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0년 '들려줘요 사랑의 말을(Parlez-moi d'amour)'로 디스크 대상을 받은 이래
달콩한 목소리로 일세를 풍미한 뤼시엔느 부아이에는 1903년 경 파리의 몽파르나스에서
태어났으며, 본명은 '에밀리엔느 앙리에뜨 보와이에'이다.
제 1 차 대전으로 아버지 를 잃고 생활이 어려워 여공과 모델로 일하기도 하고 아테네극장의
타이피스트가 된 뒤, 그 지배인의 주선으로 연극 무대에 설 수가 있었다. 그러한 그녀에게서
가수로서의 재능을 간파한 딕션(발음교정) 선생인 에미 사뮈엘 부인의 권고로 가수로 전향,
데뷰한 것은 16세 때였으며, 이후 오랜 세월 동안 긴 밑바닥 생활이 계속된다.
1929년의 어느날, 작곡가 장 르느와르의 집을 방문했을 때 마침 어느 소푸라노 가수에게
이 곡을 가르치고 있는 것을 듣고 아름다운 멜로디에 반하여 장 르느와르에게 자기가 부르게
해달라고 간청, 그때까지 현실적인 샹송 중심이었던 이전의 창법을 달리하여 속삭이듯 부른 것이
세계적인 대히트를 기록하게 된다.
1930년 '들려줘요 사랑의 말을(Parlez-moi d'amour)' 이 노래로 디스크 대상을 받은 이래 비로소
가수로서의 명성을 확립한 뒤, 그녀의 레퍼터리는 종래의 어두운 현실적인 샹송에서 달콤한
사랑노래로 일변하였다. 이 노래는 얼마 후 14개 국어로 번역되어 전세계로 퍼져 나갔다.
그로부터 보비노, 오랑피아, 아폴로, 아랑브라 등 제 1 급의 뮤직 홀에 출연하게 되었으며
어디서나 열렬한 팬들의 성원을 받게 된다.
1939년 그녀가 경영하던 캬바레의 가수였던 쟈크 필스(Jacques Pills)와 결혼하여 1941년에는
계집아이가 태어났는데 그녀는 후에 가수가 되어 '톰 필리비'를 불러 성공을 거둔 '자클리느
보와이에'이다. 그러나 쟈크 필스와는 성격 차이로 1949년에 헤어지고 만다.
1942년, 마르세이유로 순회 공연을 간 보와이에는 젊은 바이올리니스트 푸랑크 푸르셀과
만나게 되고 반주 악단의 지휘자로써 계약하게 된다. 이후 8 년간 프랑크 푸르셀은 보와이에와
함께 하며 무드 뮤직의 제 1 인자가 되는 바탕을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뤼시엔느 보아이에는 80 세 가까이 되어서도 무대에 서서 노래를 불렀는데 1983 년 12월 6일에
세상을 떠났다. 이'들려줘요 사랑의 말을'은 '사랑의 말을' '달콤한 말' '사랑의 말을 들려 주세요'
등의 제목들로도 번역된 달콤하고 상냥한 사랑의 노래로서, 장 르느와르가 1923 년에 작사, 작곡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