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운여름에 만화책보는것도 좋은데요
멋진글들소개-스크랩 2004/07/28 15:56   http://blog.azoomma.com/heeks/146586

[별빛속에]

지은이 : 강경옥
출판사 : 서울문화사 (1996)
권수 : 전10권

"부탁입니다…더 이상 아파하지 말아주세요. 아니면 여기까지 온 이유가 없습니다…사…랑 하고…있습니다…나의 시이라젠느……"


얼마나 많은 여학생들이 레디온의 죽음을 보며 눈물을 흘렸을까. 사경을 헤매는 와중에도 시이라젠느에게로 향하는 레디온의 마음과, 그의 시신을 텔레포트시키고 일어나 눈물 흘리며 걸어가는 시이라젠느의 뒷모습에서 감동 받지 않은 사람이 그 누가 있을까. 출판사를 옮겨가면서 계속 재판될 정도로 그 진가를 인정받은 작품 [별빛속에].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가슴에 담고 있지만 그저 서로의 모습을 눈으로만 좇는 시이라젠느와 레디온, 바라보는 이가 다르지만 결코 자신의 마음을 접지 못하는 아르만, 상처받은 자존심을 왕녀의 기품으로 감싸고 굳건히 버티는 아시알르. 'SF 러브 판타지(에이스 문화사, 르네상스 코믹스)'·'SF 판타지의 영원한 명작(서울문화사, 윙크 스페셜)'과 같은 단행본의 수식어구에서도 알 수 있듯, [별빛속에]는 가상의 행성 카피온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사건과 인물들의 사랑을 다룬 SF 순정물이다. 그러나 단순히 애절한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만으로 이 작품의 가치가 결정되어지는 것일까? 물론 레디온이 마지막으로 시이라젠느에게 마음을 고백하는 장면에서 눈물 안 흘린 사람이 드물기는 하겠지만, [별빛속에]="사랑 이야기"라는 등식을 성립시키기에는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계급간의 갈등과 모순, 삶과 죽음, 선택된 자와 그렇지 않은 자…. 이런 다양한 요소 외에 [별빛속에]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어찌 보면 모든 것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 있다. 바로 "신(神)"의 존재이다.


카피온의 여왕이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치러야 할 통과의례가 있다. 바로 '성역(聖域)'에서 신의 메시지를 듣고 살아 돌아와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여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인 동시에 여왕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나 작품 내내 '신'의 모습은 보이지 않을 뿐더러 그의 직접적인 메시지도 나오지 않는다. 오직 성역에 들어간 시이라젠느의 입을 통해서만 신의 존재를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신'은 미래를 말해주지 않는다. 단지 암시만 할 뿐, 그것을 '계시'로 받아들이고 합당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인간의 영역이며, 그 매개자가 바로 '여왕'이라는 존재이다. 시이라젠느의 표현대로 여왕은 '신의 비밀을 한가지 정도 공유할 수 있는 위치'이며, '한정된 비밀을 공유함으로써 신과 인간의 중간 위치인 여왕이란 존재가 생긴 것이고 그 의미를 부여한 내가 좋아하는 몇 안되는 금발 캐릭터인 아르만

것은 신'이다. 그러나 [별빛속에]는 '여왕'이란 존재만을 한정짓지 않고 '인간 전체가 여왕이 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 제시하고 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 절대자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보잘 것 없는 존재. 인간이 신이 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신의 뜻을 짐작이라도 하고 싶어하는 열망. 신의 뜻과 인간의 뜻. 신과 인간과의 관계와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시이라젠느는 사만호를 이끌고 블랙홀로 사라진다. 그것이 신이 정해놓은 그녀의 운명, 혹은 그녀가 스스로 의도한 그녀의 뜻.

"이제 지금 이 시간부터 여왕으로서의 나의 생이 시작되었습니다. 아주 짧은…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 이것은 메시지입니다. 이것은 신의 메시지일 수도 있고, 혹은 나의 메시지일 수도 있습니다. (중략) 하지만 아직 신은 당신들에게 기회를 준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당신들은 자신들의 미래를 이어 나가야 할 행성을 찾아야 합니다. 당신들을 위한 별…그것이 나안 행성이든 혹은 지구이든…. 내가 이것과 함께 블랙홀로 들어가면 다시 나올 수 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만약 돌아오게 된다면 그것은 신의 뜻. 설사 돌아오지 않는다 해도 그것 역시 신의 뜻. 혹은…나의 뜻."


시이라젠느가 100년 전의 유전인자를 가지고 태어나 지구에까지 도망 오게 된 것도, 카피온의 여왕이 될 시이라젠느에게 카피온을 대신할 '지구'를 생각하게 하려는 신의 의도였을까? 시이라젠느는 성역에서 지구로 갈 수 있는 통로까지 발견하지만 그녀는 유신혜로서의 기억 역시 가지고 있었기에 선뜻 카피온인들에게 그것을 알려주지 못한다. 서로 다른 종족간의 대립과 충돌, 그로 인한 파멸. 시이라젠느는 성역에서 지구로의 통로뿐만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지도 모르는 파멸까지 보게 되고, 지구와 카피온 둘 다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한다고 결론 내린다. 신은 만약의 결과를 보여주었을 뿐, 판단은 시이라젠느가 내린 것이다.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시이라젠느'라는 이름을 가진 '인간'이 판단하고 행동한 것이다. 단지 여왕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관습으로, 불문율로 성역에 들어갈 수 있는 인간을 여왕으로 정해놓은 것뿐. 결국 모든 인간이 여왕이 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통치를 위한 여왕이 아니라 신의 뜻을 미루어 생각하고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판단하는 그런 존재로 말이다. 혼 시이라젠느가 그랬듯이. 어쩌면 신도 그것을 바란 게 아니었을까.

조악한 메카닉과 깡통 우주선은 잠시 접어두자. ;;;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작품의 질을 어느 정도 손상시킨다는 것도 인정한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별빛속에]는 신과 인간, 인간과 인간에 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굳이 신의 뜻을 빌리지 않더라도, [별빛속에]의 인물들은 충분히 주체적이고 자신만의 굳은 신념을 가지고 있다. 비록 배신당하고 상처 입기는 했지만 아시알르는 여왕이라는 자리에 대한 확고한 인식을 가지고 있고, 목숨을 걸어야 할지도 모르는 마지막 상황에 이르러서도 왕녀로서의 의무와 책임을 잊지 않는다.


"명목을 지키기 위해 카피온에 머물러야 할 여왕은 나는 원하지 않습니다. 군주란 것이 무엇입니까. 나는…아니 우리는 이 권한을 신에게 부여받았을 뿐 나의 것이 아닙니다."
(멋지다 아시알르!!! 나는 이 장면 때문에 시이라젠느보다 아시알르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

 

오만하지만 솔직한 아르만 역시 [별빛속에]를 더욱 빛나게 하는 주연급 조연 중 한 명이다. 레디온이 시이라젠느를 생각하는 마음, 시이라젠느가 레디온을 사랑하는 마음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고, 시이라젠느와 자신이 이복남매간이라는 것까지 알게 되었어도 그는 시이라젠느를 계속 사랑하며, 블랙홀로 가려는 시이라젠느 앞에서 살아 돌아와 달라고 눈물 흘린다(레디온의 죽음 못지 않게 참으로 가슴아픈 장면이었다). 처음엔 좀 당돌하기도 하고 제멋대로인 성격같이 보여도 혼 아르만, 그만이 가질 수 있는 기품과 사랑하는 방법, 상처 등은 레디온의 그것과는 또 다르게 매력적이면서 가슴아픈 것들이다.

 

그러나 [별빛속에]가 어떤 작품인가. 필자가 남자 조연들(이를테면 야훌라이, 앙드레, 주드, 오티스 네이트…)보다 남자 주인공을 더 열렬히 사모하는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가 아니던가!!!(조연에 대한 나의 사랑은 나중에 자세히 언급하겠다) 헤인 레디온, 수많은 여인네들의 심금을 울린 그 이름!!! 계급을 넘어서도 끝까지 사랑하는 이의 곁에 남아 있겠다는 그 결심은 결국 죽음으로 이루어졌다(이것은 레디온의 입장에서이다). 레디온의 절제된 말과 행동은 둘의 사랑을 더욱 애틋하게 만드는 요소이기도 하다. 레디온은 가장 평면적인, 전형적인 캐릭터라고도 할 수 있겠지만 [별빛속에]에서는 변함없는 그의 태도가 오히려 빛을 발하고 있다.

 

계급간의 갈등, 카피온과 카라디온의 갈등, 여왕이라는 자리를 놓고 벌이는 권력의 암투. 이 모든 다툼과 갈등은 사만호의 폭발 위기 앞에서 아무 것도 아니게 된다. 그들의 갈등이 빚어낸 무시무시한 결과 앞에서, 시이라젠느는 사랑과 화합이라는 아주 단순한(그러나 가장 어려운) 코드로 모든 것을 해결하고 블랙홀로, 그리고 지구로 향하게 된다. 계속해서 시이라젠느와 대립하던 아시알르는 여왕으로서, 그리고 자신의 혈육으로서 시이라젠느를 인정하고, 시이라젠느는 그런 아시알르에게 자신이 깨달은 "여왕"의 의미를 말해주면서 98대 여왕으로 지목하고 미소짓는다. 모두 사랑한다는 시이라젠느의 마지막 전언은 [별빛속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바로 그것이다. '인간 최대의 약점 또는 최대의 강점. 몇 년, 몇 백년, 몇 천년이 흘러도 단지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 하나 만은 절대로 잊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별빛속에]가 가진 미덕이며, 십 년이 넘도록 명작으로 칭송 받는 이유이다

자료출처 : http://mishaa.org/old/star.ht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