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에 ‘설마’없다, 몸의 신호 잘 들어라
만성피로는 ‘만성 자살’…‘과학적 휴식’으로 과로사 대비
이시형_사회정신건강연구소 소장
건강 측면에서 볼 때 사람의 일생에는 네 번의 고비가 있다. 영유아기의 발달 이상, 청소년기의 사고, 40대의 3C, 그리고 노년의 노인병이다, 그 중에서 특히 40대는 암(cancer)·심장(cardio)·당뇨(carbohydrate)의 3C 고비를 잘 넘겨야 한다. 일단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기면 50대 이후 노년기는 큰 위험 없이 지낼 수 있다. 건강에 각별히 신경 쓴다면 남녀 모두 90세 장수도 보장받을 수 있다.
문제는 40대다. 연령상으로 봐도 여기가 건강상 가장 취약한 나이다. 그런데도 한국인들은 40대까지는 스스로를 불노신(不老身)·불사신(不死身)으로 알고 산다.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는 확실한 망상을 갖고 있다. 건강에 대한 개념조차 없는, 참으로 가당찮은 자만에 빠져 있다. 이게 사태를 악화시킨다. ‘웬 감기’라며 큰소리치던 대기업의 중견 간부가 어느 날 응급실로 실려오는 것은 이러한 자만이 부른 비극이다.
3C는 잘못된 습관이 원인인 대표적 생활습관질환이다. 체질적 요인도 물론 있지만, 그보다는 잘못된 생활습관으로 그간 신체가 속으로 앓아 왔는데도 본인은 모르고 지내온 것이다. 실제로 고혈압 환자 10명 중 8명은 자신이 그런 무서운 병을 앓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고 지낸다니!
암을 비롯해 소위 생활습관병이 무서운 것은 증상도 없고 아프지도 않다는 데 있다. 병은 깊어 가는데도 정작 본인은 모르고 지낸다. 그러다 40대가 되면 이놈들이 ‘본색’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40대가 되면 저항력·면역력·자연치유력 등이 급격히 떨어지기 때문이다. 그간 쌓여 온 문제를 더 이상 감당할 수 없게 된다. 40대가 ‘마의 고비’인 것은 그래서다. 이 고비를 무사히 넘긴다면 체질적으로 강하거나 비교적 건강한 생활을 잘 유지해 온 덕분이다. 그도 아니면 운이 좋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남자일까? 그것도 왜 한국 남자일까? ‘한국’ ‘남자’ ‘40대’가 세상에서 가장 취약하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이야기다. 불행히 이 나이의 한국 남성은 세계에서도 사망률이 제일 높다. 같은 한국의 40대 여성에 비해서도 3배나 높다. 소름 끼치는 일이다. 한국의 40대가 어쩌다 이처럼 안타까운 신세가 됐을까?
물론 격심한 스트레스를 빼놓을 수 없다. 하지만 세계 어디를 가도 40대의 운명은 똑같다. 이들은 나라의 허리요, 가정의 기둥이다. 이들이 흔들리면 나라가 흔들린다. 모든 책임이 이들의 어깨에 얹혀 있다. 가정도, 회사도, 나라도 온통 이들에게 의존한다.
무한경쟁, 약육강식의 냉엄한 시장 속에서 살아남아야 한다. 쉴 틈도 없다. 밤낮이 따로 없다. 온 세계를 누비고 다녀야 한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지구촌 40대의 모습이다. 잘 사는 나라, 못사는 나라의 구분이 없다.
그렇다면 왜 하필 한국 남자일까? 우선 같은 스트레스라도 질이 다르다. 공정한 경쟁이라면 그 자체가 병을 만들지는 않는다. 이제는 우리도 많이 좋아졌지만 아직 구린 데가 많다. 조마조마하다. 세무감사 소식에 가슴이 철렁하는 간부라면 심장병은 떼어논 당상이다.
소화가 될 리도 없다. 교감신경이 흥분하면 뇌에서는 공격성 호르몬이 분비돼 모든 신체 기관을 긴장시킨다. 잠을 제대로 이룰 수 없다. 뇌압·혈압 어느 것 하나 정상일 수 없다.
이런 막중한 스트레스를 한국의 40대들은 술과 담배로 푼다. 이게 또 병을 부채질한다. 당장이야 시원하겠지만, 그 말로는? 긴 설명이 필요 없다. 이 부분에서 우리는 단연 세계 정상이다. 술은 그 자체만이 아니다. 밀폐된 지하실의 공기 오염은 상상을 초월한다. 술이 아니라 득실거리는 세균을 들이마신다. 거기에 영양 균형 제로인 안주, 만취 이후의 광란…. 거기서 끝나는 것도 아니다. 2차, 3차로 이어져 마지막은 집 앞 포장마차까지 가야 직성이 풀린다. 누가 하나 ‘죽어야’ 끝난다.
새벽 1시, 2시까지 이렇게 술을 마시다 이튿날 아침도 거른 채 눈을 비비며 출근한다. 그러고도 근무가 제대로 된다면 기적이다. 그러고도 건강하다면 그것은 더 기적이다.
얼마 전 건강보험관리공단의 발표는 예상보다 큰 충격이었다. 지난해 건강검진을 받은 550만 명 가운데 성한 사람은 겨우 3분의 1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나머지는 ‘반 건강, 반 질병’의 경계선에 있는 것으로 판명났다고 한다. 특히 당장 예방 조치를 취하거나 생활습관을 바꾸지 않으면 바로 질병 단계로 진전될 사실상의 환자가 무려 190만 명이나 된다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건강에는 ‘설마’가 없다. ‘설마 내가!’ 하는 미련을 부려서는 안 된다. 한국인의 이 가당찮은 낙천성이 병을 키운다. 그렇다면 어떻게 건강을 지킬 것인가? 무엇보다 ‘과학적 휴식’을 취해야 한다. ‘광란의 장’만이 스트레스 해소는 아니다. 조용히 숲 속 오솔길을 걷는 것도 좋은 휴식이다. 특히 스트레스가 주요인인 ‘놀 아드레날린’ 과잉 상태인 사람에게는 동적(動的) 휴식보다 사색과 명상, 산책 등 정적(靜的) 휴식이 훨씬 효과적이다.
지치기 전에 쉬는 지혜도 필요하다. 만성피로만큼 악성 질환도 없기 때문이다. 온몸을 좀먹는 만성피로가 지속되면 신체 어느 장기도 성할 수 없다. 세포 하나하나에까지 피로가 쌓이면, 이건 바로 생명 자체를 위협하는 ‘만성 자살’이다.3일에 한 번은 금주(禁酒)하고 쉬어야 한다. 부신피질은 72시간을 한 주기로 충분한 휴식을 필요로 하는 중요한 기관이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3일은 버틸 수 있는 것은, 스트레스를 이겨낼 수 있는 부신피질 호르몬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밤중까지 폭음하고 불면에 시달려도 3일 정도는 견딜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가 한계다. 그 이상 미련을 부리면 자칫 큰 사고를 당할 수 있다. 과로사(過勞死)는 부신 피질 기능의 한계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끝으로 주말, 너무 욕심내서 스케줄을 만들지 말자. 금요일 오후부터 고속도로는 몸살을 앓는다. 교통체증보다 더 큰 스트레스도 없다. 욕심을 내서 그 체증 속에 멀리 가다가는 오히려 피로가 쌓인다. 노동인지 레저인지 구별이 안 되는 억지 나들이가 많다.
무슨 일이든 절제가 아쉽다. 무리는 만병의 근원이다. 그리고 자기 몸이 보내는 신호를 잘 들어야 한다. 신호를 놓치면 나중에는 몸이 억지로라도 듣게 만든다. 그런 일을 없애는 것이 건강 지키기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월간중앙 2005년 0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