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가지 않은 길 - 백재 김정문 선생 발자취
키 크고 몸튼튼 2008/06/18 14:03   http://blog.azoomma.com/hongjig/278650
아무도 가지 않은 길 - 백재 김정문 선생님의 발자취

 

알로에 학교를 세울 때까지

전세계에 알로에의 진가를 알릴 때까지

쓰러져서는 안된다. 죽어서도 안된다.

- 김정문

 

통영의 아름다운 청년

 

통영은 경상남도 서남부에 위치한 아름다운 섬을 품고 있는 해양도시다. 서쪽은 남해군과 바다를 마주하고, 남쪽은 공해로 이어진다. 평야가 없고, 구릉지가 중첩된 해안에 약간의 평지가 있을 뿐이어서 농사짓기에는 적절하지 못한 땅이다. 그러기에 옛날부터 해안선을 따라 반농반어의 촌락이 형성되었으며, 특히 리아스식 해안에 알맞은 수온의 동해난류가 흐르는 이 해역은 한국수산의 보고라 할 수 있다. 동양의 나폴리라 불리는 이 아름다운 해양도시는 백재(伯栽) 김정문 선생의 사상적 모체가 된 곳이다.

 

1927년, 백재 김정문 선생은 통영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김평주(金平柱), 어머니는 이금수(李今守)였다. 외조모 때부터 기독교 신앙생활을 하였으니 3대가 기독교의 가계를 이어가고 있다. 특히 그의 모친은 철저한 신앙인이었고, 친정어머니를 포함한 가족 모두를 부양하는 억척스런 여성이었다. 그의 삶이 그런 어머니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당시 통영교회(대한예수교장로회)를 다니던 그의 모친은 여전도사로 발탁되어 전교 활동을 하였다. 그의 모친은 결혼 후 첫 딸을 낳았으나 곧 죽고, 두 번째 『사라』 누나, 세 번째 『애희』 누나, 네 번째 『복귀』 누나를 낳으셨다.

 

이렇게 다복했지만 늘 아들이 없는 것이 한이 되었다. 그의 간절한 소망은 서원(誓願) 기도로 이어지고 아들을 주시면 하느님께 바치겠다는 약조를 굳건히 하신 것이다. 즉, 목사가 되게 하겠다고 서약하신 것이다. 마침내 소원하던 아들을 낳았으니 그가 백재 김정문 선생님이다. 통영교회의 진종학(陳宗學) 목사님은 『정문』이란 이름을 주셨고 곧 유아세례를 했다. 정문(正文)은 글자 그대로 ‘바른 글’이란 뜻인데, 생전에 20여권의 책을 집필하거나 번역서와 공저를 내게 된 것은 이름에서 비롯된 섭리인 모양이다.

 

만 네 살 때에는 호주 선교사가 경영하는 진명(進明)유치원에 들어가 교회의 유년 주일학교에 다니게 되었다. 그는 항상 가족과 교회의 어른들에게 따뜻한 사랑을 받으며 살아왔다. 그가 이웃을 사랑할 줄 아는 인간으로 성장한 것은 그 때 주위 사람들에게서 받은 강렬한 사랑 때문이었을 것이다.

 

어린 시절, 집 앞 마당에 옆집 감나무가 넘어와 빨간 감이 탐스럽게 열려 있었다. 무심코 감 한 개를 따서 한쪽을 씹었다. 그 순간 그의 어머니가 보시고 화를 내셨다. 그리고 그를 이끌고 옆집으로 가서 입에 있던 감을 뱉어 주인에게 바치고 머리 숙여 사죄를 하게 했다. 그때 그의 어머니는 “지푸라기 한 가닥이라도 남의 것을 훔치지 말라”고 하셨다. 그 후 그는 평생 ‘정직’이란 것을 도덕 제 1조로 삼고 살아왔다. 김정문알로에 기업의 사훈(社訓)이 「진실」인 것도 아마 이런 영향일 것이다. 1987년 93세를 일기로 영면(永眠)하실 때 까지 간절한 기도로 삶을 채우셨던 어머니는 김정문 선생 영혼의 뿌리이자 줄기였다.

 

읍내 뒤쪽에는 안띠산이 북쪽을 가로막고, 남쪽에는 배들이 쉴 새 없이 드나들었다. 한산섬과 거제섬이 가로막은 잔잔한 바다가 호수처럼 빛을 발하는, 인구 2만의 수산물 집산지 통영은 그를 향학열에 불타오르는 소년으로 인도하였다. 만 일곱 살부터 입학하려던 초등학교는 열 살이 되어서야 비로소 들어갈 수 있었다. 1936년의 일이다.

 

그는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기독교 유치원과 교회 유년학교에서 성장했다. 동네 아이들과 함께 신문지로 고깔모자를 만들어 쓰고, 골목대장 노릇을 하며 여느 어린아이들처럼 무럭무럭 자랐다.

 

통영초등학교는 학생수가 2,000명쯤이었고 경남에서 두 번째 정도로 큰 학교였다. 1학년 때 국어 읽기 대회가 있었는데 참가자 80명 중에서 뜻밖에 1등을 차지하였다. 그 후 4학년 때는 도지사 특별상을 탔고, 6학년 졸업 때도 도지사상을 수상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대부분의 과목에서 만점을 받는 우수한 성적을 기록하였다. 그의 탁월한 기업경영능력은 이렇듯 어릴 적부터 엿볼 수 있었던 것 같다.

 

백재의 아버지는 통영교회의 성가대에서 나팔대장을 하셨다. 선교사집 요리사를 하시면서 교회에 봉사를 하신 것이다. 아마 그의 예술적인 감각은 그런 아버지의 소질을 이어 받은 것일 것이다. 그러던 중 일제 초기인 당시, 통영의 애국 청년들이 모여 조선청년회관을 지으려고 모금 운동을 나섰다. 그 방법은 나팔대를 구성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순회하여 음악회를 여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보수를 한 푼도 받지 않고 3년간 순회공연을 마치고 맨 손으로 집에 돌아오셨다.

 

이 모금운동으로, 작은 도시 통영에서는 큰 벽돌집 회관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 경찰의 탄압으로 청년단은 해체되고, 일제 말기엔 통영여자중학교 교사(校舍)로 쓰였던 것이 지금은 동사무소로 사용되고 있다. 사적(史蹟)으로의 가치가 있는 건물인 듯한데 방치되어 아쉬움이 크다. 그 후로 그의 아버지는 통영 봉래극장 나팔대장이 되었고 그로 인하여 1930~1940년대 미국의 서부영화나 희극, 채플린이 주연한 무성영화, ‘이수일과 심순애’ 등 온갖 신파극을 아버지 덕분으로 무상출입하며 관람할 수 있었다. 그가 평생 영화광이 된 것은 바로 그 아버지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선생은 1942년 3월에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4월에 서울에 있는 관립(官立)사범학교에 입학하였다. 경성관립사범학교는 쉽게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에게 평생의 훌륭한 아름다운 스승이 한분 계셨으니 6학년 담임인 오점량(吳占良) 선생님이셨다. 교장선생님의 반대를 무릅쓰고 경상남도 전체에서 한명 정도 응시하는 곳을 교직의 운명을 걸고 추천해 주신 것이다. 그는 수석권의 성적으로 합격을 하였고 학교의 자랑거리가 되었다. 하지만 사범학교에 입학한 지 일년이 못되어 전교생 대상 X-Ray 검진결과 폐결핵으로 판명되어 휴학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943년 그는 다시 복학했다. 하지만 몇 달 못가서 병세의 악화로 다시 옥포로 돌아왔다. 즉시 휴교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백재는 당시 치사율이 아주 높은 폐결핵에 걸리면서 위확장, 위궤양, 위산과다, 위하수, 만성중증 변비, 류머티스 관절염을 함께 앓았다. 만 14세의 어린 나이에 병고와의 사투를 시작한 것이다.

 

백재의 병고는 이후 국내에 자연의학의 체계적인 역사를 기록하게 된 원동력이 되었을 것이다. 자신의 질병치유를 위해 시작한 그의 삶은 이후 현대의학이 안고 있는 질병치료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자연의학의 연구와 개발로 승화됐고, 그것은 선생의 평생 화두였다.

 

기독교적 사상과 삶의 철학.

우리 나이로 16세였던 거제섬 옥포 시절은 그를 여러 난치병과 싸우면서 밤을 지새우는 독서생활로 이끌었다. 18세까지 옥포생활을 한 셈인데, 이 시기에 탐독한 서적들이 그의 인생철학을 형성시켰다고 할 수 있다. 링컨의 전기, 간디의 연설문집, 일본의 빈민굴 전도자 가가와 도요히코, 스위스의 교육자 페스탈로치, 덴마크의 국부 그룬트비 목사 그리고 세계 사상전집, 세계 문학전집, 또 한국문학전집 등 명저들과 계몽주의 소설들을 신들린 사람처럼 읽어 나갔다. 이런 사상, 문학서적들은 그를 감격의 도가니로 몰아갔고, 인생철학인 기독교적인 휴머니즘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의 독서에 대한 재미있는 일화 하나를 소개한다.

 

‘어머니는 밤 중에 여러번 일어나서 “정문아 그만 읽고 좀 자거라”하시면서 걱정을 하셨다. 하지만 나는 “네”라고 대답만 하고 책 내용이 재미있어 그냥 꼬박 밤을 새운 적이 많았다.’

 

그는 수산학교에 다니면서 통영교회 학생회를 만들었다. 3학년 학생회장을 맡으면서 교회 일을 열심히 도왔다. 성가대에도 참가하고, 유년 주일학교 선생 역할도 하고 중·고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전도활동도 벌였다.

 

통영 수산학교를 마치고 부산 고려 신학교에 입학하였다. 몇 년 월반한 격인데 해방 직후 제도가 혼란한 시기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1학년을 마치고 서울의 장로회 신학교로 옮겼다. 신학과정 1년을 마치고 그는 고민에 휩싸였다. 어머니의 서원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과, 자신의 자유적인 사고와 인문주의적 현실주의 참여에 대한 갈등 때문이었다. 결국 부산 동아대학 문학부 2학년으로 편입하는 길을 택했다.

 

1950년 그의 부산 시절에 6.25동란이 발발했다. 그때 그는 자기 집 이층에 피난 온 사람들 수십 명을 수용하고 가마솥 밥을 지어 제공하기도 하였다. 또한 ‘학생교회’란 간판을 내걸고 기독교 사상을 전제로 한 ‘실로암 의원’이란 병원도 개설하였다. 의사를 고용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일종의 무료진료를 베푸는 형식이었다. 학생운동과 병원 운영을 병행하려니 자금이 필요했다. 그래서 박괄채라는 약사 친구를 통해 미군의 구호 약품도 구하고 당시 포목상을 하시던 어머니와 누나의 도움으로 재원을 마련하였다.

 

당시 부산 서면의 부전교회 김형식 목사님의 배려로 그는 교회 학생회 일을 하면서 부산형무소 담임 목사님의 배려로 교도소 주일예배에서 설교를 담당하게 되었다. 20대 초반의 그야말로 설교하기엔 애송이에 불과한 나이에 무모하게 공산주의자들과 다른 죄수들에게 복음을 전하겠다고 열변을 토했다. 그때 선생의 설교로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에 귀의(歸依)하는 감격적인 사례를 경험하기도 하였다.

 

그때 교도소 병실에서 수많은 환자들이 의사나 간호사의 치료를 받아보지도 못하고 죽어가는 것을 지켜보며, 그는 큰 충격에 빠졌다. 소외 받은 계층을 위한 자신 스스로의 책임감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백재는 서울에 모인 기독학생동지회, Fresh man group을 통합하여 ‘기독교사상 연구회’라는 조직을 출범시켰다. 그는 회장에 만장일치로 선출되었다. 부회장에는 정희경(前 국민회의 국회의원), 총무에 오재식(吳在植)씨 (前 선명회 회장)가 선출되었다.

그들은 한국 기독교운동의 역사이신 강원룡 목사님이 만드신 전국기독교학생연합회(KSCF)의 핵심 멤버들이 태반이었다.

 

이 모임은 미래에 기독교적 이상사회를 만들겠다는 비전을 갖고 있었다. 기독교적 사랑을 바탕으로 하여, 자유와 평등이 보장되는 사회, 사회정의가 넘쳐흐르는 사회를 구현하는 것이다. 사회 개혁운동을 위한 마음으로 가득한 그는, 자금을 해결하기 위하여 서울대학교 문리대 앞에서 외국책 장사를 하기도 했는데 그 이익금은, 부족하지만 그때그때 긴요한 자금이 되었다.

 

기독교사상연구회는 매주 토요일 오후에 모임을 갖고 여러 강사를 초빙하여 강의도 듣고 다양한 독서 토론회도 운영하였다. 그때의 멤버를 보면 국회의원을 지낸 박정수, 정희경 의원, MBC 감사를 지낸 이상설 씨, 김영창 목사, 고려대 대학원장을 지낸 한배호 박사, 신경정신의학회 회장 김광일 박사, 전 인하대 사범대학장 김선양 교수, 서울대 진도훈 교수 등이었다.

 

한편으로 대중강연도 개최하였는데 김재준 목사, 연세대 김형석 교수, 함석헌 선생 등 거물 강사들과 함께 강연을 하기도 했다. 강연의 인기가 높아 이화여대 채플강의에 초청되기도 했다.

 

기독교사상연구회 멤버 중 조형균이란 분은 서울대학교 약학대학과 한국신학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서 제지학(製紙學)을 배웠던 분이다. 그는 함석헌 선생의 평생 제자로 오직 기독교 정신만으로 빈곤과 싸우며 온갖 저술과 명저들을 번역해왔다.

 

그와 백재 선생은 뜻을 합하여 ‘백재문화사’를 만들었다. 이 출판사에서 지금까지 발행한 책은 다음과 같다. 『경영자는 보살이다』『광야를 보는 눈 - 구약성서에서 무엇을 듣는가?』 『노자의 신화, 사화(史話), 지혜』 『한·일관계에 생각하는 일』 『아직도 늦지 않다면』 『먼 빛의 눈길』 『이 여인을 보라』 그리고 기독교서회에서 발간한 『인간의 대지(大地)』 등이 있다.

 

운영자금을 위한 사업으로 ‘신교사’라는 회사를 만들었으나 잘못된 금융사업 투자로 포기하게 되었다. 그 후 서울을 떠나게 되었고, 기독교사상연구회도 자연 해체되었다. 수십 년이 지난 후 초동교회 조향록 목사는 “김정문 씨 당신이 그 모임의 구심점이었는데 당신이 없어지니 기독교사상연구회도 붕괴된 것입니다”라고 했다. 이처럼 기독교적 배경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였다.

 

알로에와의 만남

사업 수완이 좋았던 그가 다음으로 관심을 가진 것은 원예업이었다. 그는 원예업의 돌파구를 새 기술에서 찾으려고 했다. 식물의 수경(水耕)재배법과 조직배양(組織培養), 그리고 생화(生花) 냉장법이 그것이다.

 

수경재배란 물이나 자갈을 콘크리트 대형 평면조(平面糟)에 넣고 그 속에서 식물을 키우는 방법인데, 생산성이 아주 높은 새로운 재배법이었다. 그리고 조직배양이란 식물 생장점의 세포조직을 떼어 배양액 안에서 키우는 것인데, 난과 같은 고가의 식물을 대량 번식시킬 수 있는 방법이다. 수경 재배와 식물 조직배양은 선진국에서는 이미 실험에 성공한 것이었으나 생화 냉장법은 백재선생의 독창적인 방안이었다.

 

하지만 원예사업도 여러 가지 사유로 지속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원예업에 입문한 후로도 그의 건강은 악화 일로에 있었다. 특히 위장병과 중증 변비의 고통, 그리고 류마티스 관절염의 격심한 통증은 형언하기 힘든 것이었다. 게다가 1년 중 8개월은 감기에 걸려 있었다. 그러나 사업에 대한 집념은 식을 줄 몰랐고, 걸어서 다닌 것이 아니라 정신력이 몸을 끌고 다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부산의 대학 병원, 적십자 병원, 개인 전문의 등, 유명 병의원은 모조리 찾아다니며 입원도 하고 치료를 받았으나 병세는 조금도 호전되지 않았다. 그의 건강은 극도로 악화되어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만신창이가 된 육신에다가 신경정신 질환까지 겹치게 되었다. 불면증, 불안공포증에 걸린 것이다. 게다가 안정제 중독까지 겹쳤다. 그리하여 생업도, 가정도 파탄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불행과 고통으로 점철된 생애를 대충 정리하고 인생 마지막 장을 눈앞에 두고 있던 어느 날 초등학교 동창인 정길금 씨를 만났다. 그는 친구의 병고를 보고 본인이 근무하던 회사 사장이 『알로에』란 일본책을 보고 병이 나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백재 선생은 즉시 『알로에 건강법』이란 책을 구했다. 이 책은 일본의 유명 여성잡지 ‘주부의 벗’사에서 발행한 것이었다. 1975년의 일이었고, 그의 나이 49세 때였다.

 

『알로에 건강법』이란 일본책에 나와 있는 품종은 ‘아보레센스’였다. 그런데 이 생잎을 먹은 다음 날부터 지독한 변비가 해소되기 시작했다. 알로에는 열대, 아열대 원산으로 백합과 알로에 속으로 분류되는 식물이다. 그리고 알로에 품종은 600여 종이나 된다.

 

그런데 일본 알로에 책만을 믿고 아보레센스를 먹은 결과 속쓰림은 더 심해졌다. 그의 위장병은 격심한 위산과다여서 아보레센스가 증상을 악화시켰던 것이다. 백재 선생은 전국을 돌아다니며 다른 알로에를 찾았다. 결국 부산 동래 온천장에 있는 ‘한독 원예 고등학교’ 표본실에서 ‘알로에 사포나리아’라는 품종을 찾아냈다. 위산과다와 위궤양에 속효를 나타냈다. 그후 사포나리아와 베라는 같은 효능을 나타내는 것을 알았다.

 

그는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알로에를 전해줄 의무가 있다고 생각했고, 알로에는 사업적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그에 따라 부산 농장에 알로에를 심어놓았다가 인천의 부평에 있는 친구의 농장을 빌려 재배를 시작했다.

 

그러던 어느 날 ‘새마을 신문’ 윤현재 부장이 취재를 해서 알로에 특집기사가 신문에 나갔다. 연이어 ‘알로에 재배법’이란 글이 새마을 신문에 연재됐다. 그것이 계기가 되어 기독교방송 농민 시간에 출연하게 되었다.

 

매스컴의 힘은 놀라워 전국적으로 알로에 붐이 일기 시작했다. 기독교방송 외에 동아방송, 동양방송, 문화방송, KBS방송에도 출연하게 되고 신문이나 잡지 인터뷰도 줄을 이었다. 1979년 서울 종로 기독교회관 안에 ‘(주)한국 알로에의 집’이란 회사를 설립하고 전국 주요도시에 40여개의 대리점을 만들었다.

 

그러나 사업의 성공도 잠시, 알로에 사업의 번창은 무수한 저질 알로에 업자들의 속출로 어려움을 겪게 됐다. 당시 수입된 알로에의 3분의 1이 팔리지 않아 그대로 8,000평 규모의 반월농장에 심어졌다. 농장의 재고는 쌓여가고, 제품 재고는 늘어가니 사세가 급격히 기울어질 수 밖에 없었다.

 

1982년 가을, 빚더미에 앉은 그는 알로에 센스 분말 상품인 ‘아보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그러나 83년 봄이 오기도 전에 알로에 사업은 도산하고 만다. 채권자에 시달리면서 그는 날마다 혼자 남한산성에 올랐다. 모든 것을 잃었어도 건강은 지켜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남한산성 중턱에 산수유꽃이 만발해 있었다. 그는 마음 속으로 다시 산수유꽃이 필 때까지는 재기하리라는 강한 의욕을 다졌다. 오늘날 산수유제 (불우하고 어려운 환경의 악성질환자에게 무상으로 건강기능성 식품을 지원하는 제도)는 그런 취지에서 시행되고 있는 것이다.

 

알로에 사업은 인류를 위한 운동이라는 그의 불꽃같은 사업에 대한 정열은 그의 작은 메모에도 나타난다. “알로에 학교를 세울 때까지, 전세계에 알로에의 진가를 알릴 때까지 쓰러져서는 안된다. 죽어서도 안된다.(1981년 1.31 알로에 사업중)”

 

83년 10월 그는 과거의 회사 직원 한사람을 데리고 청계천 7가 몇 평짜리 골방을 빌려 다시 알로에 사업을 시작했다. 매스컴의 도움은 그의 의지에 새로운 불을 지폈다.

 

중앙일보 생활과학부 최정민 부장을 찾아간 그는 “알로에는 인류를 위해 절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러자 즉석 인터뷰가 기사화되어 크게 실리게 되었다. 이후 KBS 2TV ‘할아버지 할머니’란 프로그램에 매주 1회 10분씩 ‘알로에 건강법’에 대하여 10여회에 걸쳐 출연을 했다. 그리고 84년 12월에는 KBS 2TV ‘무엇이든 물어보세요’에 소개됐다. 『건강다이제스트』란 월간지도 백재 선생의 글을 5년간이나 연재해 주었다. 『건강다이제스트』는 당시 14만부의 발행부수를 기록하고 있었다. 그리고 건강잡지로는 당시 유일한 것이었다. 이렇게 알로에 사업은 서서히 성장해 나갔다.

 

그는 경쟁사와의 경영 차별화를 위하여, 84년 서울 종로 5가 기독교 회관 소강당에서 알로에 강연회를 재개했다. 처음에 참석한 청강자는 단 한 사람이었다. 이에 좌절하지 않고 끈질기게 강연회를 계속하였다. 한 달에 한 번씩 강연회를 하다가 나중에는 1주일에 1회씩 개최했다. 점차 주 1회로는 청강자를 수용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주 2회, 금요일과 토요일에도 강연회를 했다. 1회 청강자 수도 200~300명으로 증가하였다. 이 강연회는 5년간 계속되었고, 그의 생애에 1,000회 강연을 돌파하게 되었다.

 

87년 우여곡절 끝에 김제 농장의 개장과 함께 국내 최초로 ‘알로에 베라’ 진공냉동건조분말을 출시했다. 89년에는 김제 농장에 대지 200평, 건평 60평의 공장을 지었다. 그리고 92년과 93년에 대지 750평, 건평 600평의 KIMP(공장의 공기정화 설비)시설의 2층짜리 건강식품 공장을 준공했다. 그리고 그 해에 세계 최초 무(無)방부제 ‘알로에 베라겔’ 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무방부제 겔 제품이라는 것은 가히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건강제품을 표방하는 유수한 기업들이 제품의 장기보관을 위하여 방부제를 첨가하는 현실에서, 기업의 이윤감소를 감수하고 시도했던 과단성 있는 행동이었다. 그의 경영철학이 여실히 엿보이는 사건이다. 아직도 많은 기업들이 이윤추구에 급급하여 인간을 도외시한 풍토가 만연하는 것을 볼 때 대체의료인의 갈 길은 더욱 분명해 진다고 하겠다.

 

그는 마음이 괴로울 때면 지금의 제주 농·공장을 찾았다. 제주 농·공장에는 600여 품종의 알로에가 찬란히 꽃을 피우고 있다. 이는 세계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는 소중한 건강문화유산인 것이다. 살아 생전에 세계의 곳곳을 다니면서 알로에의 살아있는 역사를 이 땅에 재현하고자 하는 바램을 실천에 옮긴 곳이다.

 

현재 제주 농·공장은 종합 휴양관광 리조트 산업으로 발돋움하기 위하여 알로에 팜 & 식물원으로의 면모를 더해가고 있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알로에 보고(寶庫)를 우리는 잘 보존해야 할 의무를 가져야 할 것이다.

 

92년 5월에는 경기도 천안시에 1,2층 건평 600평짜리 알로에 화장품 공장을 준공하였고, 95년에는 천안시 다른 곳에 약 4천평 대지에 5층 건물 높이, 500평 규모의 물류센터를 만들어, 그 안에 140평 규모의 ‘김정문 알로에 과학연구소’를 설립하였다. 그리하여 알로에를 통한 제반 생산시설을 고루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김정문알로에는 2003년 이후로 탄탄한 재무구조를 바탕으로 최근 안정된 성장을 유지하고 있다. 백재 선생의 뜻을 이어 고객만족을 기치로, 건강사업 전반에 문화와 가치를 창달하는 다양한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인간적 기업의 모험

‘기업이든, 개인이든 잘못된 현실을 그냥 보고 지나치면 그것은 있으나마나한 존재이다. 부패하고 불공정한 모순에 찬, 현존하는 우리의 역사를 개혁하는 일에 뛰어 들지 않으면 안된다’.

 

백재 선생은 이런 확신이 있었기에 기업을 경영하면서도, 여러 사회개혁을 시도하고 또는 그런 단체를 돕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 같은 그의 사상을 펼치기 위해 그는 무엇이든지 행동으로 보여줘야 했다. 선생의 정신은 산수유제도, 만만만 운동, 알로에 묘목재배 캠페인, 각종 단체활동에의 기부 등으로 이어진다. 이를 바탕으로 주)김정문알로에는 제2의 창업기인 현재 체제에서 2005년 제3회 윤리경영대상 사회봉사부분 대상의 영예를 안기도 했다.

 

과연 무엇이 백재 선생이 생각했던 기업 이념일까? 우리는 그의 기업관을 알아볼 필요가 있다.

 

자신의 존재 이유나 삶의 목적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누구든 참다운 인간이라고 할 수 없다. 이처럼 자기 자신의 존재 이유를 묻는 것이 이념의 출발이라면, 기업의 이념이란 기업의 존재 이유를 묻는 데서 시작된다. 모든 경제, 사회 활동이 인간으로부터 시작되듯이 기업도 인간과 사회를 위해 있어야 한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존재 가치가 없다. 자기를 위하고 남을 위하고, 사회 전체를 위할 때만 기업은 존재 가치를 갖는 것이다.

 

가령 농산물을 생산하는 경우를 생각해 보자. 인간은 먹어야 살기 때문에 먹는 것을 위해서, 생산 활동을 위해서는 농산물의 필요성은 당연하다. 그러나 더 많이 생산하기 위하여, 경비를 절감하기 위해서 제초제 따위의 농약을 친다면, 농산물을 먹는 사람은 암에 걸린다든지, 간기능장애가 온다든지 하는 심각한 피해를 입게 된다. 그러니 생산하는 것만으로 사회에 기여하는 것으로 볼 수는 없다. 그것이 인간에게 이로울 때, 생산의 가치가 있는 것이다.

백재 선생은 기업의 이념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역설하였다.

 

-백재 김정문 선생의 저서 [알로에 기업의 이념] 중에서 발췌-

 

‘첫째, 기업은 사회와 인간을 위해서만 존재해야 합니다.

즉 기업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사회에 불이익을 주어서는 안 됩니다. 환경을 파괴하면서 이익을 갖는 기업들도 많이 있지만 우리 기업은 환경을 훼손하지 않고 공해를 유발하지 않는 기업이어야 합니다. 이 사회와 인류를 위해서 존재하는 기업이어야 합니다.

 

둘째, 기업은 인류 건강의 보루이어야 합니다.

물론 기업이 이윤을 추구해야 하고, 기업을 존립시킬 수 있는 수지타산을 맞추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우리 기업은 인류의 건강을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존재여야 합니다. 우리 알로에 기업은 있어도 되고 없어도 되는 기업이 아니라, 인류 건강을 위해서는 반드시 있어야만 하는 기업이어야 합니다.

 

셋째, 기업은 자연주의에 공헌해야 합니다.

‘자연주의’라 하면 인간은 자연의 일부라는 개념에서 출발하는 말입니다. 자연을 파괴하면 그 일부인 인간도 파괴됩니다. 즉 우리의 인생관, 인류관, 지구관은, 인간은 대자연인 지구의 일부로 존재한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알로에 제품은 지구의 자연계에 지금까지 존재해 왔던 천연식품이고, 우리 인체에 근원적으로 작용하는 식품입니다. 알로에는 인간의 기본적인 자연성을 회복시켜서 건강을 지켜줍니다.

 

인간은 체액 Ph7.4 정도의 약알칼리인데 항상 이 상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인체의 항상성(恒常性)이라고 합니다. 이것은 가공식품으로 인하여 파괴됩니다. 이처럼 인간의 자연성이 파괴될 때 건강을 위협받게 됩니다. 알로에는 인간의 자연성 회복에 기여합니다. 그래서 건강을 유지시킵니다. 우리 기업 이념은 자연주의이어야 하고 우리 제품은 인간의 자연성 회복에 있어야 합니다.

 

넷째, 회사의 사주와 전직원은 공동의 이익을 위해 존재해야 합니다.

기업이 인간을 위해 있어야 하고, 기업을 위해 인간이 존재해서는 안 됩니다. 기업은 이윤 추구를 위해 직원들을 착취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 기업은 직원들의 창의성, 잠재적 능력, 개개인의 인간 완성을 돕는 기업이어야 합니다. 물론 임직원은 기업의 존립, 발전, 부가가치 창출을 위하여 헌신적으로 일해야 합니다. 인간다운 기업을 만들기 위하여 서로 노력해야 합니다.

 

다섯째, 기업의 이윤은 최대한 사회에 환원해야 합니다.

기업은 소외받은 이들과 그늘진 곳에 사는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 합니다. 기업은 인간과 사회를 위해서 존재할 때 그 가치를 갖습니다.’

 

‘상기할 것은 이것은 과학의 문제가 아니라 돈과 권력의 문제이다. 과학에 관한 것이 아니라 통제에 관한 문제이다. 이 지구상의 모든 국가에서와 마찬가지로 한국에서도 생명을 구하고 삶을 향상시킬 수 있는 제품과 치료법을 접할 자유가 없기 때문에 날마다 사람들은 피할 수 있는 고통을 받으며, 피할 수 있는 죽음을 당하고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한 인간으로서 지구상 모든 인류가 삶의 질을 높이고 생명을 연장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치료법과 제품에 접할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할 책임을 실현코자 했다. 이 시대의 자연의학자 백재 선생의 철학과 사명감은 그대로 기업에 투영됐다.

 

우리 건강의 대부분을 좌우하는 것은 우리들 자신이며 의사들이 아니라는 점, 우리가 우리 자신의 건강에 책임을 지지 않으면 만성질환이나 퇴행성 질환 없이 오래 살고 잘 사는 전쟁에서 영원히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 것은 백재 선쟁의 대체의료 정의 실천운동이었다.

 

기업이 좀더 인류적이고 인간적인 가치인식이나 사랑으로 형성되기를 기원했던 그는 ‘가장 인간다운 기업’을 만드는 것을 일생의 크나큰 모험으로 생각했다.

 

아직은 자그마한 중소기업이지만 ‘기업의 인간화’를 꿈꾸며 실현되기를 갈구하였다. 그것이 자기 직업에 대한 사회적 가치, 즉 인간 공동선(共同善) 의식을 부여하기를 기대했으며 이것이 인간의 건강을 위한 자연의학적 기업의 올바른 가치관일 것이다.

 

그는 기업인이기에 앞서 한 인간이었다. 인간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소박한 소년이었다. 하지만 그가 우리에게 다가올 때는 철학적인 고뇌와 문학적인 수려함이 뒤엉켜진 존재였다. 해박한 지식과 풍부한 인간미는 건강을 전파하는 대체의학도들의 올바른 디딤돌이었다. 아무도 가지 않은 길을 그는 홀로 선택했던 것이다.

 

- 내안의 자연 / 최연매 지음 -

출처 : 김정문 자연의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