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와 신라, 지하에서 만나다－
“영풍군 순흥면 어딘가에 벽화고분이 있다던데….”
1960년대부터 대구·경북지역 골동품상 사이에 파다하게 돈 소문이었다. 진홍섭 당시 이화여대 박물관장은 그 소문을 토대로 암중모색을 계속했다. 그러다가 73년 영풍군 순흥면 태장리에서 어숙지술간묘(於宿知述干墓)를 발굴했다.
마을 주민에 따르면 30년대만 해도 온전한 이 벽화묘 벽에 바른 횟가루를 뜯어먹으면 만병통치라는 소문이 돌아 구경꾼들이 이 묘를 훼손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어숙지술간묘’는 최초의 신라 벽화고분인 데다 ‘을묘년어숙지술간(乙卯年於宿知述干)’이라는 명문이 붙어있어 연대(595년 추정)를 알 수 있는 무덤이었다. 당연히 사적(238호)으로 지정됐다.
◇버려진 고분에서 발견한 신라벽화=그렇게 순흥면 일대의 벽화무덤을 둘러싼 소문의 진상은 완전히 규명된 것 같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85년 1월29일, 대구대 이명식 교수는 어숙묘에서 불과 1㎞ 떨어진 순흥 읍내리 일대를 답사하고 있었다.
“이상한 무덤 하나를 발견했어요. 다른 폐고분들은 다 눈으로 덮여 있는데 유독 한 무덤은 눈이 쌓여 있지 않고 흙빛 그대로였어요. 도굴된 무덤이었어요.”
도굴 구멍은 한 사람이 겨우 들어갈 정도의 크기였다. 어두운 무덤 내부. 놀라운 광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무덤 북벽에 연꽃과 함께 구름 그림이 보인 것이다.
“숨이 멎는 듯했습니다. 그런데 발에 걸리는 것이 있어 보았더니 인골이었어요. 순간 등골이 오싹해졌어요.”
일단 철수한 그는 3일 뒤 다시 무덤을 찾아 정신없이 실측하고 촬영했다. 학교로 돌아가 필름을 인화한 그는 또한번 흥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인물상이 선명하고, 벽면에 ‘기미(己未)’명을 포함, 9자 묵서명을 발견한 것이다. 유명한 순흥 읍내리 벽화고분의 극적인 부활이었다.
6개월 뒤 국립문화재연구소와 대구대 공동으로 발굴을 실시하는 것으로 결정됐다. 이명식 교수가 밝히는 한가지 여담. 7월말쯤인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유적의 중요성을 알았는지 방문하기로 결정한 것이다.“공무원들이 총동원됐어요. 순식간에 비포장이던 풍기~순흥간 6㎞ 도로변을 꽃으로 장식했어요. 도로변 집들의 담장을 시멘트블록으로 새 단장하는 촌극도 빚었고요. 웃기는 건 정작 대통령 방문이 취소됐다는 겁니다.” 씁쓸한 군사문화의 편린이다.
◇한 사람의 남자와 8명의 여인?=우여곡절 끝에 본격 발굴이 시작됐다. 벽화는 천장을 제외하고, 모든 벽면에 회를 바르고 그 위에 묵선(墨線)으로 형태를 잡은 후 채색하는 기법을 사용했다. 동벽엔 산악도(山岳圖)와 서조도(瑞鳥圖)가 남아 있었다. 서조도는 주작 혹은 봉황으로 판단되지만 사신도(四神圖)와는 관련이 없는 것이 분명했다. 서벽에 연결되는 널길 벽에는 뱀을 움켜잡은 역사도(力士圖)가 있었다.
특징적인 것은 길다란 3지창(三枝槍)을 잡고 있는 널길 동벽의 역사상. 삼지창 옆에는 두 줄로 간지가 있는 9자의 먹글씨가 있었다. 벽화의 내용을 보면 역시 고구려의 영향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지만 고구려의 사신도 벽화와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도굴로 인해 유물은 사라졌지만 모두 9인분 가량의 인골이 발견됐다. 재미있는 것은 40세 이상의 남자 주인공에 20세 이상의 여주인공이 묻혔다는 점이다. 20년 이상의 차이라. 발굴단 사이에 농이 터졌다. “이거 세컨드(첩) 아니야?” 나머지 뼈들은 모두 17~21세 여성의 것이었다.
‘기미’명 간지와 인골이 남아 있었던 건 천만다행. 축조시기를 가늠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간지는 60년의 간격을 가지고 있다. 그러면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인인가, 신라인인가. 벽화의 내용에 고구려적인 요소가 많다는 점은 무덤의 주인공이 고구려인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한편으로는 위치가 신라의 영역이라는 점에서 신라와의 관계를 배제할 수 없었다.
최초 발견자인 이명식 교수는 539년에 조성된 고구려 무덤이라고 주장한다. 이 무덤의 피장자는 고구려가 파견한 지방통치세력이라는 것이다. 그는 순흥 지역은 신라 진흥왕이 551년 북진할 때까지 40여년간 고구려 영토였다는 점을 그 근거로 제시한다.
하지만 분명한 건 순흥 주변에서 고구려적인 유물이 전혀 출토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이 무덤이 신라 무덤일 수밖에 없지 않은가. 또한 왜 9인이라는 많은 사람의 인골이 한꺼번에 묻혀 있는가. 주인공의 사후에 함께 묻히는 순장이 아닌가. 가족 무덤이란 주장도 있으나 함께 묻혀있는 인골이 모두 17세 이상 비슷한 나이의 여성이라는 점을 상기하자. 이는 가족장이 아니라 순장이라는 얘기다. 결국 ‘기미년’은 순장이 이루어지고 있을 때다. 주목할 것은 순장이 지증왕 3년(502년)에 금지됐다는 점.
◇무덤의 주인공은 479년 죽은 신라인?=그렇다면 이 무덤은 순장이 실시되던 간지, 즉 479년에 조성된 것이 아닌가. 삼불 김원룡 선생은 순흥의 벽화무덤을 기본적으로는 고구려계이면서 부득이 현지 양식화한, 말하자면 신라화한 고구려 계통의 무덤으로 해석했다. 신라의 가장 북쪽 외곽지대인 이 지역에 정착하게 된 고구려계 주민의 이주집단 혹은 그 후예들이라는 것. 그 근거로 고구려는 기년(紀年)에 반드시 연호를 쓰고 있지만 순흥의 두 무덤, 즉 어숙묘·읍내리 고분의 명문은 모두 간지뿐이라는 점을 제시한다. 또한 고구려 영토 안에 있는 벽화고분은 주로 지안·평양 등 수도에 국한돼 있음도 주목한다. 그것은 벽화고분이 중앙귀족에게만 허용된 묘제라는 뜻. 결국 이 무덤은 신라 영토 안의 고분이라는 것이다. 안휘준 서울대 교수도 벽화의 화풍이 고구려 고분벽화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는 점은 인정한다. 이 벽화는 묘주의 국적이 무엇이든 고구려의 영향을 받아 제작된 고신라의 것일 가능성을 제기한다.
벽화 중 역사(力士)가 차고 있는 귀고리를 주목하라는 것. 고구려 역사상들은 옷과 신발을 갖추어 착용하지만 귀고리를 다는 법은 없다. 그러나 신라인들은 적극적으로 귀고리를 애용했다. 따라서 역사상에 귀고리를 패용시킨 것은 아무래도 신라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연대는 479년이라는 것. 이 무덤의 ‘산악도’는 고구려의 덕흥리고분(408년)이나 무용총(5세기 후반)과 비슷하다.
당시 발굴조사에서 특기할 사항은 벽화 훼손을 막기 위해 가설덧집을 마련했고, 내부온도와 습도를 측정하여 온습기와 대형 선풍기를 설치했다는 것. 명문에 대한 적외선 촬영을 시도한 것과, 국립영화제작소팀이 조사진행과정을 기록한 것도 첫 시도였다. 내부조사가 완료될 무렵 현장에서 지도위원들과 조사위원들의 연석회의를 통해 무덤의 성격을 규명하는, 이른바 즉석 세미나를 개최한 것도 처음이었다.
〈조유전/고고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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