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을 생각하면, 어린 시절의 풍경이 떠오른다. 아홉 살 겨울에 우리집에 쌀이 떨어졌다. 진짜로 쌀독에 쌀이 하나도 없어서 빈 독을 열어보면 서늘한 기운이 확 얼굴로 끼쳐왔다. 그것은 정말이다. 쌀이 그득한 쌀독에서는 훈김이 돈다. 그것은 말하자면 절망과 희망의 기운이다. 쌀독은 보통 독보다 크고 허리 부분이 부풀어 있고 울퉁불퉁하고 매끄럽지 않고 검은빛이 났다. 우리는 그것을 '쌀독아지'라고 불렀다.
우리집은 논이 없었다. 논이 없는 집의 가장인 우리 아버지는 논을 마련할 돈을 구하려 제 살던 곳을 떠나 대처를 떠돌았다. 안정적으로 밥을 제공해줄 수 있는 논, 가족의 목숨줄을 마련하기 위해 내 아버지는 그렇게 천지사방을 떠돌고 남은 가족들은 산밭을 일구어 '밭벼'를 심었다. 일명 '산두쌀'이다. 쌀밥을 먹고 싶은데 논은 없고 그리하여 밭에라도 쌀을 심는 산골사람들. 산두쌀은 논 없는 농촌사람들의 쌀을 구하기 위한 일종의 고육지책이다. 몸부림이다. 모르는 사람들은 쌀은 모두 논에서만 나는 줄로 알겠지만, 쌀은 때로 그렇게 밭에서도 난다.
산두쌀을 거두어들이는 산비탈 밭에서 내려다보이는 저 아래 들판, 그 황금들녘에서 우마차에 나락더미를 실어나르는 사람들을 나는 그 얼마나 부러워했던가. 그러면서 얼마나 외로워했던가. 논이 많은 집 아이들은 나처럼 외롭지 않았다. 그 아이들은 일꾼들이 우꾼우꾼하는 들판을 뛰어다니며 메뚜기를 잡았다. 나락더미 위에서 몸을 굴려 놀아도 되었다. 논이 많은 집 아이들은 어린시절을 '놀이'로만 채워도 좋았다. 그러나 논이 없는 집 아이들은 '일'뿐이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일이 아니라 노동이었다. 밥은 늘 공포였다. 아니다. 밥이 공포가 아니라 밥때가 공포였다. 가난이 공포가 아니라 배고픔이 공포였다. 그런데도 지금에 와서는 그 시절이 하나도 불행하지 않았다고 여겨지는 것은 왜일까. 나는 지금도 말할 수 있다. 그때 나, 배는 고팠지만 가난하지 않았다고. 배는 고프지 않지만 가난한 지금에 비한다면.
각설하고, 하여간 산두쌀을 어머니하고 '외롭게' 베어다가 머리에 이어 날라서는 홀태에다 훑었다. 적막한 가을 한낮, 어머니와 홀태에다 산두쌀을 훑던 날, 내가 먹은 것은 땡감 소금물에 담가 떫은 맛 우려낸 감 몇 알. 그래도 쌀이 곧 생긴다는 생각에 산두쌀 훑는 날은 배고프지 않았다. 쌀독아지에 쌀 그득할 것만 생각해도 배가 불렀다.
산두쌀은 봄이 오기 전 동이 나기 십상이었다. 왜 아니겠는가. 뱉에다는 산두쌀뿐 아니라, 콩도 심어 먹어야 하고 고구마도 심어 먹어야 하고 무, 배추도 심어 먹어야 하는데. 그것들의 한귀퉁이에 심은 산두쌀은 그 콩, 그 고구마, 그 무로 밥을 지을 때 아, 이것이 밥이로구나, 여겨지게끔 한주먹씩만 넣어 먹었는데도 그렇게 쉽게 떨어졌다. 고구마는 아직도 '겁나게' 남아 있는데, 아깝고 아까운 산두쌀은 진짜로 새모이만큼씩만 넣어 먹었는데도 언제 없어졌는지 모르게, 꼭 누가 훔쳐간 모냥으로 없어져 버렸다. 아, 그 서러움이라니.
정월 보름 지나 2월 어느 날, 맘씨 좋은 '봉동 할머니' 댁에서 쌀을 가지러 오라 하였다. 어머니와 호야를 켜들고 양은물동이 이고 갔다. 봉동 할머니 댁은 대나무밭 응달에 있었다. 그날사 눈이 왔다. 눈 내리는 어둔 밤길을 양은물동이에 쌀을 담아 이고 오다가 그만 응달에서 미끄러졌다. 어둠 속에서 어느 게 쌀이고 어느 게 눈인지, 손이 곱아서 움직거려지지도 않는데 퍼담고 퍼담았다. 땅이 풀릴 무렵, 그러니까, 그날은 아침부터 밤까지 고구마만 먹었던 날, 나는 그때까지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내가 쌀을 엎었던 곳에 가서 흙을 파보았다. 쌀은 흔적도 없었다. 참새가 와서 다 주워 먹은 것이리라.
홑바람으로 나와서 씩씩거리며 흙을 파내고 있는 나를 솜바지 입은 '논 많은 집 아이'가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었다. 그 아이가 뭐하느냐고 물었다. 나는 얼굴이 벌개져서 파낸 흙을 다지기라도 하듯이 콩콩 뜀뛰기를 했다. 그 아이도 나를 따라했다. 그 아이는 그날을 기억할까. 왜 내가 그날, 파낸 흙 위에서 뜀뛰기를 했는지를 짐작이나 할까.

내가 열 살 때, 선생님이 일기검사를 하다가 나를 불렀다. 야, 공선옥 너는 어떻게 된 게 맨날 먹는 예기뿐이냐, 인마. 아침 먹고 점심 먹고 저녁 먹고라면 내가 이해를 한다. 저 하늘에 날아가는 새가 통통허니, 허벌나게 맛이 있겄구나, 저 새를 잡아다가 털을 뽑아서 꾸워먹으면 얼마나 꼬수까. 아이들이 웃었다. 선생님은 웃지 않았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짐승 함부로 먹는 아이들을 색출해내기 시작했다.
"개구리 꾸어묵는 놈 손들어."
아무도 손을 들지 않았다.
"개구리 꾸어묵는 놈을 본 놈은 손들어."
조재선이가 손을 들었다.
"이오복입니다."
"이오복 일어나."
"선생님, 조재선이는 비암 꾸어묵었는디요."
우리가 "꾸어" 먹고 깊어하고, 또 먹었던 게 어찌 새니, 개구리니, 뱀뿐이었겠는가. 머스매들은 수렵족이요, 가시내들은 채취족, 이름하여 수렵채취로 어린 목숨들을 연명하고 있었던 것을.
그러나, 선생님은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천상 교육자였으므로 교육자적인 태도로, 교육적인 말씀을 아니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마물이라도 함부로 해치면 안 되는 것이다. 창공을 날아가는 새를 보면 너희들도 이담에 커서 새처럼 이 넓은 세계를 향해 나는 꿈을 키워야지, 잡아먹을 생각이나 하다니, 그래 가지고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느냐. 그리고 다시 한번 말하지만, 아무리 미물이라도 함부로 밟고 죽이는 짓을 하는 사람이 이 다음에 커서 무슨 짓을 하겠니. 개구리 보면 밟아 죽이고 그걸 작대기에 꿰어들고 가는 놈들을 보면 나는 교육자로서 아주 실망이 크다. 그런 사나운 마음을 가지고 앞으로 어른이 되면 무슨 짓을 하는 사람이 될지 걱정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운운.
그렇게 말씀하셨던 선생님은 그래도 내가 가르침을 받았던 선생님들중에 가장 좋은 선생님으로 기억되는 분이다. 더러는 교육자적인 훈계로서 끝내지 않고 아이들이 '수렵'하고 '체취'한 것들을 압수해가는 선생님도 계셨던 까닭이다. 압수해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바로 그 분들이...... .
어쨌든, 내가 제일 좋다고 여겼던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나는 '순한 마음'을 가지고 착하게 살고 싶었다. 그러나 현실이 그렇게 살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그때 나를 포함하여 개구리 잡아먹고 뱀 잡아먹고, 나는 새보고 잡아먹고 싶어했던 아이들은 마음이 사나웠던 게 아니라, 배가 '사납게' 고팠던 것이다. 기억나진 않지만 그날 밤에 나는 아마 이런 일기를 쓰지 않았을까. 여전히 고구마밥, 혹은 무밥 먹고 허전한 배를 방바닥에 깔고서.
'나는 앞으로 저 하늘에 날아가는 새를 잡아먹을 생각을 절대로 하지 않는 착한 어린이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개구리 잡아먹었던 이오복이는 그날 밤 집에 가서 나처럼 착한 사람 되겠다는 일기를 쓰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 후로도 나는 이오복이가 개구리 잡아먹는 모습을 수도 없이 보았기 때문이다.

내가 열두 살 나던 해 중복 무렵, 어머니가 농약을 잘못 쳐 나락이 다 꼬실라졌다. '묵갈림'이라고 일종의 소작인데 농사를 지으면 논주인과 일정한 비율로 나누기로 약속하고 모를 심은 논에 어머니가 그만 멸구약인 줄 알고 강력 제초제인 '그라목손'을 쳐버린 것이다. 10리 신작로 길을 타박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오고 있는데, 자전거를 타고 먼저 집으로 갔던 동네 아이가 전속력으로 자전거를 몰고 나한테 와서는 "야, 선옥이 느그 엄마 논에서 실성해부렀어야." 딱 그 한마디를 내뱉고는 다시 자전거를 몰고 가버렸다. 그 아이가 나를 놀려먹으려고 그런 줄 알고 할래할래 걸어가다가 나는 그 처참한 광경을 보고 말았다. 다른 논들은 이제 한창 물이 오른 벼들이 짙푸르게 넘실거리는데 우리 논만 누렇게 떠 있고 어머니가 논두렁에 주저앉아 통곡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광경을 보는 순간 논만 노란 게 아니라 하늘조차 노랬다. 아버지가 서울로 돈을 벌러 갔기 때문에 딸만 셋인 우리집에서는 어머니와 우리 세 딸이 농사를 지을 수밖에 업었다. 그래서 다른 집들은 남자들이 농약을 치는데 우리집은 어머니가 칠 수밖에 없었고 글자를 잘 모르는 우리 어머니는 그만 ...... .
그해는 유난히 가뭄이 심했다. 논 옆 냇가에도 물이 말라 있었다. 그래도 어머니와 나는 말라붙은 내를 파고 또 파서 물이 고이면 그 물을 누렇게 떠버린 논에다 퍼부었다. 손바닥 껍질이 갈라지고 피가 나도록 파고 또 팠다. 흙탕물이 숫제 핏물이었다. 아, 밥 한술 얻기가 그다지도 힘들다는 것을 나는 그해 그라목손 쳐서 꼬실라진 논에 물을 퍼부으며 확실하게 알았다.
그해 가을, 고실라졌어도 군데군데 우리가 물 퍼부은 자리의 벼들은 살아나서 못나나마 열매를 맺어주었다. 그때 어머니가 그랬다.
"저것이 나락이 아니라 우리 딸 피다."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라는 나무라 했던가. 거기에 빗대어, 밥은 때로 피를 바치고서야 내게로 오는가. 어디 피뿐이겠는가. 이 당의 쌀, 이 땅의 밥을 지키기 위하여 지난 추석날 이국에서 목숨을 바친 농민 이경해씨가 아니더라도 지금 이 순간에도 숱한 사람들이 목숨 내놓고 목숨을 사수하고 있는 현실인데.
'아사투쟁'이라고 요즘 말로 하면 단식투쟁인데, 아사투쟁으로 아사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 모두가 실은 밥을, 정당한 밥을, 당당한 밥을, 정직한 밥을 위하여 모든 정당하지 않은 밥, 당당하지 않은 밥, 거짓된 밥과의 투쟁을 벌였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리하여 역사는 '밥을 향한 투쟁'의 역사에 다름 아니다.
내가 아는 선배 문인의 전언에 의하면 그 부친께서는 북족에서 일컫기를 혁명열사요, 남쪽에서 일컫기를 적색분자였던 바, 좌우대립의 시기 남쪽군에 의해 죽음을 당하셨는데 낮에는 남쪽, 밤에는 북쪽 세상이던 그 어느 어지러운 세월의 한때, 어디선가 쌀이 보내져 왔더란다. 그 조부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입에 들어가는 밥 한숟갈이 인민의 피 한사발이라고 하여 그 꿈에 보기도 힘들 쌀을 의연히 돌려보내셨다 했다. 그렇게 쌀을 돌려보내놓고 배고파 우는 어린 손자 울음을 달래느라고 선배 문인의 조부께서는 손자를 무릎에 앉히시고 가부좌의 오연한 자세로 사서삼경을, 대학을, 중용을, 아침부터 밤까지, 날이 새고 밤이 지도록 '독경'하시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나의 선배 문인께서는 지금도 밥을 허투루 대할 수가 없다 하였다. 기독교식이 아니라, 한그릇의 밥을 앞에 두고서 독경 내지는 염불 내지는 묵념 한자락 바치는 마음이 절로 생긴다는 거였다. 내 입에 들어가는 이 밥 한숟갈이 인민의 피 한사발이니...... .

나는 요즘도 이따금 우리집이 논을 사는 꿈을 꾼다. 우리 고향 인근에서 제일 기름진 '살푸쟁이' 논, 그 알짜배기 논이 우리 논이 되는 꿈. 그 논에서 아버지 어머니가 농사짓는 행복한 꿈. 우리 논이 된 살푸쟁이 논에서 누런 나락이 파도처럼 넘실대는 꿈을 꾸고 난 아침이면 왜 그리도 가슴이 쓰라려 오는지. 하여, 나는 아직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논을 가지는 것이다. 우리 아버지 평생을 그 논 한 마지기 마련하기 위해 천지사방 헤매다가 결국 그 논 한 마지기 내것으로 하지 못하고 세상 떠나신 것이 아버지의 자식인 내 한이 되고 원이 되었다. 그 논에 모를 내고 거름을 주고 나락을 베어 이윽고 쌀을 만들어 내가 지은 쌀 내 자식 입에 들어가게 하는 것, 내 아버지 대에서 보지 못한 그 '좋은 꼴'을 내 대에서라도 보고 싶은 내 열망은 그러나 아직까지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으니, 나는 지금도 내가 먹는 밥, 내 자식들이 먹는 밥이 영 '아심찮은 밥'이 될 수밖에 없다.
살푸쟁이 논에서 난 쌀로 지은 밥이 아닌 밥은 내게는 모두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은 밥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먹어도 먹어도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밥이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 내 고향에 살푸쟁이 논은 없어져 버렸다. 그 논 위에 농공단지가 들어서 버렸다. 논은, 쌀은 더 이상 돈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밥보다 돈이 더 귀중한 세상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아직도 밥에서 단 한 발자국도 나가지 못하고 있는 나 같은 사람은 그래서 헤맬 수밖에 없다. 나의 살푸쟁이, 나의 살푸쟁이 쌀, 내 육신과 내 영혼을 살찌우는 나의 살푸쟁이 논에서 난 쌀로 지은 밥 한번 먹고 싶어 내 아버지처럼 천지사방 헤맸지마는 나는 내 영혼의 쌀독아지에 쌀이 비어 헤매고 있는 것이다. 내 살푸쟁이가 없어져 버려서.
아, 밥으로 가는 길은, 명실상부하게 피가 되고 살이 되고 안식이 되는 밥을 향해 가는 길은 지금도 내게는 너무 멀고 험한 길임에 틀림없다. 내게 밥 줄 사람, 거기 누구 없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