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에서 말하는 최선은 무엇인가?
바로 구원이다.
즉 구원을 받으면 천국을 간다.
나는 천국을 아직 보지 못했다.
보지 못했다는것은 아직 죽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살아 있는 우리는 늘 천국을 본 것처럼 애기한다.
그렇다고 지옥은 가기 싫다.
왜냐하면 지금도 살아 있는 게 지옥같다고 하는 사람들이 많다.
특히 믿는 사람들은 지옥을 가지 않기위해서 교회를 나간다.
나 역시 그 지옥을 벗어나기 위해서 교회간다.
그렇지만 교회는 천국이 아니다.
이건 분명하다.
나는 구원이라는 말을 단 기독교인에게 적용한 다는 것은 께름직하다.
자신이 없다. 즉 예수의 피만으로 통한다는 그 구원이 나에게 겉도는 기름과 같다.
누군가는 나에게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
뭘 믿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그렇지만 사람을 믿어도 믿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는다.
유독히 기독교인들에게 믿는 사람들이라고 하고 혹은 예수쟁이라고 한다.
나는 이런 말은 별로다. 꼭 따로국밥처럼 밥은 따로 구원은 국밥처럼 밥말아먹는 정도로 겉돈다.
맨날 교회가서 설교를 들어도 나의 일상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하루는 짧고 나의 일상은 길다. 길기만 한 가? 매번 같은 장소에서 매번 같은 기도에 매번 같은 생각에 늘 종종 대게 하는 습관들의 뭉친 것에 심한 중독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늘 죄인이라고 다그친다.
누가 처음부터 죄인될려고 태어나 달라고 사정한 것처럼 우리는 코너에 몰렸다.
날마다 용서는 누가 해 주는가?
바쁘다. 바뻐!
하찮은 것은 흔하다는 것이다.
누가 공기를 팔지 않아도 안 사도 저절로 숨 쉬어지는 그런 흔함과 허다한 무리들이 맘껏 누려야 하는 것.
구원은 그래야 한다.
나만 나만 구원을 먼저 받자고 경쟁을 부추기는 것은 사기다.
낮아지라는 것도 겸손해지라는 것도 모두 귀해서 찾는 것이다.
원체 보이지 않고 작은 바이러스들인데, 그런 게 밥처럼 식빵처럼 늘 널브러져 있으면 누가 새삼스레 필요하다고 찾아 다니곘는가?
구원은 너무 싸다. 그래서 거저 준다고 했다. 값 없이...
사랑을 통한 구원을 만나야 한다.
인내를 통한 소망을 믿음을 동반한 구원중에 가장 빛나는 사랑구원이라고 성경이 누누히 강조한다.
더 이상은 교훈도 설교도 도덕도 불감증에 걸려서 내성이 더욱 강하다
묻고 싶다.
누가 먼저 천국을 갈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