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랑하는 자
요한 계시록 2011/10/12 08:08   http://blog.azoomma.com/dojsuk/286000
 

초대교회 당시 이방지역에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의 지체들과 이 마지막 교회시대의 믿는 자들의 공통점이 있으니 다음과 같은 비유를 통해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 그런데 당시 그들은 그리스도께로 책망과 징계를 받았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깨닫는 영혼은 환난으로 들어가고 있는 이 마지막 때의 믿는 자들이 왜 책망과 징계를 받는지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어떤 남자가 작은 진주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진주는 크기는 비록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 진주는 아무리 높은 사람도 가질 수 없고 아무리 일을 많이 해도 얻을 수 없고 아무리 많은 돈을 주어도 살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 남자는 이렇게 소중한 진주를 자기가 사랑하는 여자에게 값없이 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남자는 그것을 작은 상자에다 넣고 하얀 종이로 포장했다. 한편 어떤 여자가 자신이 아끼는 바보상자를 가지고 그 남자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그 바보상자는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앉아서 볼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컸다. 그런데 그 여자도 자신이 아끼는 여자에게 그것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러므로 택배박스로 포장을 하고 나니 상자가 엄청나게 컸다. 이제 그 남자와 그 여자는 각각 작은 선물과 큰 선물을 들고 자기가 아는 여자를 찾아가서 자기가 준비한 상자를 주며 이것은 당신을 위한 선물이라고 했다. 이에 여자는 남자의 선물은 크기가 작은 것을 보고 실망하며 풀어보지 않았다. 그러나 그 여자의 선물이 큰 것을 보고는 매우 기뻐하며 기대에 부풀어 뜯어보았다. 그러므로 그 여자는 밤낮으로 사람들을 모아 함께 텔레비전을 보고 즐기며 허송세월 했다. 그러나 남자가 준 작은 상자의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는지 몰랐으니 텔레비전에 빠져 끝까지 뜯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은 누군가에게 선물을 받으면 그 선물을 풀어보고 그 안의 내용을 보아야 그가 기뻐할 터인데 그때 사람들과 지금 사람들의 공통점은 가장 작은 박스를 보고는 실망한다. 그러므로 이 마지막 시대에는 말씀을 전하는 자도 말씀의 비밀을 알려고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주장으로 말을 전하고 있으며 또한 듣는 자들도 그 말이 그 말이라며 자신의 믿음을 쌓아 올리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판단한다.

 

게다가 갈급한 마음이 없는 그들은 가장 큰 박스를 보고는 기뻐한다. 즉 많은 사람들이 모이며 많은 돈이 나오며 큰 건물로 들어가기 원한다. 그러므로 교인들을 데리고 나가지 않는 한 거룩한 공동체로 어떤 사람들이 어떤 마음을 품고 들어와도 상관없다. 오직 사람의 수가 많으면 그저 좋다. 그 물질을 내는 자가 아버지의 마음에 합당하지 않아도 혹은 그것이 어떤 물질이라도 많이 내면 무조건 좋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 세상의 모든 건물들이 땅속으로 내려가도 또한 눈앞으로 다가온 한민족의 환난에서 큰 도시들의 모든 건물이 다 무너져내려도 상관없다. 오직 무너지게 될 건물을 크고 아름답게 짓되 이것이 교회요 성전이니 그 일에 복이 있다고 말하며 사람들을 생명 없는 곳으로 열심히 이끌고 있다. 전쟁의 전날까지 그럴 것이요 전쟁이 끝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러하니 이 마지막 때의 믿는 자들이 어찌 아버지와 아들께 책망과 징계를 받지 않을 수 있으리요? 하지만 아버지의 입장에서는 아무에게나 훈계를 허락하시지 않으신다. 마찬가지로 사람의 입장에서도 누구나 다 책망과 징계를 받는 것이 아니요 또한 그것을 받았다 하여 다 돌이키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누가 사생자이며 누가 참 아들인지 즉 아버지께서는 사랑하시는 자와 사랑하시지 아니하시는 자를 어떻게 구분하시는지 한 가지 비유를 통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한 아비가 두 아들을 데리고 있다. 그런데 첫째 아이는 오직 일만 열심히 하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는 바깥에 나가 열심히 농사를 짓고 밭을 가꾸었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하니 일은 열심히 많이 오래하되 늘 아버지가 원치 않는 엉뚱한 일들을 벌였다. 반면 둘째 아이는 늘 아비의 품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는 아버지와 함께 거하는 시간이 많기에 자연히 책망을 많이 듣고 훈계를 많이 받았다. 그러나 둘째는 오히려 그것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마음을 알고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오직 아버지가 원하는 일만 했다. 그리하여 아비의 마음도 늘 둘째에게 있었다. 결국 그 아비는 첫째가 일을 하고 들어오면 그에게 잘했다고 칭찬한 후 그가 일한 만큼에 맞는 상급을 주었다. 하지만 잘못한 것에 대해선 꾸지람을 주었다. 그러나 늘 아비의 품에서 아비의 마음을 알고 행한 둘째는 나중에 오직 칭찬과 상급만을 받았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께서는 살고자 하는 갈급한 마음을 가지고 불의와 죄악이 가득한 이 세상에서 나와 자신의 거룩한 품 안에 거하는 영혼을 사랑하신다. 그리고 사랑하는 그를 통하여 아버지의 그 뜻을 이루어가기 원하신다. 그러므로 자신의 한 몸 안에 거하는 영혼이 의롭고 거룩하게 되도록 늘 책망과 훈계를 주시되 그것은 마음을 찌르는 것이요 채찍질같이 아프다. 하지만 부모에게 매를 맞을 때 잘못했다고 빌며 사랑의 품에 안기는 자식이 있다. 그러므로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책망과 훈계를 받은 영혼은 공동체 안에서 아버지의 뜻을 이루어가게 된다. 그리하여 거룩을 이룬 자들이 거룩한 육체를 입고 아버지의 거룩한 자녀로서 그리스도와 형제자매로서 영원히 함께 거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동일하게 매를 맞아도 부모를 원망하며 그 품에서 도망가는 자식도 있다. 그러므로 세상에 거하는 영혼은 책망과 훈계를 받지 못한다. 그리고 책망과 훈계가 없으니 거룩을 이루지 못하여 자녀 됨의 약속에 참여하지 못하게 된다. 또한 그가 아무리 크고 많은 일들을 이루었어도 마지막 심판대에서는 칭찬대신 오히려 책망을 받는다. 거룩을 거부한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말과 행위는 오직 자신의 욕심과 뜻과 계획을 이루기 위한 불법이기 때문이다.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생명의 근원되신 아버지와 그의 아들이시오 창조자이신 그리스도를 아는 자는 이 말씀을 안다면 이를 지키면 은혜와 유익이 있을 것이요 아버지와 아들을 모르는 자는 말씀에 자신의 생명이 있으니 이 은혜를 입는 것이 유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