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지 뒷면을 읽는법(상)
행복한인생의소설 2004/08/27 14:31   http://blog.azoomma.com/heeks/154904
   
작가 : 김연
 

3 편 - 봉지뒷면을 읽는 법.(상)

쾅!!

소리도 요란하게 현관문은 닫히고 드디어 평화가 찾아온것이다.

몇시간인지 모르는 내가 처음 겪은 모습의 지옥이었다.

빽빽 울어대는 아기는 더이상 딸도 무엇도 아닌

나를 괴롭히려고 어디선가 뚝 떨어진 작은 악마였다.

 

겨우 한숨을 내쉬고 집안을 한바퀴 둘러보았다.

 

종이기저귀는 쓴건지 안쓴건지 모두 있는대로 끄집어내진채로  거실바닥을 나뒹굴고

어제밤 내가 마신 소주병은 빈병이 굴러굴러 구석에 가있고

채 다 마시지도 못한  소주가 흘러나와 바닥에서 아직 냄새를 풍기고 있으며

이불이 둘둘 말려져서 던져져 있고 베개와 재떨이에 수북한 담배꽁초들...

 

깔끔떨고 사는 사람은 아니지만 정말 눈뜨고 봐줄 만한 광경이 아니다 싶다.

저걸 치울까 말까..

 

대충 이불을 방으로 넣고 소주병을 다용도실로 치워버리고

종이기저귀는 쓴건지 안쓴건지 일일히 다 확인해보기 싫으니

그냥 한데 모아서 큰 비닐 봉투에 넣어버리기로 한다.

 

그나마도 하려니 허리를 굽혔다 폈다를 몇번씩해야 하고

콧구멍만 해서 주방이라 해야 옳을지 그래도 명색이 거실이라 불러야 옳은건지 모를 공간을

마치 뭐 마려운 개 모양으로 왔다갔다 수십번을 한 끝에 겨우 나 앉을 만한 빈자리가 생겼다.

 

아이구...

정오가 넘어가도록 빈속인데다가 어제 과음한 탓으로 속이 갈퀴로 할퀴는 것같다.

 

이럴땐 쟁이가 해주는 해장라면을 좀 먹으면 낫겠구만...

 

쟁이?

쟁이란 내가 아내를 애칭으로 부르는 마누라쟁이의 준말이다.

 

마누라쟁이는 결코 좋아하지 않았지만

얼마나 어여쁘고 귀여운 우리말인가 말이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쟁이 그 여자를 도통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더이상 더 뭘 어쩌란건지,

내가 돈을 안벌어다 주나, 다른 남자 다 피우는 바람을 피우나,

그렇다구 집안을 홀라당 말아먹을 노름을 하기를 하나,

한대라도 때리길 했나,..

 

나로 말할것 같으면 대한민국의 가장 표본적인 가정적 남편아닌가 말이다.

 

직장 열심히 다녀서 월급은 몽땅 통장으로 들어가지,

가끔 회식이나 친구들 술자리 외에는 늘 칼 퇴근해서 집으로 가지.

일요일엔 잠도 못자게 조르는 통에 괴롭지만 마트에도 따라가지 않느냐 말이지.

 

그만큼 하면 된거지, 또 뭘 하라구.

이 여자가 간이 배 밖으로 나온거지..

그렇지 않구서야 말도 없이 애도 내버려 두고 나가서 소식도 없어?

허허 참.. 세상 말세야.

여자들이 세다 세다 하지만 이렇게 까지 기어오르면 안되는거아냐?

 

생각해보니 열받아서 다시 담배를 문다.

한모금 깊게 빨아들이지만 이내 불을 꺼버린다.

속이 더 쓰린것 같다.

 

뭐든 먹어야 겠다.

속이 비고 게다가 쓰리기까지 하니 머리도 돌아가지 않는다.

 

해장라면을 나두 한번 끓여보지뭐.. 까짓거 뭐가 어려워.

쟁이가 해주던거 생각해보고 고거만 다 넣음 되는거 아니겠어?

 

일단 냄비에 물을 올리고..아..그런데 물은 얼마나 부어야 하는거지?

라면 뒷봉지에 끓이는 법이 나와있던

옛날 생각이 나서 ..하하 정말 옛날이구나..벌써 5년도 더 된 일이니까..

봉지 뒷면을 살펴본다.

물..큰컵으로 3컵이라....

큰컵은 뭐가 큰컵이란 말인가..어쭈리 550CC?

그러니까 맥주 500 보다 조금 더 넣으면 된다는거지..

 

물을 붓고 끓으면 면넣구 스프넣구 그리고 다른 야채를 한꺼번에 넣으면 되겠지.

쉽구만..

 

냉장고를 열어보니 콩나물과 양파,파 따위의 야채들과 반찬통에는 김치가 반쯤 남아있다.

 

뭐 이래..

이 여자가 살림을 어떻게 하길래 반찬이 김치뿐이야.

저번 달에 엄마가 밑반찬 해준건 다 어쩐거야.   진짜..짜증나네..

 

냄비 뚜껑이 들썩들썩하며 물이 끓고 있음을 알려준다.

일단 뚜껑을 열고 면을 넣고 콩나물, 파도 조금 썰어 넣고 김치도 넣고

그리고 좀 호사를 부려 계란도 하나 퐁당 깨뜨려 넣는다.

 

음...

냄새는 죽이는데..

 

상에 김치와 라면이 끓는 냄비, 달랑 두개를 놓고서 티비앞으로 가져온다.

일요일이라 일찍부터 오락프로그램을 하는구나..

라면 먹으면서 낄낄 웃으니 세상에 부러울게 없구나..

 

후~~~후~~

잘 불어서 입으로 면발을 가져간다.

욱!

뭐가 이렇지?

왠 비린내야?  비린거라곤 계란하나 넣었을 뿐인데..

맨날 넣어서 먹는 계란이 왜 오늘따라 비린거지?

쩝~ 국물맛은 뭐가 또 이래?

비위상하게 왜 이리 비린거야.

에이씨...

못먹겠네.

 

짜증이 순간 머리꼭대기까지 치솟는다.

음식 냄새를 맡은 위는 벌써 요동을 치기 시작했는데,

참고 먹을만하지가 않은게 문제다.

 

어떻게라도 끼니를 때워야지.

굶고서 뭘 할수도 없으니..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