 병을 얻어 일직 돌아가시고 어린 동생들과 아버지가 함께 살면서도 아버지는 외로운 내색한번 하지않으시고 자식들을 끔직이도 사랑하셨다.
낮에는 생활전선에서 열심히 일하시고 저녁이면 자식들과 자리를 같이하며, 그림도 그리시고 약주 한잔하시며, 노래도 잘부르시고,등산을 즐기시는 낭만이 풍부한 아버지셨다.
자식들이 장성하여 출가하고 며느리에 손주까지 보셨지만 아들은 매사가 여의치 못해서 항상 측은해 하시면서도 불평없이 잘 지내시더니 드디어는 고혈압으로 중풍을 얻으셨다.
다행히도 몸져눕는 중병은 아니였지만 오른쪽 거동이 좀 불편해서 고생을 좀 하셨다.
자식들이 여러명 있어도 아버지도 나와 정이 제일 많이드셨는지 자식중에 나를 제일로 치시던 우리아버지!
내가 자주 찾아 뵙고 용돈도 넉넉히 드리고 해야하는데, 직장생활에, 시댁의 맏며느리로 그 것도 맘데로 되는 것이아니었다.
마지막에 나를 보고싶어 하셨는데 사무실에서 피치못할 일때문에 찾아뵙지 못했던 것이 지금도 한이되는 것이다.
돌아가신 후에 아버지 방엘 가보니 벽 사방에 왼손으로 내 전화번호를 수도없이 써놓으셨다.
필요할 때 빨리보고 전화를 하시려고.............
나는 가슴을 치며 통곡을 해도 가신 아버지는 대답이 없다.
당시에는 한달에 한번씩 아버지 산소엘 찾아가서 인사를 드리리라고 다짐했지만 그건 그때 마음 뿐이었지 역시 실천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지금도 남동생이 잘살고 있다면 이토록 가슴저미게 아버지가 그립지는 않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가 남겨주신 재산을 몽땅 날리고 지금은 집도절도 없이 방황을 하고 있으니 내 어찌 마음이 편하겠는가?
아버지 영전에 아버지! 아들은 걱정하지 마시고 편히가세요!
못믿어 하시는 아버지의 아들은 제가 도와주겠습니다.
이렇게 약속을 했지만 내가 아무리 도와줘도 한계가 있지 인제는 측은 하기만 하다.
아컴에서 다행히 수다방을 만들어 이렇게 가슴에 맺힌 수다를 털어놓으니 속이 좀 편하기는 해도 한편은 누워서 침벧는 격이 될 수도 있다.
하여간에 나는 우리 아버지가 보고싶다.
그 인자하시던 아버지를 꼭 한번만 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그리운 우리아버지!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아버지의 아들 좀 잘 되게 도와주세요!
며칠후 아버지 기일에 찾아뵙겠습니다.
나는 내가 어머니 대신으로 동생들을 키웠는데 내가 잘못 키웠나? 하는 생각도 든다.
내가 보기에는 나무랄데가 없는데,그렇게 착하고 똑똑한데 왜 일이 그렇게 안풀리는지 알 수가 없다.
한많은 인생살이가 엉켜버린 실타래처럼 풀어도 풀아도 풀지를 않는다.
가을을 타는 내가 흉이 될 수도 있는 수다를 늘어놓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