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쟁질서의 충돌과 한국 교육의 위기
교육정보 이것저것 2004/10/15 14:39   http://blog.azoomma.com/eunbit67/163727
 
 
경쟁질서의 충돌과 한국 교육의 위기
 
 
우리 자녀들의 교육 현실을 보면 안타깝기 짝이 없습니다. 한 쪽에서는 교육연좌제의 억울함이 피 꿇듯이 터져 나오고 다른 한 쪽에서는 밤새워 열심히 공부하는 내 자식에 무슨 잘못이 있는가 하는 절망의 목소리를 내뱉고 있습니다. 억울함과 절망의 울부짖음이 서로를 할퀴면서 우리 사회를 극단적인 혼란 속으로 내몰고 있습니다. 누가 우리의 젊은이들과 이들의 부모들로 하여금 이토록 가혹한 현실 속에서 허우적거리도록 만들었습니까?

우리에게 주어진 자원은 우리의 욕망에 비해 항상 부족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형태로든지 부족한 자원을 나누어 가지는 방법을 강구해야 합니다. 이를 힘센 순으로, 먼저 온 사람이 먼저 가지는 식으로, 또는 제비뽑기로, 나이순으로, 키순으로 등 무수히 많은 방법이 있을 것입니다. 아니면 절대 권력자의 힘으로 똑같이 나누어 가지도록 할 수도 있을 것이고 그것을 높이 평가하고 이의 대가를 지불하는 방식인 시장의 원리에 따르게 할 수도 있습니다. 어떤 방식이든지 이런 규칙들이 어우러져 한 나라의 질서를 형성합니다.

질서는 건축물의 골조와 같은 것으로, 한 나라의 경제성과는 여기에 결정적으로 좌우됩니다. ‘저 놈은 뼈대 있는 집의 출신’이란 것도 질서 형태의 중요성을 가정교육까지 언급한 말입니다. 즉 어떤 질서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그 구성원의 성과는 크게 달라집니다. 우리는 경쟁 질서를 택하였고 지난 40년간 역동적인 경제적 번영을 구가하였습니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오늘날처럼 주변 강대국에 당당했던 시기가 언제 있었습니까? 어느 누구도 시장경제의 선택에 대해 최소한 명시적으로는 시비를 걸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쟁질서는 능력경쟁을 질서 움직임의 기본적인 동력으로 삼고 있습니다. 즉, 시장에서 평가된 능력을 갖고 부족한 자원을 구성원 사이에 나누어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독 우리의 교육시장에서만은 그 특수성을 내세우면서 평등주의를 강요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대학교육 서비스가 누구나 필요에 따라 소비할 수 있는 풍부한 자원입니까? 얼핏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제 대학 전체의 입학정원 수가 입학지원자 수보다 많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나 이 말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이 누가 있겠습니까? 교육서비스의 질과 그것의 편익은 대학마다 달라 소위 명문 대학이 제공하는 교육서비스의 양은 절대적으로 부족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이를 나누어 가지기 위해서는 어떤 형태이든지 배분의 기준 내지 규칙이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 우리 교육인적자원부(이하 교육부)의 무능함과 무책임 그리고 교활하면서도 위선적인 모습을 읽을 수 있습니다.

학생의 선발 기준을 학업 능력에 두는 것을 누가 탓할 수 있습니까? 인성이나 적성 등 그 밖의 기준들이 학업 능력보다 우선할 수 있습니까? 우리의 초중고등 교육의 내용이 거의 모두 지식습득과 사고력 개발로 편성되어 있는데도 말입니다. 게다가 학업능력 외의 다른 기준들을 어떻게 객관적으로 평가할 것입니까? 모든 비리는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힘든 것을 기준으로 삼을 때 항상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대학은 보다 높은 학업능력 수행자를 뽑으려고 할 것이고 이를 객관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 기준을 마련할 것입니다. 학생들은 이 기준에 맞추기 위하여 어떤 수단도 마지하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공교육이 이를 충족시켜 주지 못한다면, 사교육에 의존할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만약 이런 수단들을 강구할 형편이 못되는 자가 있다면, 이들의 한스러움을 누가 보상해줄 것이며, 교육부는 평등주의가 달성되었다고 애써 자위할 수 있겠습니까?

교육부는 그렇기 때문에 차선책으로 학업능력의 기준으로 고등학교 내신 성적만을 강요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의 여러 문제점을 도외시하고라도 이를 위해서는 먼저 내신 성적에 대한 신뢰가 절대적이어야 합니다. 만약 내신 성적에 대한 신뢰도가 극히 떨어진다면 선발을 위한 다른 대안을 찾는 것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위한 대학 당국의 지극히 합리적이고 온정적인 조치이지 않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부가 내신 성적만을 강조한다면, 교육부가 그 내신 성적에 대해 최종적으로 공증의 책임을 지는 것이 당연한 도리입니다. 그렇지 않으면서, 학생정원이나 대학지원금의 감축을 운운하면서 대학에 압력을 가한다면, 대학보고 무엇을 하라는 말입니까? 이 경우 대학은 또 다른 편법을 적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교육부는 믿습니까? 그동안 무수히 많은 편법 사례를 접했을 것으로 짐작되는 교육부로서, 양심적이고 책임지는 자세가 진정으로 요구됩니다. 특히 최근에 크게 문제가 되고 있는 고교등급과 관련하여 교육부가 이를 지금까지 정말로 모르고 있었다면 무능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대개의 학부모들은 최소한 특목고의 학생들에게 묵시적인 가산점을 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기 자식의 고교 진학 시의 경험으로 인해 어느 정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이를 사전에 어느 정도라도 알고 있었음에도 새롭게 발견한 것처럼 처신한다면, 교육부는 교활함과 위선의 그 자체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교육시장에서의 평등주의는 엄청난 자원낭비와 배분 결과에 있어서의 비평등주의를 초래합니다. 한 나라의 모든 부문의 성과는 어떤 질서를 선택하는 가에 못지않게, 그것을 연관되는 해당 부문에 어떻게 일관되게 적용하는 가에도 크게 좌우됩니다. 교육시장에서 평등주의가 적용되기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노동시장에서도 평등주의가 적용되어야 합니다. 지금의 우리 경우처럼 교육 부문을 제외한 모든 부문에서는 시장경제질서를 받아들이면서, 유독 교육부문에서만 평등주의가 적용되고 있다면 일대의 혼란은 피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들 모든 부문은 서로 연관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대학 교육시장과 신규 노동시장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에, 기업의 취업 기준이 곧 학생의 대학 선택 기준이 됩니다. 기업으로 하여금 아무리 대학을 보지 말고 학생의 능력을 보아라고 한들 기업이 여기에 따르지 않는다면 그것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기업에게도 이를 강요할 것입니까? 그것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노동시장도 명령과 복종의 조정체계를 전제로 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의 자녀들과 이들의 부모들이 유치원부터 고등학교까지 교육의 목표를 기업의 취업기준인 명문대학교 우선 기준에 맞추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입니다. 누가 이에 대해 손가락질 할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것을 성취하는 것은 소수에 한정되고, 이에 투입된 대부분의 자원과 고통이 허망한 자원낭비로 귀결된다면 공동체의 구성원을 이렇게 이끈 시스템 내지 질서에 문제가 없는지 깊은 반성이 있어야 하고 제도 개선에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것은 먼저 이 모든 원인이 부문간의 질서 충돌을 애써 무시하는 교육부의 망상에 가까운 평등주의에 있음을 교육부가 깨닫는 것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어차피 우리 모든 자녀들이 경쟁의 틀 속에서 살 수 밖에 없다면, 그것을 비교적 어린 시절부터 경험하게 하는 것이 명문대학교 외의 다른 대안을 모색하는 기회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또한 학생 각자의 능력과 소양을 이른 시기부터 걸러주는 필터 역할을 하여 전국의 거의 모든 학생들이 명문대학교의 진학만을 목표로 매달리는 데서 오는 엄청난 자원 낭비를 사전에 방지하는 기능도 할 것입니다. 특히 특목고에 재학 중인 학생들의 사교육비 지출이 일반 고등학교의 학생에 비해 매우 낮다는 점은 고등학교의 부분적인 선별 입시 허용이 가난하지만 우수한 학생들에게도 좀 더 양질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줄 수 있음을 암시합니다.

교육부는 학업능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를 전적으로 대학교에 일임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래야만이 모든 대학교는 나름대로의 건학 이념으로 다양한 교육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습니다. 내신 성적이 공정하고 객관적으로 평가된다고 하더라도, 원하는 대학교의 원하는 학과는 내신 1 등급을 받는 전체 학생 수에 비해서 제한적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결국 선발은 피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대학은 내신 성적 외의 또 다른 학업평가 기준을 마련해야 합니다. 여기에까지 교육부가 평등주의를 내세워 또 다시 간여한다면, 학생 선발의 전권을 교육부가 행사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잘 작동되기 위해서는 이 사회의 모든 부문을 평등주의로 가는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부가 그렇게 할 수 없다면, 질서일치적인 교육정책을 선택할 수밖에 없습니다.

교육부는 교육시장에 개입하면 할수록 교육시장의 자원배분이 왜곡될 뿐만 아니라, 그것이 결국 원래의 취지와는 반대로 가지지 못한 자나 약자에게 더욱 가혹한 결과를 초래함을 명심해야 합니다. 혹시 교육부의 교육시장에 대한 개입이 교육부의 존속과 권한 유지와 강화를 위한 것이라면 교육부의 존폐 문제를 포함하여 교육부를 견제할 새로운 체제 구축을 심각히 고려해야 할 것입니다.
 
배진영 (인제대학교 국제경상학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