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와 비슷하게 생긴 식용 피는 지금은 우리 주위에서 사라진 지 오랩니다.
흔히 지리산 10경(景) 중 하나로 피아골 단풍을 꼽는다. 천왕봉에 이어 지리산 제2봉인반야봉에서
부터 전남 구례 연곡사까지 20㎞ 거리의 계곡에 가을이깊어져 절정을 이룬핏빛 단풍의 아름다움은
달리 견줄 만한 곳이 흔치 않기 때문이다.피아골을 널리 알려지게 한 것은 단풍 외에도 있다.
임진왜란, 여순반란사건,6·25전쟁 등 주요 전란때마다 많은 희생자를 낸 계곡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이강천 감독의 1955년 개봉 영화 ‘피아골’도 이와 무관치 않다.
피아골은 일대에 피밭이 많아 피밭골로 불리다 발음하기 자연스럽게 변화한 이름이라고 전해온다.
피는 대표적인 구황식물이다. ‘사흘에 피죽 한 그릇도 못 먹었다’는 전래의 관용적 표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예부터 가난한 집에서도 다른 먹을거리가 없을 경우에 마지못해 먹었다. 벼의 생장을
방해하기 때문에 골칫거리로 여겨 논에서 가려 뽑아내는 피사리에 농부들은 그러잖아도 모자라는
일손을 더 빼앗겨야 하기도 했다.
종자마저 없어져 농촌진흥청이 지난해 5월29일 일본 농업생물자원연구소로부터 한반도가 원산지이거나 유전자가 토종화한 식물 자원 중에 1546점을 반환받기로 합의하고 1차로 전해받은 600점 중에 피의 토종 종자도 있었다. 인도가 원산지로 추정되는 피는 함북 회령 등지에서 탄화된 채로 출토돼 농경시대 초기부터 한반도에서도 재배한 것으로 알려져 있고, 조선시대 한때는 재배 면적이 10만㏊에 이르렀다고 한다.
하지만 시대의 변화와 함께 구황식품으로는 물론 사료로조차 외면당하기에 이른 피를 농촌진흥청은 현대적 기능성 작물로 복원한다고 최근 발표했다. 생육 기간이 짧고 척박한 토양에서도 잘 자라는 데다가 짚의 생산량이 많아 사료용·바이오에너지 소재용 등으로 크게 활용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기능성 생리활성 물질 또한 많이 함유한 것으로 확인돼 저탄소 녹색성장을 주도할 친환경 작물로 안성맞춤이라는 것이다.
평소엔 먹지 않지만 재해·재난이 닥쳤을 때 먹는 구황식품이 평상시에도 먹는 식품으로 전환되면서 식생활이 다양해지고 음식문화도 발달했다. 위기일수록 극복 의지와 실천이 새 기회를 더 만들고 더 넓힌다는 사실을 피 역시 새삼 일깨워준다.
김종호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