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우리 모두의 눈 귀 코 혀는 사랑을 사냥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작전에 들어갑니다.
24시간 내내 작전 중입니다.
꿈속에서도 사랑을 찾아 헤매고, 그것은 이 우주의 번성을 위한 지극한 당연한 생명 활동입니다…
사랑을 찾아 헤맸던 어느 시인의 죽음
아직은 젊다고 할 수밖에 없는 창창한 나이에, 불안과 고독, 허무와 절망이 짙게 밴 시 몇 편 남겨놓은 채 어느 날 갑자기 생에 마침표를 찍은 시인이 있습니다. 밤이 이슥토록 거리를 헤매다가 심야 극장에 들어간 것이 마지막이었지요. 얼마나 술에 쩔어 있었던 것인지 알 순 없지만, 그는 영화가 끝난 것도 모르고 텅 빈 화면을 앞에 둔 채 눈을 감고 있었습니다. 더 이상 숨을 쉬고 있지 않다는 점만 빼면, 그의 모습은 너무도 태연해 보였습니다.
그래요, 젊은이가 그렇게 “외투 깊숙이 의문부호 몇 개 구겨넣고”(그의 시 “겨울, 우리들의 도시”에서 인용) 거리를 헤매다가 술에 취한 채 극장에 들어갈 수도 있는 거지요. 화면에서 주인공 남녀가 어떤 지랄을 하든 말든 쏟아지는 잠을 주체하지 못하고 헛소리 몇 번 하다가 잠이 들 수도 있는 거지요. 잘못된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그는 해가 중천에 떠서 조조 프로를 상영하기 전 청소를 하려고 들어간 아저씨가 아무리 흔들어도 대답이 없었습니다. 너무도 멀쩡하게 생긴 태연한 낯빛의 사내가, 마치 얼마나 오래 버티는지 숨을 멈추는 장난을 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런데 그걸 죽음이라고 하던가요? 이승과 저승의 거리는 원래 그렇게 짧은 법이라는 걸 온몸으로 증거하며, 그는 생사의 강을 건넜습니다. 허망하게. 속절없이.
낮과 밤의 경계선상에서 지는 태양이 온통 얼굴을 붉히고 있는 모습을 보고 “쓸쓸하고 장엄한 노래여”라는 제목의 시를 남긴 그는, 이렇게 적었습니다. “지우다 만 어느 창백한 생애여 / 서럽지 않구나 어차피 우리 / 잠시 타다 푸시시 꺼질 / 몇 점 노을이었다 // 이제는 남은 햇빛 두어 폭마저 / 밤의 굵은 타래에 참혹히 감겨들고 / 어둠 뒤편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어올 것이다.”
그가 남긴 노래들은 허무와 절망 일색인데도 저녁노을처럼 “쓸쓸하고 장엄”합니다. 그래서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쏘다니다가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두고 /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워 보았으니”라고 노래해도, 거기에는 쓸쓸한 절망만이 아닌 어떤 아름다움이 짙게 채색되어 있는 듯합니다. 그럼에도, 시인의 절망이라고 해서 아름다울 수만은 없습니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라는 대목에서는, “아!” 라는 짧은 외마디 비명이 튀어나올 정도로 아연하게 슬퍼집니다. (인용 대목들은 그의 시 “질투는 나의 힘” 중에서)
우주는 사랑의 소산
인생이란 어쩌면 그의 시처럼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는” 과정인지도 모릅니다. “미친 듯이”는 아닐지라도 세상 사람들의 눈 귀 코 혀는 사랑의 대상을 향할 때 간절해지고, 절실해지고, 의미가 충만해집니다. 어떤 빛깔 어떤 향기의 사랑이든, 사랑이 없다면 세상의 모든 말은 공허한 울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세상 만물은 그저 질서정연한 원자배열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사랑이 있기에 만물은 맥박을 쿵쾅거리며 뛰고 있는 것이겠지요. 사랑이 없이는 세상이, 우주가 존재할 수 없습니다. 나도, 당신도, 허무의 시인 기형도도 사랑의 소산입니다. 하늘을 가득 메우며 날아가는 철새들도, 아침에 피었다 저녁에 지는 나팔꽃도 사랑의 소산입니다. 바닷속을 오가는 물고기들도, 그들의 집이 되고 배경이 되어주는 산호도, 사랑의 소산입니다. 이 우주는 창조주의 사랑에서부터 잉태되었습니다. 사랑이 없었다면 어떻게 수많은 별들이 탄생할 수 있었겠습니까? 수조 개의 별들과 그 별들마다에 거주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많은 주민들이 사랑이 없이 어떻게 생겨날 수 있었겠습니까? 섹스를 하지 않는 연어들도 정자, 난자를 쏟아놓고 나서는 부르르 몸을 떨며 기쁨에 젖습니다. 서로 만지지도 않지만, 그들은 섹스를 한 것 이상으로 희열을 느끼는 것이 분명합니다.
세상 전체가, 우주 만물이 사랑에서 비롯되었고, 사랑으로 유지됩니다. 별과 별이 서로를 돌면서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사랑의 힘에 의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무 뜻도 없이, 누구의 입김도 없이, 우주를 방황하고 있을 리는 없지 않습니까? 사랑의 힘이 아니라면 어떻게 그것들이 그렇게 “질서정연한 방황”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모두의 눈 귀 코 혀는 사랑을 사냥하기 위해 쉴 새 없이 작전에 들어갑니다. 24시간 내내 작전 중입니다. 꿈속에서도 사랑을 찾아 헤매고, 그것은 이 우주의 번성을 위한 지극한 당연한 생명 활동입니다. 창조주의 설계도에 따라 사랑의 기쁨에 눈뜬 젊은이는 온 세상이, 온 우주가 다른 빛깔로 보인다고 말합니다. 풀도 나무도 하늘도 온통 달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분명, 사랑을 경험하기 이전과 이후로 대별될 수 있습니다.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사랑의 의미가 그렇게 큰 만큼, 사랑의 상실과 사랑이 충족되지 못할 때의 비애도 클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을 찾아 헤매지만 마땅한 임자를 만나지 못한 사람의 마음은 “외로운 사냥꾼” 바로 그것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기쁨인 사랑을 찾지 못했을 때의 허무와 비애는 수많은 예술 작품의 모태가 되어 왔지만, 우리 모두가 가만히 직시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사랑받지 않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점입니다.
누구도 사랑의 소산이 아닌 경우는 없습니다. 누구나 귀하고 귀한 생명입니다. 어느 순간에도, 그가 상실의 아픔에 함락당하여 슬피 울고 있을 때라도, 보이지 않는 큰 손은 그를 쓰다듬고 있습니다. 그것이 진실입니다.
아무리 사랑에 굶주리고 있는 외로운 혼처럼 보인다고 해도,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그가 사랑을 외면하고 있는 것일 뿐, 사랑은 어느 순간에도 태양처럼 그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가 스스로 구름을 만들어 태양을 가리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인류의 가장 큰 병은 “사랑결핍증”임이 분명하지만,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사랑에 대한 무자각증”일 뿐입니다.

사랑을 넉넉하게 받고 자라난 아이가 사랑을 베풀 줄 아는 어른으로 성장한다는 말이 있습니다. 불모지에서는 꽃이 필 수 없는 것처럼, 사랑은 사랑의 토양에서라야 무성하게 자랄 수 있다는 뜻이겠지요. 마찬가지로, 내 안에 흘러넘치는 사랑을 못 본 척하고 외로움과 고독에 쩔은 사람이 외부의 누군가와 멋진, 충족된, 아름다운 사랑을 꽃피울 가능성은 희박합니다. 스스로 사랑 받고 있음을 모르는 이는, 굶주린 이리처럼 기갈이 들려 사랑의 단물에 광분하겠지만, 아마도 더 더 많은 사랑을 요구할 뿐, 주는 데에는 인색하기 십상일 것입니다. 아무리 주고 싶어도 줄 수 있는 밑천이 없기 때문이지요. 기실은 밑천이 없는 것이 아니라, 아무리 써도 바닥이 나지 않는 무한한 밑천이 있는데도, 그걸 모르고 외면하고 있는 것일 뿐이지만요. 장님처럼 눈을 감고 있는데, 밑천이 있은들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내 피 속에 뛰노는 사랑의 DNA
그러니 우리 모두는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 사랑은, 내가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자각에서부터 싹이 틉니다. 자신이 큰 사랑의 빛 속에서 살고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나 같은 것이 감히…”라고 자기를 비하시키지 않습니다. “이 못난 죄인”이라는 말로 겸손을 가장하지도 않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어느 큰 사랑이 있어 나를 잉태시켰는데, 큰 사랑의 닮은꼴로 태어난 이가 “이 못난 죄인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칭얼대기만 한다면, 어버이 되는 큰 사랑의 마음이 어떻겠습니까? 그런 말은 곧 “나를 왜 이 모양으로 낳았느냐?”는 불평불만이나 항의로 들리지는 않을까요? 장차 의연하게 백성들을 다스려야 할 왕자와 공주가 자립심을 키울 생각은커녕 이것도 달라, 저것도 달라, 손을 내미는 데만 익숙하다면, 왕은 실로 어이가 없을 것입니다. 한 톨의 씨앗 속에 크고 무성하게 자랄 나무가 들어 있는 것처럼, 우리 안에 이미 온갖 자질을 다 심어 놓았는데도 그걸 알아보고 키울 생각은 하지 않고 하늘을 올려다보며 보채기만 한다면, 왕의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어서 “차라리 거지가 되라”고 내쫓지나 않을까 은근히 걱정이 될 지경입니다.
왕자와 공주가 왕자와 공주다워지려면, 먼저 자신의 핏줄을 알아볼 수 있어야 하겠지요. 자신의 피 안에서 뛰노는 큰 사랑의 DNA를 알아볼 수 있어야 의연하고 당당하게 일어설 수 있지 않을까요? 누가 뭐래도 왕의 품성을 이어받았다는 것을 자각하면, 그는 굳이 자신의 신분을 주장하려고 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세상에서 자신이 진짜라고 떠드는 것은 대개가 가짜들이지요. 진짜는, 명품은, 말이 없습니다. 자신 안에 있는 사랑의 빛을 보고 자신의 명품됨에 감격한 왕자와 공주는, 누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그 빛을 나누는 데에 열중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그 큰 사랑의 빛을 내 안에서 느끼고 체험할 수 있을까요? 빛의 통로를 가로막아 온 장애물들을 치우는 것뿐입니다. 할 일은 그것이 전부입니다.
* 글쓴이 : 스카이벤처 칼럼리스트 유영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