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 바다다. 보리바다다 !”
구릉지대에 파노라마처럼 펼쳐진 청보리밭을 보면서
올해 중,고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이 큰 소리로
고창군 공응면에 도착했음을 알린다.
서해안고속도로 고창 IC에서 빠져나와 톨게이트 앞 삼거리에서
아산 방면으로 우회전해 796번 지방도로를 따라
무장을 거쳐 공음 쪽으로 가다 보니 용수(계동) 버스 정류장 삼거리에
학원농장 돌 팻말이 서 있었다.
왼쪽으로 군도를 타고 2km 정도 들어가자 이이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다랑밭만 봐온 아이들에게는 고창 청보리밭이 보리바다였을게다.
정말 진풍경이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 다시 찾은 이곳 야트막한 언덕배기 너른 들은
온통 푸르다. 보리들이 빼곡하다.
하늘은 오늘따라 눈이 시리도록 맑다.
4월의 첫째주말에 내리 붓는 햇살이 보송보송 자라난 보리밭에 흩어진다.
보리잎은 햇살의 온기를 먹고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스치는 바람에 잔잔한 녹색의 파도처럼 보리잎이 물결친다.
가슴 가득히 초록물이 든다.
때마침 한껏 자란 보리들이 ‘쏴아’ 불어오는 바람에 파도치듯 출렁인다.
경기장의 파도타기 함성처럼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휩쓸어가는
거대하면서도 아득한 물결.
보리밭 위로 종달새가 까만 점처럼 날아가고,
앞뒷녘에서 소쩍새가 소쩍소쩍 맞장구로 울어댄다.
바람결에 실려 온 청보리의 풋풋한 내음.
아!
얼마만인가.
이런 고향의 냄새가...............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우리고장 고창군 공음면 20만평의 보리밭을 거닐면서
백번도 넘게 이 노래를 흥얼거고
'눈이 부시게 푸르른 날은 그리운 사람을 그리워하자∼.’
고창출신 시인인 서정주의 시 푸르른 날을 읇조리며
그리운 사람의 이름도 불러 보았다.
회색빛 도시를 탈출해 보리밭을 누비며
마음껏 푸르름을 들이 마셨다.
혼자 온 여학생도 있고 우리처럼 아이들과 함께 온 가족의 모습도 보인다.
카메라에 생동하는 보리물결을 담아내는 사진작가 두엇,
한가롭게 보리밭 사잇길을 거니는 연인들,
중년의 친구 모임까지 각양각색의 사람들이 보리밭 사잇길을 걸어간다.
상쾌한 봄 공기를 마시며 초록의 바다 위를 걸었다.
세상사 근심걱정이 모두 날아가는 듯 하다.
보리밭은 사람마다 색다른 정취를 느끼게 한다.
채 여물지 않은 보리이삭을 베어 식량을 대신해야 했던 세대에게는
지긋한 보릿고개가 사무칠 것이다.
또 다 자란 보릿대를 짓 뭉개며 사랑놀이를 즐긴 386 세대에게는
짜릿한 추억으로 보리밭이 기억될게 분명하고
어린 시절을 시골에서 지낸 사람들이라면
서릿발 오른 청보리를 지신 밟듯 꾹꾹 밟았던 기억,
보릿대로 피리를 불었던 사람들에게는 보리 이랑 수만큼
보리에 대한 추억이 아주 선명할 것 이다.
사실 몇년 전만 하더라도 산밑 반이랑이며
나락을 베고난 논 이랑까지 보리밭이 지천이었다.
보리베기와 타작의 고단한 기억에도 불구하고
보리밭은 언제나 새봄의 희망을 주었다.
세찬 겨울바람을 견디고 언땅을 뚫고 솟아나는 푸르름의 희열이라니.
어느 세월 보리밭 구경이 힘들다.
한창 보리순이 오른 고창 청보리농장은 그래서 더 신기하고 이채롭다.
추억을 가진 세대 뿐 아니라 삭막한 도회지의 경험에 익숙한 아이들에게
청보리밭은 참으로 감탄스런 풍경임에 분명하다고 말한다.
야트막한 구릉을 따라 여인네 치맛자락 같은 지형을 따라 조성돼
사뭇 짓푸른 바닷물결 같기도 하고 새로 짠 융단결같기도 한 보리밭을
다리가 아프도록 뛰어 다녔고 걸어 다녔다.
굽이굽이 보리밭을 뒤채는 깨끗하고 시원한 바람!
요즘처럼 숨막히는 세상에 청보리밭 만큼 청신한 볼거리가 있을까.
가슴의 그을음이 한순간에 걷히는 듯 보리밭은 눈부시게 푸르고 평화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