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보는 詩 /주정연 시인의 <구월>
좋은시 2008/10/08 13:35   http://blog.azoomma.com/bomza/281672
 

구월 / 주졍연


새벽 담장에 매달린
표주박 달마께서
귀뚜라미 장한가를 새겨듣는데
갈피갈피 팔만대장경
구비구비 팔만구암자
하고많은 딸각발이
구구절절 백팔번뇌를
뉜들 이루 다 헤아리리오,

애시당초 혀 짧은 중생이
무량천년 즈믄 해가 자가웃 모자라서
올해도 미처 못다 쓴 시
달보드레한 표주박 속내에
햇씨앗으로 여무는데
또렷또렷 여무는데

한 됫박 어둠 가신 바지랑대 끝에
저리도 아아슬히 돌아눕는 반달이야,


 
~~~~~~
 
시평/시인 고중영

*시란 모름지기 자유로운 영혼의 유추력과 상상력이 정제된 결정체(結晶體)라야 한다고 본다.
시의 형태가 어떤 방향으로 흐르던 시는 아무래도 감미로울수록 좋은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주정연 시인의 시 /구월/은 근 10여 년 전에 쓴 것으로
내 머리 속에 각인되어 있는데 맞는지 모르겠는데 그때는 내가 서울에 있을 때다.
어쨌든 /구월/이 목나에 발표되고 얼마 뒤 전남 광주에 일이 있어 갔다가
돌아오는 차안에서 목나 시집에 실린 /구월/을 읽다가
너무 기쁜 나머지 핸드폰으로 주정연 시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주시인 /구월이야 말로 대단한 시이구려. 묘사도 좋고 수사(修辭)도
뛰어날 뿐 아니라 시어들이 풍기는 구수함과 혀끝을 감고 도는 구수한 맛이 천하일품이요.
참 좋소. 주시인의 대표작이라 할 만하구려./
그 뒤로도 주시인과 술자리에 마주앉으면 /구월/의 끝 연
/한 됫박 어둠 가신 바지랑대 끝에
저리도 아아슬히 돌아눕는 반달이야./가
등장하고 우리는 그 감칠맛을 혀끝에 올려놓고 초콜렛을 살살 녹이며
단맛을 음미하듯 술을 마시며 즐거워하곤 했을 뿐 아니라
나는 한가한 시간에 그 시가 생각나면 책을 꺼내들고 혹은 컴에서 꺼내놓고
/구월/을 읽으며 행복해 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목나 시집은 책더미
속으로 묻혀 찾을 길이 없는데 컴에서 조차 찾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어서 김일로 선생님의 시와 주정연 시인의 그림으로 잔치를 벌였던 목동에서 만난 김에
/주시인. 거 /구월/이 목나 사이트에서 사라진 게요? 찾을 수가 없으니 원.
/ 하고 투정 아닌 투정을 부렸더니
/웬걸요. 있어요./ 한다.
/그럼 찾아서 내 이메일로 좀 보내주구려./
/그럽시다. 그려/하고 헤어졌는데 어제 이메일에 주정연이라는 이름과 함께
/구월/이 도착했다. 얼마나 반가운지 모르겠다.
시의 짜임새도 그렇거니와 마디마디 이어지는 시어의 관절들이
어찌나 부드럽게 이어졌는지 그 시를 읽고 있노라면 달콤함이 입에
고이면서 시를 쓸 때의 주시인 표정이 아아슬히 돌아눕는 반달처럼 떠오른다.
사설을 이쯤 해두고 이 /구월/이라는 시를 문학적 해부할
필요가 있다고 느껴 나름대로 해체해보기로 한다.

도입부 부터 시의 표정이 동그랗다.
/새벽 담장에 매달린 표주박 달마께서 귀뚜라미 장한가를 새겨듣는데/라고 했다.
이 시의 도입부부터 주시인은 표주박 동그란 얼굴에 달마를 새겨 還置시키는 작업을 하고 있다.
콜럼버스의 계란과도 같다.
/귀뚜라미 장한가를 새겨듣는데/ 가히 그럴만하다. 사물이 의인화되어 의인화된
사물이 무엇엔가 몰두하는 정관(靜觀)의 세계로 들어간 시인의 영혼이야말로 면벽(面壁)이고 초정밀의 세계다.

/갈피갈피 팔만대장경
굽이굽이 팔만 구 암자/다.
묘사의 한계와 수사(修辭)의 백미를 넘어선 무념의 경지에서 읊조린 노래 구절은
시인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유추할 수 없는 것이고 시인이라면 누구나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는 부분이다. 이 구절은 환유(歡游)의 세계를 누비고 돌아와
문학의 아량과 너비를 뜻하는 폭넓은 표현이다.

/하고 많은 딸각발이
구구절절 백팔번뇌를/이다.
이 부분은 세상과 인생을 진정으로 사랑할 주 모르는 사람은 이해하기 어렵다.
딸각발이라 함은 물론 주시인의 취향으로부터 나온 시어(詩語)이긴 하겠지만
/불편한 중생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불편한 중생이 고해를 건너랴하니 구구절절 백팔번뇌를 어이할꼬.
다 /뉜들 다 헤아리리오./는 *헤아리지 못한다는 표현은 체념이 절대 아니다.*
우리들 모두가 샅샅이 헤아려 보자는 말의 또 다른 표현이다.
세상을 사랑하고 인생을 귀하게 여기는 시인이 아니고서는 이런 애소(哀訴)가 나올 리 없다.

/애시당초 혀 짧은 중생이
무량천년 즈믄 해가 자가웃 모자라서
올해도 미쳐 못다 쓴 시/는
한량없음의 또 다른 표현이다. /혀 짧은 중생/이라 함은 /믿음이 모자란 중생/으로 통한다.
믿음이 모자란다 함은 의심에 가득 차 있다는 또 다른 말이고
의심에 시달린다는 무지하다는 말로 통한다. 모르니 의심할 수밖에 없다.
다시 말하자면 자기의 존재조차 미확인되었다라는 철학적 표현이다.
/무량천년 즈믄 해가 자가웃 모자라서/다.
/무량천년 즈믄 해/라는 표현에서는 어쩔 수 없이 불교의 법성계를 들먹이지 않을 수 없다.
법성계에는 /한없는 긴 시간이 한 생각 일념이고 찰나의 한 생각이 무량한 긴 겁이니/라는 구절이 있다.
시인에게는 무량천년 즈믄 해가 아니라 무량만년 기운 해도 어차피 자가웃은 모자라게 되어있다.
그래서 시인은 각고하는 사람이어야 하고 또 무변한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다.

/달보드레한 표주박 속내에
햇 씨앗으로 여무는데
또렷또렷 여무는데/다
여기서/달보드레한/이라는 말은 참으로 종잡기 어려운 말이긴 하나 어휘가 달콤하기 이를 데 없다.
 /달고 보드라운/과 /달의 부드러운/ 둘 중의 어느 것이라 해도 무방하다는 느낌이 든다.
/햇 씨앗으로 여무는데
또렷또렷 여무는데/다.
주시인의 시심에서 발현된 시어들이 표주박 속내에서 햇 씨앗으로 여문다?
놀라운 차용술이고 문학적 테크닉이다. 그래. 그렇게 하자. 표주박 속내에게 맡겨서 감칠맛 나게 익혀보자?
어디보자. 그 시어들이 십여 년이 지난 오늘에는 얼마나 여물었을꼬. 허허
/한 됫박 어둠 가신 바지랑대 끝에
저리도 아아슬히 돌아눕는 반달이야./
그럴 것이다. 세상을 꿰뚫어 보는 눈으로 우주를 관조하면 어둠은 가시게 마련이다.
사물의 배경이나 관념의 배후까지 보이는 것이 시인의 눈이고 탈속한 사람의 기능이다.
이 시는 자칫 불교적인 분위기로 이해될지 모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다.
시는 아니, 시인은 종교를 초월한다.
이 시에서 주시인은 다만 불교적 언어들을 차용한 것 뿐이라는
점을 명백하게 밝히고 싶다. 完 ( 誤字는 정정하지 않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